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과 이재명. 22년 대선에서 각각 1639만, 1615만 표를 얻었다. 새삼 적시하는 까닭은 0.7% 차이가 빚은 결과를 직시할 필요가 있어서다. 칼럼에 써왔듯이 민주, 민생, 남북관계의 삼중 위기가 그것이다. 하지만 신방복합체와 아류들의 선동적 보도로 심각성이 폭넓게 공유되지 못하고 있다. 국힘과 민주, 보수와 진보를 싸잡아 비난하는 먹물이 부쩍 늘어나 더 그렇다. 역사에 가정이 꼭 쓰잘머리 없지는 않다. 현실을 꿰뚫게도 한다. 대선 갈림길에서 윤석열 표가 조금만 이재명에게 갔다면 한국정치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어금버금할까
일찌감치 총선 강풍이 불고 있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선에서 위기를 느낀 윤석열 정권의 색다른 승부수다. 갑자기 백인이 나타나 ‘전라도 사람’을 자처하며 집권당 ‘혁신’에 나섰다. 더 색다른 모습은 윤석열의 표변이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1주기를 맞은 그는 “지난해 오늘은 제가 살면서 가장 큰 슬픔을 가진 날”이라고 언죽번죽 말했다.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과 함께 “소중한 가족을 잃은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도 했다. 그런데 그 ‘깊은 위로’를 한 곳은 유족들 앞이 아니다. 뜬금없이 성북구의 교회를 찾아 ‘추도
누구나 그렇겠지만 의사에 깊은 고마움을 느낄 때가 많다. 나만 하더라도 맹장수술, 위내시경시술을 받아 건강을 지켰고 가까이는 치통을 해소했다. 사단법인 싱크탱크를 만들어 운영할 때 함께 한 의사들 얼굴을 떠올리면 10년이 지난 지금도 채무감에 어깨가 무겁다. 그 의사들은 싱크탱크에 적극 참여해 ‘국민 주치의제도’ 방안을 마련했다.21세기 들어와 한국 의술은 세계 첨단을 달리고 있다. 여기까지 이른 의사들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빛 못잖게 그림자도 짙다. 응급 수술을 받지 못하고 119 구급차 안에서 고통과 죽음의 공포 속에 병원을
여야 싸잡은 비난이 ‘지식인 사회’에 유행이다. 정치가 난장판이란다. 진영 논리를 너도나도 개탄한다. 과연 그런가. 시시비비 없는 양비론이 과연 ‘중립’ 또는 ‘진보’일까. ‘이재명 죽이기’에 혈안인 조선을 비롯한 신방복합체들의 여론몰이를 견제해야 할 신문마저 쉬 납득하기 어려운 기사를 내보냈다. “한국 정치, 이념 없이 진영만 남아…뭘 놓고 싸우는지 몰라”(한겨레, 10월6일)가 그것이다. ‘대립과 배제를 넘어, 공존을 찾아’라는 문패아래 3인 좌담을 담았다. 정치학자는 “양당이 무엇을 두고 다투는지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
애독자의 양해를 구한다. 나는 지금 쓰고 싶지 않은 말을 썼다. 고심하며 ‘X’를 끼웠지만 칼럼의 품격은 이미 떨어졌다. 그럼에도 ‘모가지’를 쓰는 까닭은 대통령 윤석열과 참모들의 ‘콘크리트 불감증’에 다가갈 길이 도무지 없어서다.딴은 그들만이 아니다. 지난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목놓아 부르댄 교수들이 있다. 장수 철학교수, 원로 정치학교수, 기자출신 언론학교수 등등 참 다양했다. 신문방송 복합체와 그 아류 매체들의 ‘고위직 언론인’들, 그들에 줄 선 기자들, 저마다 무슨무슨 직함을 붙인 훼절한 먹물들도 윤석열을 따라 문재인 정부를
