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씨, 당신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당신의 저서 <미학 오디세이>을 읽은 덕분에 르네 마그리트 그림을 보는 눈이 틔인 점, 감사하게 생각해 왔습니다. 최근 ‘진보 진영’의 언행에 대해 쓴소리를 연발하는 걸 보며 ‘왜 이러시나?’ 의아했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생각해 왔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들의 ‘등에’ 노릇을 한 것처럼, 당신의 비판적 발언들 또한 ‘진보 진영’ 사람들의 도덕적, 문화적 각성을 위해 필요한 일이려니 긍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MBC가 이명박 정권에 침탈당할 때 MBC 사옥 정문에서 극우인사들에게 맞으며 저항하던 당신의 모습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때, 당신만큼 강력하게 저항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불의와 독재에 맞서는 당신의 진심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당대의 논객 진중권에게 감히 반론을 제기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할 일이었습니다. 저는 프로그램 만들 줄 밖에 모르는 한 명의 방송 PD니까요. 그런데, 최근 <씨네21> ‘진중권의 아이콘 - 자유, 자유”라는 글에서 크게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대목들을 발견했습니다. 정명훈과 그의 음악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 글이려니 생각하지만 도저히 침묵할 수 없어서 몇 마디 드리고자 합니다. 말꼬리를 잡고 싶지 않지만, 얘기를 꺼내려니 말꼬리를 잡을 수밖에 없는 것,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그 글 중 한 대목이 매우 거슬렸음을 고백합니다. “이명박이 히틀러처럼 전쟁을 일으켰나, 유대인을 학살했나, 아니면 헌정을 파괴했나?”

이명박과 히틀러가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명박을 위한 연주를 나치 부역에 비유하는 것을 반박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일단 정명훈은 논외로 하고, 이명박은 헌정을 파괴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그는 민주주의의 기본인 표현의 자유를 파괴했습니다. 미네르바를 잊진 않으셨겠죠? 유모차부대에 대한 탄압이 옛날 일인가요? 임기가 보장된 공영방송의 사장을 내쫓고 자기 아바타를 심어서 언론에 재갈을 물린 게 ‘헌정을 수호한 일’인가요? 에 대한 비상식적인 탄압은 검찰이 한 짓이니 이명박과 무관한가요? 삼척동자도 대답할 수 있는 이 질문에 지식인 진중권은 뭐라고 답하실지 궁금합니다.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툭 던졌다고 하기엔 너무 심각한 발언 아니었나요? 그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부정한 주가조작 사범이라는 점은 누구나 다 아는 얘기이므로 굳이 반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중국이라면 사형에 처하는 중대한 범죄입니다. 그가 전과 14범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덮으려 해도 ‘팩트’이고, ‘팩트’에 대해서는 토론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명박은 히틀러처럼 전쟁을 일으키진 않았습니다. 그는 유태인을 학살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다행입니다. 이명박은 제주 4·3과 한국전쟁 때의 이승만처럼 수십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지 않았고, 광주학살의 전두환처럼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총칼로 짓밟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벼랑 끝의 가난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아 버린 용산 참사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노동자가 죽어 나가는 한국타이어 사업장에서, 촛불집회 의료봉사단에게 잔인한 폭력을 휘두르는 경찰의 모습에서, 1년 가까이 지속된 김진숙의 고공 크레인 농성을 방치하는 그들의 태도에서 냉혹한 학살자의 냄새를 맡았다면 제가 과민한 걸까요? 이명박을 ‘학살’에 결부시킨 것은 순전히 내 ‘과대망상’이라고 해 둡시다. ‘과대망상’으로는 토론이 안 될 터이니 이 또한 그만 하죠. 

다시 정명훈 얘기로 돌아가지요. 이번 논란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지만, 따지고 보면 저야말로 정명훈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입니다. 94년 바스티유 음악감독 논란이 시작될 때부터 관심을 갖고 그를 여러 번 취재했습니다. 2007년, 정명훈에 대한 최초의 다큐멘터리를 방송했고, 이어서 ‘정명훈과 서울시향의 도전’이란 다큐를 만들었습니다. 연출가 김상수 식으로 표현하면, ‘정명훈을 영웅으로 만드는 데 앞장 선’ 주류언론의 ‘죄인’입니다.

