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가 정치 인생에서 최대 위기를 맞았다.

그는 ‘진보 아이콘’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실제로 그는 진보정치에 대한 국민의 시선을 바꿔놓았다. 18대 국회의원 생활을 하면서 검증된 의정활동 능력을 보여줬다. 진보 정치인은 말만 잘하는 게 아니라 '실력'도 겸비했다는 점을 보여줬다.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가 분출되는 ‘현장’에 어김없이 결합해 호흡해온 실천력도 그를 향한 긍정적 평가의 요인이다.

하지만 서울 관악을 ‘여론조사 경선’ 과정에서 발생한 ‘선거 부정’ 논란은 이정희 대표의 기존 이미지를 뿌리부터 흔들고 있다.

여론조사 경선을 하는 과정에서 ‘이정희 선거캠프’ 관계자들이 나이를 속여서 응답하라고 권유하는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보낸 것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잘못된 행동이다. 그것 때문에 당락이 바뀌었는지와는 무관하게 ‘선거 부정’ 논란을 자초한 행동이다. 

물론 이정희 대표가 직접 그것을 지시했고, 방치했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정희 대표가 모르는 일이라고 해서 책임 자체를 면할 수는 없다. 어떤 형태로든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인데 ‘재경선 카드’가 김희철 의원의 거부로 무산되면서 상황은 더욱 어렵게 됐다.

언론의 시선은 곱지 않다. 보수언론은 이번 기회에 ‘야권연대’ 자체에 재를 뿌리겠다는 모습이다. 야권연대가 무너져야 새누리당 정권 재창출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이 깔린 행동으로 보인다.

진보언론도 이번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경향신문은 3월 22일자 사설에서 “재경선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단견”이라며 “그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단기적으로는 총선에서의 야권연대 문제, 장기적으로는 진보정치의 미래가 결정된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국회의원 이정희'나 '변호사 이정희'가 아닌 '정치지도자 이정희'의 관점에서 더 넓게, 멀리 보고 결단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백낙청 김상근 함세웅 박재승 등 사회 원로들이 참여한 ‘희망 2012 승리 2012 원탁회의’는 “국민들은 통합진보당이 야권연대를 향한 헌신과 희생을 보여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통합진보당의 이러한 자세야말로 야권연대의 감동을 되살릴 기초”라고 주장했다.

'결단' '헌신과 희생'에 대한 요구를 보며 이정희 대표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상처를 피하기는 어렵다. ‘진보 아이콘’으로 불리던 이정희 대표가 이렇게 궁지에 몰리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언론은 도덕성 논란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것만이 문제의 본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진보정당, 진보정치의 상징적인 인물이 도덕성 논란에 휩싸인 것은 치명적이다. 국민의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크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번 사건은 이정희 대표와 진보정치에 두고두고 부담이 될 가능성이 크다. 대충 덮는다고, 시간이 지난다고 잊혀질 문제는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이정희 선거캠프가 다른 후보 선거캠프에 비해 특별히 더 문제가 있어서 ‘선거 부정’ 사건에 연루된 것일까. 그렇다고 단언하기 어렵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론조사 경선’을 둘러싼 정치권의 '불감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번의 경우처럼 나이를 속이도록 유도하는 ‘명백한 잘못’도 문제일 수 있지만, 실은 여론조사 경선의 허점을 파고드는 꼼수는 하나 둘이 아니다. 통합진보당만의 문제도 아니고, 이정희 선거캠프만의 사례도 아니며 ‘여론조사 경선’을 도입한 여야 정당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이다.

가장 대표적인 게 조직적인 여론조사 참여 독려 운동이다. 심지어 당 홈페이지에는 외출했을 경우 집 전화를 휴대전화로 받는 ‘착신 전환’ 서비스 이용 방법에 대한 친절한 설명도 곁들여 있다. 이는 그것이 잘못인지 아닌지도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특정 정당 또는 특정 후보 쪽에서 조직적으로 여론조사 응답률을 높이고자 ‘개입’하는 행위 자체가 여론 왜곡을 부르는 행동일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윤희웅 조사분석실장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여론조사 경선’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점검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여론조사 경선을 앞두고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방법으로) 착신콜을 설정해놓을 경우에는 특정 정치성향, 특정 후보 연계된 사람들이 더 많이 표집되면서 조사 대표성이 왜곡되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정치 여론조사, 특히 ‘여론조사 경선’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ARS 조사 방법의 경우 빠르고 간편하게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컴퓨터 음성에 응답하는 제도적 허점을 역이용해 응답자가 나이를 속이거나 할 경우 여론 왜곡을 부를 수 있다. 이번처럼 공직 후보를 선출하는 중요한 여론조사의 경우 ARS 조사 방법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될 수 있다는 얘기다.

또 ARS 조사 방법은 특정 정당이나 후보 쪽에서 조직적으로 ‘착신전환’을 설정해 여론조사에 ‘개입’하려 들 경우 심각한 여론왜곡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전문가들은 선거 때 ARS 응답률은 2~3%까지 떨어진다고 지적한다. 100가구에 전화를 걸어봐야 응답해주는 가구는 2~3가구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한 지역구에서 3만 가구의 표본이 있다고 가정할 때, ARS를 통해 여론조사를 진행할 경우 모두 다 1회 이상 기회를 준다고 해도 응답하는 이들은 전체의 2~3%인 600~900가구 정도라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특정 정당이나 후보 쪽에서 당원들에게 여론조사에 적극적으로 임하도록 독려하고, '착신전환' 등의 방법으로 여론조사 표본이 될 확률을 높인다면, 그것에 동의하는 당원을 지역구별로 수백 명만 확보하다고 해도 이렇게 나온 여론조사 결과는 일반적인 조사 결과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띨 수 있다.

일반 여론조사에서 밀리는 후보라도 ‘꼼수’를 활용해 역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여론조사 경선을 통해 후보자를 결정하는 것은 정교한 제도적 검토를 거친 뒤에 시도해야 하는데 이번의 경우처럼 선거 막판 전격 타결된 협상안에 따라 조사 시기(3월 17~18일)가 다 알려지고, 심지어 실시간으로 표본 확보 상황까지 알려진다면 다양한 형태의 여론조사 ‘개입’이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이정희 대표가 도덕성 논란에 휩싸였고, 책임을 느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번 사건은 이정희 대표 쪽만의 문제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여론조사 경선의 제도적 한계와 허점을 개선하지 않는다면, ‘관악을 사태’는 언제든 재연될 수 있다. 이정희 대표가 후보직에서 사퇴를 한다면 책임지는 모습으로 비칠지는 모르나 여론조사 경선의 한계를 해소하는 해법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얘기다.

이번 사건을 통해 드러난 사실 그리고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은 여야의 ‘여론조사 경선’ 과정에서 부당한 ‘개입’이 자행되고 있고, 심지어 여론조사 표본 대표성의 오류를 증폭시키는 위험천만한 시도가  선거운동의 한 방식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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