참 징하다. 독립군의 상징인 홍범도를 제멋대로 능욕한 무리가 여론의 눈총을 피하려는 깜냥일까. 윤미향을 집요하게 사냥한다. 대통령실, 집권여당, 신방복합체와 그 아류들이 한 통속이다. 가령 ‘김정은의 유용한 바보들’을 조롱하는 조선 칼럼(9월9일자)에 이어 동아도 뒤늦게 “총련, 윤미향 참석행사서 ‘김정은 원수님’ ‘이남의 미더운 겨레’”라는 선정적 제목 아래 ‘단독기사’(9월11일자)를 내보냈다. 태영호까지 등장한다. 국회에서 윤미향과 민주당을 싸잡아 매도한 태영호에게 ‘쓰레기’라는 말이 터져 나온 사실을 두고 북한이 한 말과 같
다시 국치일을 맞는다. 참담한 과거를 기억하는 뜻은 윤똑똑이들이 주장하듯 무슨 콤플렉스 따위가 아니다. 역사를 망각하는 무리가 하도 많은지라 경계하기 위함이다.국치를 당한 1910년 8월29일, 윤똑똑이 대표는 당시 민중의 무지몽매를 꾸짖던 윤치호다. 그는 10대 시절 일본에 가서 근대화된 모습에 주눅 들었다. 서른 살을 앞두고는 “마음대로 내 고국을 선택할 수 있다면, 일본을 선택할 것이다. 오, 축복받은 일본이여! 동방의 낙원이여!”(1893년 11월1일)라고 일기에 썼다. 조선을 멸시했던 그는 정작 민중들이 독립만세운동에 나서
저들에게 역사 앞에 겸손하길 촉구한 것은 과연 과대평가였다. 윤석열 정권은 역사 날조까지 서슴지 않는다. 대통령과 국가보훈부장관 손발이 척척 맞는다. 광복절을 앞두고 독립유공자와 유족을 청와대 영빈관으로 초청한 자리에서 대통령은 “우리의 독립운동은 단순히 일제로부터 빼앗긴 주권을 찾는 것만이 아니었다”면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건국운동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독립운동은 “빼앗긴 주권을 회복한 이후에도 공산 침략에 맞서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내는 것으로 이어졌다”고 강조했다. 독립운동을 ‘반공’과 연계하려는 깜냥을 솔직하
마침내 정부까지 독재정권 미화에 팔 걷고 나섰다. 186명의 민중이 목숨 바친 사월혁명으로 쫓아낸 이승만에 마냥 찬가를 불러대는 저들을 보라. 사뭇 기세등등하다. 대통령 윤석열, 법무 한동훈, 보훈 박민식이 앞장섰다. 모두 검사 출신으로 유들유들하지만 그들이 주역은 아니다. 조중동 신방복합체, 특히 조선이다. 오래 전부터 악머구리 끓듯 이승만을 찬송했다.기실 대통령실과 집권당은 내내 ‘조선 앵무새’였다. 윤석열이 3·1절 기념식장 그림들에 ‘이승만이 없다’고 홉뜨자 박민식은 잽쌌다. ‘이승만 탄생 기념식’에 가서 추어올리고 58주기
권력과 언론이 손발 맞춰 나라를 망가트리고 있다. 전임 정부를 ‘반국가세력’으로 매도하는 대통령 아래 실업급여를 ‘달콤한 시럽’으로 깐죽대는 집권당 간부까지 등장했다. 윤석열 취임이후 민생, 민주, 민족의 삼중 위기가 무장 깊어감에도 언론권력은 되레 찬가를 불러댄다.무릇 언론이 할 일 가운데 권력 감시가 있다. 권력과 으밀아밀 한통속으로 사실 왜곡도 서슴지 않는 ‘언론권력’은 마땅히 감시 대상이다. 그 일을 할 의무가 있는 곳은 한겨레와 공영방송이다. 언론권력 견제는 한겨레 창간에 나선 민중들의 소망이기도 하다. 그 신문 여론매체부