유럽 무대에서 정명훈의 음악적 성취는 주목할 만 했고, 당시 40대 초반의 젊은 지휘자에게 거는 국내 음악팬들의 기대도 컸습니다. 다큐 촬영 당시 정명훈은 살 플레이엘에서 파리 오케스트라를 지휘, 말러 교향곡 5번을 연주했습니다. 당시 르 몽드는 “라파엘 쿠벨릭과 베르나르드 하이팅크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같은 곡을 연주했지만, 그 누구도 정명훈만큼 청중을 압도하지는 못 했다”고 썼습니다. 저 또한 공감했습니다. 정명훈의 말러는 탁월했습니다. 파리에서 만난 바스티유 단원들의 정명훈에 대한 사랑 또한 의심할 바가 없었습니다. 단원들은 그의 바톤 아래서 매우 고된 연습을 했지만 급속히 음악 수준이 향상되는 보람을 느꼈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프랑스의 대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이 정명훈을 가리켜 ‘천재’라고 극찬한 것이 그냥 빈말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휘자의 실력에 성적을 매기고 석차를 따지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당시 세계 음악계를 이끌던 게오르그 숄티, 클라우디오 아바도, 주빈 메타, 세이지 오자와 등 대지휘자의 뒤를 잇는 차세대 거장으로 그를 자리매김 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그를 지나치게 미화했다고 비판해도 할 말이 없는 프로그램이었지요. 개인적으로 정명훈의 베토벤,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드보르작, 말러는 그때나 지금이나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덧붙이자면, 그의 모차르트는 좀 아닙니다. 모차르트 이전의 고음악은 그의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좋은 점만 담았고, 목수정이 겪은 것과 비슷한 황당한 경험이 몇 번 있었지만 이런 얘기는 다큐에 담지 않았습니다. 재능있는 지휘자를 조명한 음악 다큐였을 뿐이니까요.

<정명훈과 서울시향의 도전>에서는 그들의 새로운 시도를 긍정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엄격한 오디션에 따른 일정한 부작용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전체적으로는 음악의 질을 높이려는 의욕적인 시도로 간주했고, 객원 단원, 상임 작곡가, 공연기획 자문을 두고 를 발행하는 등 자생력 있는 오케스트라의 토대를 놓으려는 노력을 긍정적으로 조명했습니다. 최근 연출가 김상수씨가 제기한 재정적 문제들은 잘 몰랐고, 취재할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서울시향의 ‘베토벤 전곡 사이클’을 중심에 놓고 구성한 ‘음악 다큐멘터리’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보면 방송 저널리스트로서 다소 안일하게 만든 다큐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드는 게 사실입니다. 제 소개 겸해 다큐 얘기를 꺼낸 게 좀 길어졌네요.

연출가 김상수씨의 문제제기는 다소 거칠게 보일 소지가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이명박 취임식 때 베토벤 9번을 발췌 연주하고 지휘봉을 이명박에게 바친 것, 이른바 ‘건국 60년 기념음악회’에서 드보르작의 ‘신세계에서’를 지휘한 것은 내가 봐도 결코 유쾌한 풍경이 아니었지만, 이를 곧바로 카라얀의 나치 부역에 비유한 것은 비약입니다. 나치에 반대한 파블로 카잘스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훌륭한 음악가고 나치에 부역한 카라얀이나 푸르트뱅글러는 저열한 음악가였다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김상수씨의 문제 제기 자체는 유효하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김상수씨는 자신이 연출한 연극의 음악을 직접 만든 사람이지만, 스스로 이야기하듯 서양 음악사에 대해서는 잘 모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로 그의 문제제기 자체를 희화화 하는 것은 적절한 처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엄밀히 보면, 그는 ‘음악론’을 펼친 게 아니라 음악이 정치에 ‘사용’(詐用)되는 것을 경계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논지는 “정명훈에게 지급되는 돈은 국민의 세금이고, 이는 투명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었습니다. 액수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합리적인 방식으로 산정해서 누구나 납득할 수 있게 집행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이러한 핵심 논지가 실종되고 감정적인 비난이 난무하게 된 것은 유감입니다. “한국 매스컴이 정명훈의 음악 수준을 과대포장했다, 알고 보면 정명훈은 한국을 우습게 아는 인간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없다, 따라서 그의 음악 또한 형편없다, 그런데도 정명훈은 한국이 낳은 스타라는 이유로 비판의 성역에 있다...” 김상수씨의 이러한 주장은 엄밀히 검증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논거를 무수히 제시할 수 있을 것이고, ‘팩트’와 ‘의견’이 거미줄처럼 꼬여서 미궁에 빠질 이슈들입니다. 굳이 검증하려 한다면 매우 정밀한 조사와 분석이 필요하고, 일정한 대목에서는 음악에 대한 전문적 식견이 요구될 것입니다. 김상수씨는 이 많은 주장들을 거칠게 쏟아냈기 때문에 엉뚱하게 역풍을 만났고, 논점이 흐려질 빌미를 스스로 제공한 것입니다. 그의 ‘잘못’이 있다면 딱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진중권씨 얘기로 넘어갑니다. 김상수씨의 오류를 빌미로 그를 바보 취급하고 그의 문제제기를 묵살하는 건 옳지 않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그의 핵심 논지를 슬쩍 외면한 채 비본질적인 얘기로 그를 희화화하는 것은 예의 있는 태도도 아니고 용기 있는 행동도 아닙니다. 진중권씨의 글에는 이른바 ‘진보 진영’의 문화적 조악성에 대한 안타까움이 배어 있습니다. 그 안타까운 마음은 경청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은 딱 그 지점까지입니다. 다음 구절은 선을 넘고 있습니다.

