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법무가 사퇴한 다음날, 조선일보는 신바람이 났다. “‘조국 사태’ 만든 文, 사과 한 마디에 남 탓 열 마디” 제하의 사설에서 대통령이 언론에 ‘성찰’을 요구한 대목에 발끈했다. 성찰은 대통령이 해야지 “왜 기자들이 해야 하나”고 되물었다. 바로 아래 사설 “국정 곳곳에서 먹잇감 찾아 악착같이 이익 챙기는 좌파들”도 자극적이다. 이참에 “좌파”들을 싹 쓸어버리겠다는 분기탱천이 읽혀진다. 조국을 비판하며 틈틈이 정의당에 칼날을 겨눈 보도와 같은 맥락이다. 정말 조선일보 기자들은 성찰할 대목이 없을까. 조선일보는 위선이 없을까.
기득권을 들먹이면 대뜸 눈 홉뜨는 부라퀴들이 있다. 기득권이 죄인가 묻는다. 불법 여부를 따질 때는 사뭇 진지하다. 딴은 사전적 뜻을 짚으면 옳다. 오히려 “특정한 자연인이나 법인이 정당한 절차를 밟아 이미 획득한 법률상의 권리”라는 풀이처럼 법적 권리다. 그런데 ‘기득권층’을 찾으면 결이 다르다. 같은 사전에서 기득권층은 “사회, 경제적으로 여러 권리를 누리고 있는 계층”이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손잡는다. 그래서다. 영국의 정치평론가 오언 존스는 기득권층을 집중 분석한 책을 펴내며 “다수에 맞서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는
한여름과 우수는 잘 이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이 경제전쟁을 선전포고한 상황에서 맞는 광복절은 착잡하다. 3‧1혁명 100돌에 맞춰 낸 소설을 놓고 지상파방송에서 대담을 나눌 때였다. “이래서 현대사를 들여다보기 싫어요. 우울해지거든요.” 진행자가 녹화 중간에 쓸쓸한 미소로 건넨 말이다. 의열단 김상옥이 일제와 총격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10발을 맞고도 싸우다가 마지막 한발로 자결한 이야기를 나눈 뒤였다. 언론계 후배이전에 젊은 세대가 우리 역사에서 느낄 비애가 새삼 사무쳤다. 모든 우울이 병적인 것은 아니다. 철학자 김동규는 『멜
안녕하세요. 어느새 10년이 더 흘렀습니다. 한일 관계는 안타깝게도 무장 악화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우려도 크리라 짐작됩니다. 우리가 만난 곳은 출판기념회가 끝나고 뒤풀이 자리였지요.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제 소설을 일어로 옮긴 분과 친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그날 뒤풀이 자리에서 일본의 힘을 느꼈습니다. 스무 명 남짓이 큰 상에 둘러앉아 각자 소설을 읽고 강연들은 소감을 이야기 했지요. 가장 연로하신 분이 흘린 눈물, 기억하시나요. 일제 말기 서울에서 교사였다던 그 분은 청초한 여학생 제자들을 전장에 보낸 자신의 죄를 뉘우
대통령이 북유럽 3개국을 돌아보고 귀국했다. 6박 8일이다.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 대변인은 ‘피오르드 관광’이라 언죽번죽 빈정댔지만, 제 ‘안경’으로 세상을 보는 꼴이다. 현직 대통령이 북유럽 순방을 떠나는 날, 나는 정치인 문재인이 무엇보다 많이 둘러보고 오기를 기원했다. 순방에 호의적인 언론들은 문 대통령이 ‘국민을 위한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한 ‘오슬로 구상’과 “평화는 핵이 아닌 대화로 이룰 수 있다”는 ‘스톡홀름 제안’으로 눈길을 끌었다고 보도했다. 내가 더 눈여겨본 대목은 문 대통령이 스웨덴 살트셰바덴에서 언급한 “한국의
문재인 정부가 2년을 지났다. 언론과 정계에서 가장 불거진 쟁점이 이른바 ‘좌파독재’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의 가슴과 나경원 원내대표의 머리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황교안의 가슴, 나경원의 머리’ 3월19일)했지만,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더 심해졌다. “두들겨 맞으면서 죽을 각오로 좌파 독재 저지 투쟁의 최일선에 서겠”단다. 기꺼이 “피 흘리겠다”며 “좌파독재에 맞서 저를 하얗게 불태우겠다”고도 했다. 황교안의 ‘공언’이다. 방송에서 사뭇 진지하게 언죽번죽 그 말을 하는 황교안의 얼굴을 보면 하릴없이 실소가 나온...
