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수 숙명여대 교수가 <가난한 집 맏아들- 대한민국 경제정의를 말하다>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대한민국 대기업들을 ‘가난한 집 맏아들’에 빗대어 그들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 것이 이 책을 쓴 취지다.

대기업들을 ‘가난한 집 맏아들’에 빗댄 것은 매우 적절한 비유라고 본다. 필자가 몸 담고 있는 연구소도 2005년 1월 문을 연 이래로 유 교수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대기업들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고민해 왔다.

1990년대 이후 동유럽에서도 자주 목격되는 것이지만 자본주의로의 이행기나 경제발전 초기단계에 각국이 기업지원을 주로 하는 불균형성장전략을 추진하는 것은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경제발전 초기단계에는 규모의 경제 효과(규모가 클수록 단위당 비용이 적게 들어가 경제적 효율성이 커지는 효과)가 상대적으로 크게 나타나고, 또 사회간접자본(SOC) 구축이 매우 중요한 국가 과제로 떠오른다. 때문에 각국 정부는 국민들로 하여금 허리띠를 졸라매게 하고 또 후세대가 갚아야 할 국채를 발행하여 확보한 재원으로 중소기업을 대기업으로 키우고 SOC 관련 공기업을 키워내는 경향이 있다.

이 때는 국민들도 직관적으로 규모의 경제 효과가 크게 나타나고, 또 사회간접자본(SOC)의 경제발전 기여도가 크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정부의 이런 불균형성장전략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경향이 있다.

불균형성장전략, 지속가능한 성장전략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불균형성장전략은 대기업과 공기업을 키우기 위해 근로자들과 농민들, 그리고 자영업자들의 희생을 수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속가능한 성장전략’이라 볼 수는 없다. 결국 각국은 일정 정도 시간이 지나면 불균형성장전략을 균형성장전략으로 전환하여 대기업들이 경제적 약자들과 성장의 과실을 함께 나누며 ‘동반성장’을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러나 경제적 강자가 된 대기업들은 자신들을 키우기 위해 희생된 약자들과의 과실 나누기에 소극적이거나 이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과실 나누기를 체제전복세력의 준동으로 몰아가며 기득권 수호에 몰두하는 경향도 있다.

경제권력이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성장의 과실 나누기를 거부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경제적 약자들은 정치권력에 대해서는 ‘민주화투쟁’으로, 경제권력에 대해서는 ‘노동운동’으로 맞서게 된다. 정치학자들이 개발도상국이 일정정도 성장하면 대부분 민주화투쟁 시기를 거친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박정희도 불균형성장전략을 장기간 고집하다 몰락했다  

1970년대 박정희의 몰락과정을 보면 ‘YH여공 신민당사 점거농성과 강제해산, 신민당 김영삼 총재의 일본에서의 박정희 비난, 김영삼 총재 의원직 박탈, 부마항쟁(부산,마산에서의 민주화투쟁), 차지철 등의 강경유혈진압론, 김재규의 박정희·차지철 사살’이라는 일련의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는데, 그 맨 앞자리에는 ‘가혹한 저임금과 장시간 근로에 시달리던 YH여공의 투쟁’이 있었다.    

당시 박정희가 15년간의 불균형성장전략에서 벗어나 균형성장전략으로 전환했더라면 어떠했을까. 최측근 총탄의 재물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다른 독재자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약자들을 희생해서 성장했고, 경제적 약자들의 제몫찾기운동을 체제전복세력의 위험한 준동으로 간주하고 탄압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전두환도 박정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도 정말 운좋게 3저호황(저금리, 저유가, 저달러)이라는 단군 이래 최대의 로또를 만났지만 1987년 민주화투쟁 앞에 항복선언을 해야만 했고, 또 노동자대투쟁 앞에 일부 임금 현실화를 해야만 했다. 대기업들이 누리는 성장의 과실에 비해 경제적 약자들의 몫은 지나칠 정도로 적다는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 광범하게 공유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금 현실화는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기득권 세력들은 임금이 현실화될 경우 성장률이 크게 떨어질 것이라고 강변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전혀 근거없는 협박으로 드러났다. 성장률은 떨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임금 현실화가 내수를 자극해서 부동산 가격이 크게 오르는 일이 일어났다.