“심지어 스탈린도, 히틀러도 클래식 음악을 이렇게 대접하지는 않았다. 현대음악은 탄압했을지 몰라도, 그들도 클래식만은 키워서 체제선전과 대중교양에 써먹으려 했다.”  

스탈린!! 그가 얼마나 저열하게 클래식 음악을 난도질하고 예술가들을 목 졸랐는지 진정 모르시는 건가요? 스탈린은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드 부인>에서 거슬리는 대목이 나오자 “횡설수설하는 음표더미”라고 매도하면서 그를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었죠. 쇼스타코비치는 간신히 죽음을 면했는데, 그 이유는 쇼스타코비치를 추적하던 비밀경찰 요원이 하루 먼저 숙청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염세적인 정서로 가득한 교향곡 4번을 초연할 수 없었습니다. 5번 D단조에 대해서는 엉뚱하게도 “낙관적 비극의 전형을 그렸다, 더 밝은 미래의 비전을 들려주었다”고 격찬을 늘어놓더니 9번이 맘에 안 들자 아예 창작을 금지했고, 스탈린 본인을 우상화하는 저열한 영화음악을 만들도록 강요했습니다. 자, 이게 스탈린이 클래식 음악을 ‘대접’한 방식이었습니다.

이 논리대로라면, 대통령 취임식과 ‘건국 60년 기념 음악회’에서 정명훈의 클래식 음악을 활용하려 한 이명박 정권이 클래식 음악에 대해 무지한 ‘좌파’보다 낫다는 결론이군요. 이게 진중권씨가 말하고자 한 바였습니까? 그런 ‘대접’이라면 안 받는 게 낫겠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제가 볼 때는 ‘좌파’든 ‘우파’든 추악한 본질을 클래식으로 포장하려는 위선자들보다는, “폴포츠 수준"의 단순무식한 사람들이 차라리 나아 보입니다.

히틀러가 바그너와 베토벤을 앞세워 독일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하려 한 것도 퍽 교양 있는 일이었다는 결론이군요. ‘서양 클래식 음악을 잘 모르는’ 김상수씨조차 “베토벤 음악은 반유태주의 따위와는 상관없다”고 이미 지적했습니다. 베토벤이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에서 노래한 ‘형제애’를 ‘게르만 민족 공동체’로 해석한 게 베토벤을 잘 ‘대접’한 건 아니라는 점, 진중권씨도 동의할 거라고 믿습니다. 바그너는 본인이 반유태주의 성향을 갖고 있었으니 히틀러의 나치와 그런대로 잘 어울린다고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그너 음악은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에도 이미 존재했고, 히틀러가 지구상에서 사라진 뒤에도 변함없이 남아 있다는 점입니다. 히틀러 따위의 ‘대접’과 상관없이, 그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위대한 음악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유태인 음악가들이 히틀러 체제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지요. 그들 중 대지휘자 브루노 발터도 있었습니다. 그는 히틀러 독재에는 반대했지만, 체제와 이념의 차이를 너머 바그너 음악의 위대성을 인정했습니다. 종전 후 그가 녹음한 바그너 관현악곡집은 역사상 가장 훌륭한 연주로 꼽힙니다. 히틀러가 바그너를 ‘대접’한 방식과 브루노 발터가 바그너를 ‘대접’한 방식의 차이, 이해하실 수 있는지요?
 
