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도 바뀌었고 상황도 바뀌었다.” (민주통합당 한명숙 대표)
“ 2007년도에 참여정부가 추진했던 FTA와 2010년의 FTA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거나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 (민주통합당 김진표 원내대표)
“한나라당이 국회에서 날치기 처리한 한미 FTA는 이명박 FTA이지 노무현 FTA가 아니다.” (민주통합당 이용섭 정책위의장)

민주통합당의 ‘자기분열’이 계속되고 있다. 최근 다시 쟁점으로 떠오른 한미 FTA 이야기다. 민주당의 당론은 전면 재협상이다. 한 달 전 들어선 지도부도 모두 이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한 대표는 15일 대국민 기자회견에서 “총선에서 승리하면 우선 재재협상을 하게 될 것”이라며 “(재재협상이) 무산되면 폐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근거는 이른바 ‘나쁜 FTA론’이다. 이명박 정부가 체결한 한미FTA는 이익 균형이 무너진 “불평등 협정”이자 “굴욕적 협상”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민주당에겐 승산 없는 구도일 수밖에 없다.

근본적으로 한미 FTA의 내용과 성격은 달라진 적이 없다. 노무현 정부의 한미 FTA는 좋고, 이명박 정부의 그것은 나쁜 게 아니라는 뜻이다. 민주통합당이 주장하는 ‘10대 독소조항’ 중 9개는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한미 FTA에 포함되어 있다.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시장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FTA의 근본 성격도 변한 바가 없다. 한미 FTA는 그 때나 지금이나 미국과 한국의 소수 초국적자본과 금융투기세력에게 이익이 되는 협정이다. 양국 대다수 국민들의 삶에 보탬이 되긴 커녕 ‘재앙’이 될 거라는 우려도 그 때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상황이 바뀌었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어느 날 갑자기 터진 건 아니었다. 지난 30여 년간 이어져 온 하나의 체제가 무너지고 있다는 결정적 신호였을 뿐, 경고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도처에서 울리고 있었다. 경고음을 무시하고 민영화와 노동시장 유연화, 그리고 외환시장 개방 등을 이끌며 그 체제에 편승했던 건 다름 아닌 ‘민주정부 10년’이었다. ‘미국식 신자유주의 모델’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참여정부는 한미 FTA로 그 막차에 선뜻 올라탔다. 바뀐 건 상황이 아니라 민주당의 입장이다.

‘국익’의 균형이 깨졌다는 주장은 그래서 엇나간 접근이다. 어느 쪽에서든 공감을 얻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명박 정부의 2010년 추가협상으로 미국 승용차 수입 관세 철폐가 연기되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 조건이 대폭 완화된 건 맞다. ‘굴욕적’인 자세로 양보에 양보를 거듭했다는 비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손해가 커진 건 맞지만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찬성론에는 답할 길이 없다. ‘협상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말에는 뭐라고 대답할까. ‘깨진 국익의 균형’을 맞추자는 요구에 미국이 선뜻 나설 것 같지도 않다.

민주당의 ‘어정쩡한 반대’는 한미 FTA 반대진영의 공감을 얻기도 어렵다. 민주당이 슬쩍 발을 걸치고 있는 ‘야4당-범국본 대표자 연석회의’ 참가단위 대다수는 참여정부의 FTA도 반대했다. ‘국익’은 애초부터 논점이 아니었다. 민주당은 한미FTA 반대의 ‘진정성’을 끊임없이 의심받고 있는 처지다. 지난해 11월 비준동의안이 날치기 처리된 이후에야 뒤늦게 “한미 FTA 반대 투쟁에 앞장서겠다”고 선언했지만, “총선에서 심판하자”는 말 외에 이후 민주당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반대 진영과의 합의를 깬 것도 이미 여러 번이다.

민주통합당은 한미 FTA를 털고 가야 한다. 선택지는 오판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과 그 반대, 두 가지 뿐이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한명숙 대표가 “우리 경제를 세계 일류로 끌어올리는 새 성장 모멘텀이 될 것”라고 했던 건 아마 진심이었을 것이다. 당내에서도 반(反)FTA를 외쳤던 의원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동북아 금융허브론’을 받아들였고, 시장의 힘으로 양극화를 넘어서려 했다. 한미 FTA를 추진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이제 와서 ‘노무현의 FTA’는 옳았다는 주장은 그래서 몰역사적이고, 자가당착이다.

새누리당과 보수언론의 공세가 거세다. 조선일보는 15일자 사설에서 여야에게 ‘정면승부’를 주문했다. 한미 FTA를 핵심 총선 의제로 삼아 보수세력의 결집을 유도하려는 박근혜 위원장의 계산과도 맞아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지도부와 핵심 인사들의 ‘말 바꾸기’도 연일 도마에 올리고 있다. 유일하게 공개 반성문을 쓴 정동영 의원까지 목록에 올려놓은 건 무리가 있지만, 나머지 인사들은 대답이 궁색할 수밖에 없다. 어떤 반성과 사과도 없다가 이제 와서 ‘국익’을 이유로 재협상과 폐기를 주장한다고 버틸 수 있어 보이지 않는다.

정동영 의원은 14일 박근혜 위원장에게 공개편지를 썼다. ‘한미 FTA로 말 바꾸는 세력에게 나라 못 맡긴다’는 발언에 대한 대답이었다. 정 의원은 “공부 안 하는 정치인, 공부 못하는 정치인이 나라를 망친다”며 “FTA 추진하면 SSM 규제 못 한다”고 썼다. 이는 민주당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다.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는 한미 FTA와 함께 할 수 없다. 민주당이 넘어서야 할 참여정부의 ‘과(過)’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할 수밖에 없다. ‘제2의 이명박’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일 말이다.

“민주당의 태도에는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무엇보다 반성이 없다는 점이다. (중략) 당시 내용을 잘 몰랐다지만 이런 반성조차 정동영 의원만 했을 뿐이다. 제대로 수정과 폐기를 요구하겠다면 한 대표를 비롯, 민주당 전체가 참회록부터 써야 한다. 아울러 수출로 먹고 사는 한국경제가 계속 성장하기 위한 대안과 출구를 제시해야 한다.” (한국일보 2월9일자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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