국무총리실이 민간인을 무차별 사찰해 왔다는 증거가 드러났다.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자행한 사찰 내용이 담긴 문건 2600여건이 무더기로 공개됐다.

문건에는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업무대상인 고위 공무원과 공기업 임원 외에도 민간인과 재벌 총수, 국회의원, 심지어 언론계 및 금융계 인사들에 대한 사찰 내용까지 대거 포함된 것이 확인돼 총리실의 사찰이 무차별적으로 벌어졌던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이 문건을 확보하고도 수사를 하지 않았다. 이 같은 사실은 이명박 대통령 대선캠프 특보출신 김인규 KBS 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파업 중인 KBS 새노조가 제작하는 인터넷뉴스 <리셋 KBS뉴스9>를 통해 알려졌다.

다음은 전국단위종합일간지 3월30일자 1면 머리기사 제목들이다.

경향신문 <"YTN 배사장, 정권 충성심 높다">
국민일보 <북 발사장 분주…결국 쏘나>
동아일보 <전 세계 환자들과 24시간 핫라인 / 의료서 통역-관광까지 풀서비스>
서울신문 <늙어 일하기도 서러운데…>
세계일보 <동해 방공구역 러시아 앞마당?>
조선일보 <어른들의 불법행위 아이들이 닮아간다>
중앙일보 <만주 옥수수밭 흙먼지 12시간이면 서울도착 급행 황사 잦아진다>
한겨레
한국일보 <총리실 3년간 무차별 사찰 2619건 드러나>

조중동국 제외한 나머지 5개 조간, 총리실 사찰문건 1면 보도

이번에 드러난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문건이 2600여건에 이른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정부 스스로 광범위하게 불법을 자행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입수된 문건은 2008년에서 2010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추가 문건이 더 있을 거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정부가 민간인을 전방위적으로 사찰했다는 사태의 심각성 때문에 신문들은 지면에서 관련 내용을 주요하게 다뤘다.

경향신문("YTN 배사장, 정권 충성심 높다"), 서울신문 ("총리실, 정·재계·언론 전방위) 사찰">), 세계일보 ("총리실, 정관계 인사·기업인 등 무차별 사찰"), (MB정부 불법사찰…대한민국이 감시당했다), 한국일보 (총리실 3년간 무차별 사찰 2619건 드러나) 등 5개 조간들은 모두 이 사건을 1면에 배치했다.

하지만 조선·중앙·동아·국민일보 등 4개 신문은 이 사실을 외면했다. 4개사 중 조선일보가 유일하게 관련 내용을 10면("총리실 사찰 증거"라며 일부 문건 공개)에 실었지만 "일부 내용을 제외하고는 동향을 파악한 수준인 것도 적지 않다"고 의미를 깎아내리는 모습을 보였다.

청와대 개입·언론사 사찰 통한 언론 장악 시도 드러나

KBS 새노조가 입수한 2619건의 총리실 사찰 문건에는 사찰 과정에 청와대가 개입한 정황도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2008~2010년 작성된 청와대 하명사건 처리부에는 이명박 대통령을 풍자하는 동영상을 올려 금융사 대표에서 쫓겨난 김종익 전 KB한마음 대표 외에 사립학교 이사장, 산부인과 의사, 서울대병원 노조 등 또 다른 민간인들이 포함됐다. 서울대병원 노조는 2008년 촛불집회 당시 이명박 대통령 패러디 그림을 병원 벽보에 붙여 사찰을 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민간인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사찰 대상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공기업 임원에 대한 사찰도 다수 확인됐다. 문건에 기록된 공기업 임원은 이세웅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 김문식 전 국가시험원장, 김광식 전 한국조폐공사 감사 등으로 모두 노무현 정부 때 임명된 이들이다. 한국일보는 "공직자 감찰이 공직윤리지원관실의 고유 업무라고 해도 이들 대부분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 사퇴, 당시 사찰이 정치적 목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시민단체 대표와 문화계 인사 등 사회 각 분야 인사 및 고위공직자에 대한 감찰보고, 장·차관의 복무동향도 꼼꼼히 기록됐다. 어청수, 강희락 전 경찰청장의 업무능력과 비위 의혹을 조사하기도 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삼성비자금 수사 이후 설립한 삼성고른기회장학재단 등 기업인 관련단체, 강정원 전 KB국민은행장 등에 대한 사찰 정황도 포함됐다.