1990년대 이후에 더 극심해진 경제적 약자들의 고통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임금 일부 현실화는 경제적 약자들에게 충분한 보상이 되었을까. 일부 근로자에게 일부 보상은 되었다. 그러나 경제적 약자의 주요 축인 농민들과 자영업자들, 그리고 중소기업들에게는 더 큰 악몽이 기다리고 있었다.

1990년대 농민들은 UR(우루과이 라운드)이라는 개방압력에 노출되었고, 중소상인들은 유통업 급진개방에 노출되었으며, 중소기업들은 밀려드는 저가 중국산과의 힘겨운 싸움을 해야만 했다.

정부 관료들은 경제적 강자를 위해서 경제적 약자들이 또 한번 희생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대기업들의 수출을 늘리기 위해서는 수입개방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농민들은 UR이라는 개방압력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중소상인들과 중소기업들은 격렬하게 저항하지 않았다. 농민들은 과거 수급불균형이 발생할 때마다 정부가 개입하여 농민들에게 불리한 결정을 하곤 했기 때문에 정부에 대한 불신이 깊었으나 중소상인들과 중소기업들에게는 그런 경험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0년대 거품경제 때 잠복되어 있던 중소상인들과 중소기업들의 재앙은 1997,8년 외환위기를 거치며 심각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1996년 김영삼 정부가 감행한 국내외 대자본에 대한 유통업 개방은 서민경제에 치명타를 안겼다. 유통업 경제성장기여율은 7.6%(1990년대 전반기)에서 1.8%(2000년대 후반기)로 추락했고, 고용비중은 18.5%(1995)에서 15%(2010)로 추락했다. 전체 취업자가 2450만 명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그것의 3.5%인 86만 명이 유통업 부문에서 일자리를 잃은 것이다.

중소상인들의 불행은 그들만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자리를 잃은 중소상인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다른 산업의 영세자영업 시장으로 진출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유통업 개방은 영세자영업 시장의 과잉사태를 더욱더 심각한 상태로 치닫게 했다.

국세청 통계는 1996년 이후 영세자영업자들의 고통이 얼마나 심해졌는지 수치를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국세청에 따르면 매년 폐업하는 영세자영업자 수는 1995년 33만 명에서 2009년 75만 명으로 급증했다.

저가 중국산 공산품 유입도 중소 제조업체들에게 치명타를 안겼다. 통계를 보면 1990년대 이후 중소제조업 영세화가 급진전된 것으로 나타난다. 저가 중국산 유입으로 중소제조업체들이 중견기업으로 성장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과열경쟁 상태인 영세자영업 시장으로 탈출도 못하고, 울며 겨자먹기로 그곳에 머물러 있는 영세제조업체들이 많이 늘었기 때문이다.

중소제조업체들의 영세화는 향후 제조업 발전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중소기업의 영세화는 설비투자 여력, 연구개발 여력, 인력양성 여력을 소진시키고, 이것들이 소진될 경우 성장잠재력 확충에 심각한 적신호가 켜지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한중FTA가 추진될 경우 중소제조업체들은 또 한번 심각한 타격을 받을 전망이다. 최근 한중 무역동향을 보면 부품,소재 등 중간재의 비중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만큼 중국산의 질이 높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또 과거에는 범용부품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최근에는 부가가치가 높은 전문부품 비중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경제적 강자들을 위해서 경제적 약자들은 희생됐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되물을 수밖에 없다. 누구를 위해서 이렇게 경제적 약자들이 희생되어야 하는가. 이유는 단 한 가지다.  경제적 강자들을 위해서 경제적 약자들이 희생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물어야 한다. 경제적 약자들을 희생시키려 하는 경제적 강자들은 이들에 대해 보상할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는가. 어이없는 것은 이들이 경제적 약자들에게 보상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기는 커녕 이들에 대한 보상규모를 줄이는데 더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대규모 부자감세는 경제적 약자들에 대한 보상규모를 줄이려는 경제적 강자들의 몰염치한 시도였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유진수 교수의 책, <가난한 집 맏아들- 대한민국 경제정의를 말하다>에 대해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그가 말하는 ‘가난한 집 맏아들’은 우리나라 경제발전 초기의 대기업들을 지칭한다. 당시에 가난한 집 맏아들들은 심각할 정도로 동생들에 비해 지적 능력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동생들보다 더 많은 교육을 받았고 더 많을 혜택을 누렸다. 우리나라 대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심각할 정도로 소기업에 비해 경영능력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규모의 경제가 있다는 이유로 더 많은 조세지원을 받았고 더 많은 재정지원을 받았다.