‘조폭’이 부쩍 신문과 방송을 탔다. 호텔 난동과 조폭의 결혼식이 부각됐다. 조선일보(6월30일)과 중앙일보(7월1일) 기사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10대 조폭’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다. 그런데 조폭은 예서 그치지 않는다. 적어도 신방복합체와 대통령에 따르면 그렇다. 조선일보는 건설노동인들을 “조폭 그 자체”로 규정했다. 윤석열은 법무부 한동훈, 국토부 원희룡으로부터 ‘건설현장 폭력 현황 및 실태’ 보고를 받고 “딱 사이즈가 ‘건폭’이네”라고 잘라 말했다.대법원 판결(6월29일)에 이르는 과정을 톺아보자. 윤석열의 ‘건폭’ 발언 전부
“힘없고 가난한 노동자와 싸우지 말라. 그 힘 가지고 정의를 위해 힘 있는 사람과 한 번이라도 싸우라.” 6월17일 ‘양회동 열사 범시민추모대회’에서 고인의 형 양회선이 뱉은 피울음이다. 건설노조는 ‘분신 방조’ 의혹에 가세한 국토부 장관 원희룡에게 사과를 촉구했지만 모르쇠다. 기실 그 피울음을 들어야 할 자는 원희룡과 윤석열만이 아니다. 애초 ‘기획 분신’을 내놓고 조장한 ‘원흉’이 있다. 조선 신방복합체다. 심지어 유서의 필적이 다르다는 보도까지 서슴지 않았다. 조선 신방복합체만 보는 이들에겐 지금도 그게 ‘진실’이다.조선 신방
광우병에 이어 후쿠시마원전의 방사능 오염수를 둘러싸고 광기가 넘실대고 있다. 광기를 선도하는 곳은 예의 조선 신방복합체와 그 아류들이다. 조선닷컴(6월4일)이 부각한 “광우병 파동 주도 195개 단체, 후쿠시마 오염수도 반대” 제하의 기사가 대표적이다. 자극적인 기사는 인터넷에 퍼져갔고 집권당 대변인까지 가세해 눈 부라렸다.문제의 기사는 “지난 2008년 미국산 소고기 반대 운동을 주도했던 ‘광우병국민대책회의’에 참여했던 시민단체 중 195개 단체가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반대 여론을 주도하는 ‘일본 방사성 오염수 방류 저지 공
나라가 시나브로 나락에 빠져들고 있다. 건설노동인의 분신이 상징하듯 민생, 민주 위기가 날로 깊어간다. 미국과 일본에 찰싹 달라붙어 남북관계의 긴장은 높아가고 중국과 러시아 시장은 닫혀간다. 그럼에도 도무지 성찰이 없다. 오월항쟁 기념식에서 그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하는 안팎의 도전에 맞서 투쟁하지 않는다면 오월의 정신을 말하기 부끄러울 것”이라고 언죽번죽 부르댔다.생게망게하다. 지금 누가 민주주의 위기를 안팎에서 불러오고 있을까. 대통령이 나서서 반정부투쟁을 선동하는 걸까. 앞뒤를 살피면 그의 깜냥이 읽힌다. 오월 정신이 “자
KBS와 MBC는 방송이 아니란다. 조선일보가 아예 사설 제목으로 KBS와 MBC를 “방송 아닌 정치 세력”으로 규정하고 나섰다(5월4일). “공공재인 전파를 이용해 정치 행위”를 한다고 단죄한 근거가 흥미롭다. 윤석열의 미국 방문에 “심각한 편파 방송을 했다는 지적이 잇따라 제기됐”단다. 여러 단체를 늘어놓으며 ‘대한민국언론인총연합회’를 앞세웠다. 사설은 ‘대한민국언론인총연합회’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마치 무슨 대표성이라도 있는 듯이 서술했지만 전혀 아니다. 지난 3월 창립할 때 공영방송 흔들기에 앞장선 박대출과 박성중을 비롯해 집