문건에는 정부에 비판적 글을 쓴 경찰대 교수, 경찰 내부망에 비판적인 글을 올린 하위직 경찰관들에 대한 동향 파악도 이뤄졌다. 특히, 전현직 경찰관들의 모임인 무궁화클럽에 대한 사찰문건은 150건이나 발견됐다. 화물연대와 현대자동차노조 등 노동단체도 사찰 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한겨레는 사찰 문건이 "참여정부 인사는 '축출용' MB 정부 인사는 '충성 검증용"으로 이용됐다고 보도했다.

"방송사 임원 교체" 옆에 뚜렷하게 적힌 'BH(청와대) 하명'

특히, 사찰 보고서에는 청와대가 언론사 임원 교체에 관여한 정황까지 담겨 있어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2009년 8월25일 작성된 'KBS, YTN, MBC 임원진 교체 방향 보고' 문건 비고란에는 'BH', 즉 청와대 하명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 시기는 김인규 KBS 사장과 YTN 배석규 사장의 선임이 결정되고 엄기영 전 MBC 사장에 대한 퇴임 압박이 거세지던 때다.

신문들은 "청와대가 방송사 인사에 직접 개입했다는 얘기"라고 보도했다. 경향신문은 "이 항목(BH)은 3개월 뒤인 11월에 작성된 문서에서도 발견됐다"며 "(청와대가) 방송사 인사에 지속적으로 개입했음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2009년 9월3일자로 작성된 'YTN 최근 동향 및 경영진 인사 관련 보고'는 이명박 정부의 언론장악 시나리오가 그대로 실현됐음을 보여준다.

'노조의 반발 제압'이라는 소제목으로 정리된 이 문건은 배석규 사장 직무대행을 '정권에 충성심이 높다'고 평가한 뒤 정식 사장으로 임명해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배 사장은 한 달 뒤 구본홍 사장에 이어 사장에 올랐다. 보고서는 배 사장이 좌편향 방송을 시정조치했다고 적었다.

또, 구본홍 전 사장의 출근저지 투쟁을 벌여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돼 1심 판결에서 벌금형을 받은 노종면 당시 노조위원장에 대해서는 "검찰에 항소 건의"라고 적혀 있다. 노 전 위원장은 현재 해고된 상태다.

'KBS 최근 동향 보고'라는 문건에는 김인규 사장 임명 당시 노조의 반발 진압과정과 김 사장 측근에 대한 인물평이 세세히 담겨 있다. 문건에는 김 사장이 뉴스 포맷 변경(기자중심→앵커중심) 등으로 'KBS의 색깔을 바꾸고 인사와 조직개편을 거쳐 조직을 장악한 후 수신료 현실화' 등을 추진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측근 인사들을 주요보직에 배치해 친정체제 토대를 마련했다고 평가한 대목에는 인사실장 박갑진, 보도본부장 이정봉씨를 예로 들며 괄호 안에 각각 이명박 대통령의 고향인 '포항 출신', 김 사장 옹립 모임으로 알려진 '수요회 회장'이라고 적혀 있다.

KBS 간부들에 대한 인물평도 있다. 김 사장에 대해서는 '소신을 너무 쉽게 발설하며, 한국디지털미디어산업협회장 시절 운전기사와 비서까지 KBS로 데려와 자기 사람을 너무 챙긴다는 지적도 있다'고 했다. 고대영 당시 보도총괄팀장 등 측근들에 대해서는 '김인규를 닮아 자신감이 지나쳐 건방져 보인다는 지적을 받기도 함'이라고 평했다.

이밖에 '1팀 사건 진행 상황' 리스트(2009년 11월9일)에는 김종익 전 KB한마음 대표에 대한 사찰을 보도한 MBC 'PD수첩'의 역대 작가 등 동향 추적과 '한겨레21 박용현 편집장'이라는 항목이 포함돼 있다.

당시는 이 광우병 편으로 재판을 받고 있었다. 주요 방송 뿐만 아니라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에 대한 전방위적이고 지속적인 사찰이 이뤄졌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한겨레는 "비판 언론이 집중 표적이 됐다"고 했다.