‘가난한 집 맏아들’에 대한 지원은 교육에서만 나타난 게 아니다. 혼인을 하고 집을 마련하고 상속을 받는 과정에서도 동생들보다 더 많은 지원을 받았다. 대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정부로부터 조세지원, 재정지원 외에도 FTA 지원을 받았고, 환율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의 탐욕은 끝이 없었다. 정부가 경제적 약자에 대한 보상금을 마련하기보다는 그것을 줄여서 현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자신들의 금고를 채우는 것이 경제에 더 도움이 된다고 우겼다.

경제적 강자에게 더 퍼 주어야 경제가 산다?  

대기업들과 보수진영 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경제적 약자에게 보상하는 것(복지)은 ‘낭비’지만, 대기업 금고를 더 채우는 것은 생산적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두 가지 명백한 오류에 빠져 있다. 복지(혹은 소비)는 낭비요 투자는 생산적이라는 주장이 그 중 하나고, 대기업 금고를 채우는 것이 곧 투자라는 주장이 나머지 하나다.

경제분석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복지 혹은 소비는 낭비적인 것이요 투자는 생산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매우 위험하다. 소비와 투자의 차이는 별로 크지 않다. 예를 들어 같은 승용차라도 영업용을 매입하는 행위는 투자에 해당하고, 비영업용을 매입하는 행위는 소비에 해당한다. 국민계정상 신축아파트를 구입하는 행위는 투자에 해당하고, 자동차를 구입하는 행위는 소비에 해당한다. 양자 간에 큰 차이가 있을까. 비전문가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크지 않다. 그래서 한국은행을 비롯한 각국의 경제전문기관들이 투입-산출 분석을 할 때 소비,투자,수출의 단위당 효과가 같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법인세 인하가 중장기적으로 효율적이다?

또 이들은 대기업 금고를 채우는 것이 곧 투자라는 잘못된 가정을 하고 있다. 조세연구원의 일부 연구원들도 예외가 아니다. 2009년 국회예산정책처는 <2010년도 예산안 분석>이라는 보고서에서 자신들이 조세연구원의 보고서를 살펴 본 결과 "조세 부과로 인한 경제적 비효율성이 법인세에서 가장 크게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자신들은 "법인세 인하의 단기 투자 증진효과는 의문이지만, 중장기적으로  경제적 효율성을 제고하는 데에는 기여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국회예산정책처도 이제는 자신들이 인용한 조세연구원 보고서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문제의 조세연구원 보고서를 보면 1970년대에는 법인세 부과로 인한 경제적 비효율성이 근로소득세보다 더 작게 나타나고, 2000년대에는 더 크게 나타난다.

따라서 이들의 분석대로라면 1970년대에는 법인세 부담을 우선적으로 늘려야 하고, 2000년대에는 우선적으로 줄여야 한다는 황당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기업들이 자금난에 허덕이는 1970년대에는 법인세 부담을 우선적으로 늘려야 하고, 대기업들에 현금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2000년대에는 그것을 우선적으로 줄여야 한다니.

조세연구원이 이런 황당한 결론에 도달한 것은 그들이 CGE 모형(연산가능 일반균형모형 : Computable General Equilibrium model)을 토대로 분석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CGE 모형은 수많은 비현실적인 가정을 전제로 한 것으로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CGE 모형의 비현실성](경기대 신범철 교수, 2008년 보고서)

- 지극히 비현실적인 가정이 낳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모형
- 상품과 생산요소 시장에서 완정경쟁시장과 완전정보를 가정
- 생산에 있어서의 규모의 불변을 가정(내생적 성장론은 발붙일 여지가 없음)
- 모든 시장에서 균형에 도달한다는 시장청산 조건 가정
- 언제나 시장이 균형을 이루기 때문에 초과수요나 초과공급에 따른 경기변동이
존재하기 어렵고, 노동시장에서 실업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
- 생산요소의 완전이동 가정
- 실업의 사회적 비용, 자본이동에 따른 사회적 비용 무시
- 모든 소비자의 선호상의 차이가 없다고 가정
- 모든 생산자간의 생상기술상의 차이가 없다고 가정
-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애로우(Arrow)가 사회후생함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가능성 정리를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CGE 모형 사회후생함수는 존재한다고 가정
- 수없이 많은 가정을 전제로 한 모형으로 계산 가능한 것만을 다룬 가상의 세계일 뿐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경제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모형