“석열아, 먼저 손 내밀고 더 많이 들어라.” 월간 신동아가 기사와 표지에 붙인 흥미로운 표제다. “서울법대 79학번 동기들이 바라본 ‘대통령 윤석열’ 1년” 부제를 달았다. 그 아래 표제도 눈에 띈다. “품성으론 최고의 대통령감”이다. 포탈 뉴스에 뜬 표제를 보고 기사를 읽었다. 고언을 했으리라는 작은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순진한 착각이었다. 변호사와 현직 법관인 동기들은 윤석열의 1년에 방향성은 맞지만 디테일이 아쉽다며 ‘한미동맹 공고화를 통한 국가안보 정상화’를 높이 평가했다. 서울법대 동기들이 모두 그리 생각하지는 않으리라
100세 넘게 살며 글 쓰고 강연 다니면 축하할 일이다. 다만 그 글과 말이 편향되거나 사실과 다른 억지를 편다면 그 반대다. 김형석 명예교수가 대선 정국에서 낡은 색깔론을 펴며 선거에 개입할 때 우려를 전했다(‘101세 철학자’의 끝 모를 흑백논리, 21년 9월20일).충정으로 권해도 소용없기에 그 뒤 침묵했다. 그런데 최근 일주일새 두 편을 기고한 칼럼은 충격적이다. 중앙일보 칼럼(20대 일본 유학서 깨달은 것 “왜 열심히 일해야 하나” 3월31일)과 동아일보 칼럼(과거의 연장으로는 국가적 후진성 극복 못 한다, 4월7일)이 그
무식하면 용감하단 말은 괜히 나오지 않았다. 살면서 누구나 그런 이를 마주쳤을 터다. 그런데 조금 알면 더 용감하다. 줄줄이 나타난 무리를 보라. 국힘당 의원 한무경은 국회에서 “한일합방은 누구의 잘못이냐하는, 예스냐 노냐 하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자”면서 “우리가 힘이 없어서 당한 것”이란다. 그는 문헌학 박사다. 그 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이던 정진석은 “제발 좀 식민지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잔다. 그는 기자 출신이다. 중앙일보 “두 원로의 기억 속 일제” 칼럼은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와 박정희 비서실장 김정렴을 내세운 뒤 “역사를
윤석열과 기시다. 3월16일 도쿄에서 이야기 나누고 저녁밥 먹기로 했다. 윤이 한국인을 강제 동원한 일본 전범기업에 내놓고 면죄부를 준 직후다. 경제를 위해서라고 부르대지만 민생도 아니거니와 납작 엎드린 자세다.더구나 삼일절에 사뭇 당당히 저지른 굴욕은 매국노 의식과 맞닿아있다. 그는 “오늘 우리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 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한다”고 언죽번죽 주장했다. 내 귀를 의심했다. 한국사의 정체성과 타율성이 뼈대인 식민사관에 뼛속까지 물든 윤똑똑이 아닌가. 윤석열이 기시다에
이재명 체포. 못해서 안달이다. 윤석열과 한동훈의 검찰만이 아니다. 언론, 특히 신문방송 복합체들이 도드라진다.그런데 어떤가. 서울중앙지검 반부패·공안 수사1·2·3부가 죄다 수사에 나서고, 275차례나 압수수색해서 내놓은 영장청구서에는 정작 확실한 물증이 없다. 나는 지난 칼럼에서 검찰과 이재명의 주장이 전혀 다른 만큼 언론은 확인된 사실만 보도하고 그에 근거해 논평해야 옳다고 썼다(안철수가 적이라면 이재명은?). 그 뒤 나온 영장청구서를 보며 ‘이재명 죽이기’에 앞 다툰 언론들이 적어도 자중하길 기대했다. 하지만 신중은커녕 물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