KBS 새노조는 "정부의 언론장악 실체가 드러난 만큼 정권의 낙하산 사장을 하루 빨리 공영방송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위공무원 불륜행각 분 단위로 기록…도청 등 불법수단 동원 의심

사찰 수준도 놀라울 정도다. 사찰 대상의 동선을 따라 시간과 장소를 적시한 사찰 보고서 내용은 공직자를 대상으로 한 사찰이라고 하더라도 도를 넘는 수단과 방법이 동원됐음을 보여준다.

2009년 5월19일 고위공무원에 대해 실시한 사찰 문건에는 불륜 행각이 '분' 단위로 상세히 적혀 있다. 문건에는 이 간부와 내연녀와 함께 간 장소와 시간 뿐만 아니라 당시 지었던 표정, 어떤 말을 했는지까지 묘사돼 있다.

문건에는 '밤 10시30분, 차 밖에서 선 채로 내연녀와 이야기하다가 가볍게 뽀뽀를 하고 헤어질 듯 하더니 같이 아파트로 걸어 들어갔다'거나 '병맥주 2병과 과자 3봉지를 구입했으며, 계산을 하려다 내연녀가 맥주 1병을 떨어뜨려 깨뜨렸다. 당신 딸에게 뭘 사주지라고 이 간부가 묻자 내연녀는 초콜릿이면 된다고 말했다'는 등 도청이 아니면 불가능한 내용들까지 적혀 있다.

해당 간부는 사찰 문건이 보고된 뒤 두 달 뒤 "건강이 나빠졌다"며 사의를 표명했다.

검찰, 2010년 수사 때 사찰문건 확보하고도 숨긴 이유 뭔가?

검찰도 관련 문건을 2010년 김종익 전 KB한마음 대표 사찰 사건이 불거졌을 당시 확보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검찰은 당시 김 전 대표와 남경필 의원 부인의 소송 사건 외에 다른 불법사찰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총리실의 광범위한 민간인 사찰 내용을 알고도 은폐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한국일보는 '정권 눈치보기' 때문이었다고 봤다. 한국일보는 2면 <'정권 눈치보기' 고질병 때문에…>에서 "당시 검찰은 수사 실패 원인을 총리실의 조직적인 증거인멸로 돌렸지만, 실제로는 수사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라며 "검찰의 고질인 '정권 눈치보기' 때문이었다"고 지적했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사찰을 벌였던 2008년, 2009년은 이명박 정권 출범 초기였고, 검찰이 수사에 착수한 2010년은 향후 국정 운영의 향방을 가늠할 시기였다. 사찰내용이 공개되면 이명박 정권이 전 정권을 주 타깃으로 무차별 사찰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고 결국 정권 차원에서 공직윤리지원관실을 '친위대'로 삼았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게 뻔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검찰은 수사 과정에서 정권의 이런 위기의식을 공감하게 되면서 김종익씨 관련 수사와 함께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증거인멸 부분만 마무리하는 선에서 사건을 종결시켰다는 관측이다. 한마디로 청와대와 어떤 방식이 됐던 교감을 한 검찰이 적당한 선에서 덮는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사찰 자료의 증거로서의 가치 때문이다. 당시 수사팀 관계자는 "일반론적으로 불법사찰로 볼 수 있지만, 형사법적 테두리 안에서 기소해야 하는 검찰 입장에서는 불법사찰의 증거로 삼기 어려웠다"며 "문건을 토대로 기소 가능한 범죄는 모두 기소했고, 문건을 숨길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재판에 제출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당시 검찰이 수사의지만 있었다면 이를 충분히 밝혀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여론이 높다. 당시 검찰은 김종익씨와 남경필 의원 부분을 뺀 나머지는 모두 지워 법원에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건이 나왔는데도…청와대는 "모르는 일" 부인

청와대 입장은 어떨까. 청와대는 총리실의 불법 민간인 사찰 문건이 공개되자 당혹스러워 하면서도 "아는 바 없다"고 관련 사실을 부인했다.

박정하 청와대 대변인은 한국일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문건 내용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며 "청와대는 불법사찰을 지시하거나 보고를 받은 사실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일은 총리실에서 진행된 것으로 청와대는 관련이 없다"며 "총리실에서 확인할 문제"라고 했다. 박 대변인은 문건에 표기된 'BH 하명'에 대해 "우리도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박영선 'MB·새누리 심판 국민위원회' 위원장은 "2600여건의 사찰 정황은 권재진 법무부 장관, 맹형규 행정안전부,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 등에 대한 수사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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