법인세 감세는 경제를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인다 

대기업 금고를 채우는 것이 곧 투자라고 말할 수 없다면 대기업에 대한 정부의 감세액 중에서 몇 %가 투자로 이어지고 있을까. 그 비율을 추정해 보는데 도움이 되는 지표가 바로 한계투자성향(marginal propensity to invest)이라는 지표다. 한계투자성향은 새로 늘어난 소득 가운데 투자에 쓰는 돈의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를 나타낸다.


한국은행 통계자료를 토대로 우리나라 기업들의 한계투자성향을 산출해 보면, 1980년대에는 0.94, 1990년대에는 0.89로 나타난다. 한계투자성향이 0.89라는 것은 기업소득이 1억 원 늘어날 때, 설비투자가 8900만원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투자가 활발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최근 십여 년간 기업들의 한계투자성향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2000년대에 0.29로 급락한 것이다. 한계투자성향이 0.29라는 것은 기업소득이 1억 원 늘어날 때 설비투자가 2900만원 늘어났다는 뜻이다. 충격적인 수치다.

기업의 한계투자성향이 0.29로 떨어진 상황에서는 정부의 기업조세지원정책의 경제적 효과가 복지지출정책의 경제적 효과보다 더 낮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 경우에는 정부가 기업에 1억원을 지원하여 2900만원의 투자를 늘리는 것보다는 1억원을 저소득층에 지원하여 1억원에 가까운 소비를 유발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효과가 더 크다.

따라서 향후 정부는 복지를 희생하여 기업지원을 늘렸던 7,80년대식 조세재정정책에서 벗어나, 복지를 성장의 주요 요소로 인식하는 ‘성장-복지 선순환 정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부자와 빈자가 상생하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 

시대가 많이 변했다. 경제발전 초기단계에는 일시적으로 불균형성장전략이 유효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경제는 불균형성장전략을 추진할 경우 성장과 복지가 모두 죽게 되는 그런 단계에 와 있다.

성장과 복지가 상충관계에 있다는 주장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다. 선진국들 중에서 균형성장전략을 추구하는 북유럽 국가들과 불균형성장전략을 추구하는  미국을 비교해 보자. 이들 중 어느 쪽이 성장, 복지, 재정건전성을 이루는데 성공했을까. 유감스럽게도 미국은 이 3가지 모두에서 실패한 반면, 북유럽 국가들은 3가지 모두에서 성공했다.  

먼저 성장률을 보면 미국의 경제호황기라 불리우는 1993년과 2007년 사이 OECD 30개 회원국 중에서 핀란드의 1인당 GDP 실질 성장률 순위는 6위였고, 스웨덴은 11위, 노르웨이가 13위, 덴마크가 20위였다. 반면 미국은 23위에 머물렀다.

소득재분배에 있어서도 미국은 북유럽에 비해 형편없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북유럽 4개국의 지니계수(소득불평등지수/수치가 클수록 불평등이 심하다는 뜻임)를 살펴보면 스웨덴과 덴마크가 0.23, 핀란드가 0.27, 노르웨이가 0.28로 나타났다. 반면 미국은 0.38이었다. 지니계수 0.38은 OECD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나쁜 쪽에 속한다.

재정건전성에 있어서도 미국은 북유럽에 비해 매우 좋지 못하다. OECD에 따르면 2010년 북유럽 4개국의 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 평균은 47.5%로 OECD 평균 66%보다 18.5% 포인트 낮았다. 반면 미국은 94.4%에 달했다.

2012년. 우리는 균형성장전략을 추구하여 성장과 복지, 그리고 재정건전성을 모두 얻을 것인지, 아니면 불균형성장전략을 추구하여 이 모두를 잃을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물론 북유럽의 모든 시스템이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국식의 불균형성장전략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