다시 정명훈 얘기로 돌아가죠. 정명훈 다큐를 촬영할 때 다소 의아하다고 느낀 점이 있었어요. 그는 “저는 음악밖에 몰라요”를 되풀이했습니다. 음악가가 ‘음악밖에 모를’ 정도로 음악을 사랑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묻지도 않는데 “음악 이외엔 아무 것도 모른다”고 자꾸 고백하는 걸까, 좀 답답하다고 느꼈죠.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건 별로 자랑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그런데, 그 당시로부터 15년이 지난 요즘도 그는 여전히 “음악밖에 모른다”고 말하고 있더군요. 

몇 년 전, 카라얀의 나치 행적을 다룬 다큐멘터리 <마에스트로, 마에스트로>를 본 일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똑같은 발언이 나오는 거였습니다. 카라얀과 함께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전곡을 녹음한 피아니스트 알렉시스 바이젠베르크 인터뷰였습니다. 그는 “카라얀은 정치는 몰랐다. 그는 오직 음악밖에 몰랐다.”고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나치가 뭔지도 몰랐지만 음악가로 출세하기 위해 열심히 살다 보니 힘있는 자들 편에 서게 됐고, 그러다 보니 자기 뜻과 상관없이 부역을 하게 됐다” 정도로 요약되는 거죠. 같은 다큐에 출연한 역사가 올리버 로트콜프도 “카라얀은 자신이 나치 선전에 이용당한다는 정치 사회적 의미를 잘 몰랐던 것 같다”고 진단하더군요.

이미 다 알려진 대로 카라얀은 1933년 나치의 유태인 탄압이 시작되자마자 나치에 입당했고, 2년 뒤 아헨 음악감독에 취임한 뒤부터 노골적으로 나치를 위해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나치 침략의 최전선인 점령지 파리에서 베를린 오페라를 이끌고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지휘했습니다. 심지어는 나치 제복을 입고 지휘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그는 전후 자신의 전력이 도마에 오르자 1935년 취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입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1942년 유태계의 피가 흐르던 아니타 귀터만과 재혼할 때 나치를 탈당했노라고 밝혔지만 그 또한 거짓말임이 드러났습니다. 그의 나치 부역은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역 행위는 다름 아닌 ‘정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됐다는 것입니다.

진중권씨는 누구보다도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의미를 잘 아시겠지요. 더 많은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이 더 양보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체제가 유지되고 그 안의 혈액 순환이 원활하게 이뤄지기 위해서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우리나라에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정신이 모자란 것이 큰 문제라는 점, 공감하시겠지요. 같은 맥락에서, 대중적 인기와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은 위험한 일일 수 있습니다. 저는 정명훈이 카라얀처럼 부도덕한 권력에게 부역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자기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른다면 어떤 유해한 결과를 낳을지 누구도 한 예측할 수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정명훈이 스스로 되돌아보고 자신의 심각한 무지를 반성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으면 합니다. 아울러, 정명훈이 뛰어난 예술가라는 이유로 모든 비판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정 정명훈을 위하는 일인지 되돌아볼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병이 있는데 “괜찮다”고 외친다 해서 그 병이 없어질까요? 초기에 치료하는 게 좋습니다. 전화위복이 되기 바랍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얘기가 있습니다. 트위터에 올리신 글 중에 도가 지나친 게 있어서 지적해 드립니다. 김상수씨의 글을 실어주고 그를 인터뷰까지 했다는 이유로 <미디어오늘>을 ‘저질 매체’라고 단정하셨고, “이 분들의 보도 수법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라고 덧붙이셨네요. 다른 글에서는 “시장도 바뀌었겠다, 분위기도 진보로 넘어왔겠다, ‘정명훈=이명박’이라고 슬쩍 한 자락 깔아놓으면, 문화예술에 무지한 진보진영과 진보언론들이 떡밥을 덥썩 물 거라 생각한 거”라고 하셨네요. 김상수씨와 <미디어오늘>이 실제로 그렇게 의기투합해서 기사가 나왔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리 자연스런 추측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불특정다수를 향해 <미디어오늘>을 매도하신 건 위험한 일이라는 점, 지적해 드립니다. 같은 식으로 말한다면, “서울시향이나 정명훈과 직접 관계도 없는 진중권이 이토록 김상수와 <미디어오늘>을 비방하는 것은 아마 자기 누나들이 서울시향 녹을 먹기 때문일 것”이라는 많은 사람들의 의심 또한 정당화될 것입니다.

진중권씨는 20만명의 팔로어를 가진 트위터리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20만명 개개인이 잘 판단하실 일이겠지만, <미디어오늘>의 이미지는 이미 작지 않은 타격을 입었으리라 생각합니다. 20만명에서 적게 잡아 절반이면 10만명인데, 그 사람들이 진중권씨의 말에 공감해서 “<미디어오늘>은 저질매체”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권력자의 폭력과 비슷한 행태입니다. <미디어오늘>은 영세신문입니다. 조선일보처럼 세련되게 편집도 못 하고, 좋지 않은 문장도 자주 눈에 띕니다. 하지만 조중동이 압도적인 여론 지배력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의 파행적 언론 지형에서 나름 진실보도를 위해 노력하는 기특한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과 골리앗 싸움 비슷한 걸 힘겹게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신문을 단 한마디로 매도하는 것은 너무 생각 없는 행동 아닌가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미디어오늘> 측에 진심으로 사과하셔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볼 때 한국 주류 언론은 지나치게 국가주의적입니다. 황우석 사태 때 주류 언론이 보여준 파시스트 행태를 기억하시겠지요. 지금도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스타에 대해서는 거의 광신도처럼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 박지성이 후보 선수로 출장해도 뉴스입니다. 김연아와 결별한 외국인 코치는 죽일 놈이 됩니다. 정명훈도 한국 언론에서 비슷한 대접을 받습니다. 이런 국민적 스타를 비판하면 매국노가 됩니다. 이건 매우 촌스럽고 후진적인 행태입니다. 제가 평소 보아 온 진중권씨라면 주류 언론의 이러한 행태를 좀 더 강하게 비판해야 말이 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서 다소 의아합니다.

이 글이 <미디어오늘> 지면에 올라가면 ‘가재는 게편’이라고 오해하실 수 있겠네요. <미디어오늘>은 언론노조 기관지로 시작해서 자립한 신문이라 상당수 언론노동자들이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저희 언론노동자들에겐 비교적 문턱이 낮은, 친근한 신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저같은 무명의 필자가 쓴 글도 간혹 실어 줍니다. 하지만 그게 본질은 아닙니다. 부디 ‘<미디어오늘>과 이채훈의 관계’ 같은 지엽적인 건 괘념치 마시고, 제 글의 진심을 읽어 주시기 바랄 뿐입니다. 

진중권씨는 “필요하면 정명훈 관련해서는 나중에 정리해서 글을 올리겠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글에는 정명훈의 음악에 대한 평가도 들어갈 걸로 예상합니다. 그 대목에 대해서는 저도 할 말이 없지 않습니다. 음악을 아주 모르지 않는 사람들의 생산적인 토론, 나쁘지 않겠지요.

진중권씨는 정명훈이 평양의 지휘자 앞에서 외쳤다는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야, 자유!”란 말을 인용하며, “예술가들은 자유로운 영혼이어야 한다, 어설픈 이념으로 그들을 괴롭히지 말라”고 결론지었습니다. 문장 자체로는 진중권씨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점을 밝힙니다. 시대와 호흡하고 그 시대에서 자양분을 얻어서 아름다움의 진수를 돌려줘야할 예술가들에게 최대한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는 점, 누구보다도 열렬히 지지합니다. 하지만 예술가 개인의 자유가 만인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 이용되고, 민주주의를 질식시키는 파시즘에 이용될 자유까지 포함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명훈을 ‘이념’의 잣대로 괴롭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정명훈의 문화 권력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사람들을 싸잡아서 ‘좌파’로 묶어세운 건 아닌지 차분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실재하지 않는 ‘이념’의 잣대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과거 기득권자들이 흔히 써 오던 참주선동과 메카시즘을 연상시킵니다. 복잡한 논의가 필요치 않다고 봅니다. “정명훈에게 지급되는 돈은 국민의 세금이고, 이는 투명해야 한다”는 상식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식을 외면하고 무시할 자유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정명훈에 대한 음악적 평가는 별개의 일입니다. 어느 훌륭한 예술가도, 토스카니니, 푸르트뱅글러, 브루노 발터도 이 상식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정명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술가가 누려야 할 무한한 자유, 그것은 민주사회의 일원이 당연히 지켜야 할 규범 내에서의 자유일 뿐입니다.   

 

(기사 수정 2월6일 오후 3시57분 : "그렇게 바그너를 ‘사랑한’(?) 카라얀은 종전 후엔 바그너를 지휘한 일이 없습니다"라는 문장은 사실과 달라 해당 문단을 삭제합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