프랑스가 나치독일 지배를 받을 때다. 나치가 세계사적으로 최고의 현상금을 건 레지스탕스가 있었다. 투쟁 과정에서 아내가 순국했지만 나치가 패망할 때까지 최전선에서 싸웠다. 그가 목숨 걸고 투쟁할 때, 프랑스의 한 언론은 ‘국방헌금’을 모아 독일군에 바쳤다. 틈만 나면 독일군에 지원하라고 프랑스 청년을 선동했다. 숱한 청년이 개만도 못한 죽음을 맞았다. 그 순간에도 그 언론 사주는 제호까지 내리고 히틀러의 깃발을 인쇄해 가족과 호의호식했다. 나치가 물러나고도 자자손손 신문사를 세습하고 프랑스 정계의 향방에 깊숙이 개입해왔다. 가...
보수 지식인들이 사뭇 세련을 가장하며 즐겨 쓰는 ‘금언’이 있다. 20대에 좌파 아니면 가슴이 없는 사람, 40대에도 그러고 있으면 머리가 없는 사람이란다. 표현이 다소 달라지기도 한다. 서른 살 전에 좌파 아닌 사람은 감정이 없고 서른 넘어도 그런 사람은 이성이 없다며 짐짓 회심의 미소마저 짓는다. 새삼 그 말이 떠오른 까닭은 문재인 정부를 ‘좌파 독재’라며 날마다 부르대는 자한당 원내대표와 당 대표를 보면서다. 나경원과 황교안, 두 사람은 젊은 시절 아무래도 좌파는 아니었을 터다. 보수적 정치 금언에 따르면, 그 뜻은 명료...
손석춘 칼럼/ 일제 강점기에 친일은 모두 엄벌해야 할까. 부끄럽게도 어쩌다 늙은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친일 행위에 상황을 감안하자는 주장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다. 마찬가지로 독립운동은 아무리 작아도 정당히 평가해야 옳다. 독립운동은 단순히 ‘희생적’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없다. 친일파가 호의호식하며 자녀를 키울 때, 풍찬노숙하고 후손도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을 정도로 목숨을 건 투쟁의 길이었다. 3‧1혁명 100돌을 앞두고 명토박아둔다. 독립운동을 어떤 이유든 폄훼한다면 자기성찰이 얕아서다. 최종 평가 기준은 ...
김미숙. 그 이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난감하다. 참혹하게 잃은 아들의 이름을 앞에 쓰자니 가슴이 아린다. ‘씨’를 붙이기엔 너무 한가롭다. 지난 칼럼에서 ‘어머니’를 강조한 까닭이다. 나는 지금 그 이름과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을 견주고 싶진 않다. 기대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너무 가시밭 길이어서다. 더구나 나는 먹물로 지내며 그 길을 권하기란 염치없는 짓이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기업’의 ‘상상도 못했던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착하고 성실했던 아들이 참사를 당했기에 어머니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추궁하듯 하소연했다. 행여 어머니...
“우리나라를 바꾸고 싶습니다. 아니, 우리나라를 저주합니다.” 화력 발전소 비정규직 고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 님의 절규다. 두루 공감하겠지만 더없이 순수한 모습이다. 동영상으로 본 아들 김용균의 생전 얼굴도 티 없이 맑다. 기자회견장에 나온 아버지의 침묵은 되우 서럽다. 착한 아들 잃은 어머니의 ‘대한민국 저주’를 다독이고자 이 글을 쓰지 않는다. 그 ‘저주’의 가슴을 절실히 느끼지 못하는 기득권 세력의 굳은 머리를 위해 쓴다. 김용균의 참혹한 최후는 나 또한 어느새 기득권의 하나가 되었음을 벼락처럼 깨우쳐주었다. 2016년...
대학에 몸담은 초기에 ‘진지충’이란 말을 처음 듣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정치커뮤니케이션 강의실이었다. 발표한 학생에게 정말 그런 말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럼요. 친구들 사이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면 ‘너 진지충이니’라고 되물어요.” 그래서란다. 정치 이야기는 가능한 하지 않는단다. 박근혜 정권이 나라를 무장 망가트리던 시기였다. 진지한 대학생, 정치를 거론하는 젊은이가 대학에서 ‘벌레’로 전락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나는 다시 충격을 받았다. 집으로 배달된 신문에서 ‘대문짝’만한 표지기사를 보았다. ‘엄근진(엄격·근엄·진...
“그는 천지간의 한 괴물이다. 몸뚱이를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찢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일생에 해 온 일을 보면 악이란 악은 모두 갖추어져 있다.” 도대체 누구일까. 그 괴물은. 실제로 몸이 찢겨 죽었다. 옹근 400년 전의 시월, 이 땅에서 일어난 일이다. 대체 온갖 점잔 떠는 ‘선비’들이 왜 저토록 험한 말로 명문가의 적자 허균을 찢어죽였을까. 오늘의 한국인에게 허균은 1200만이 본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 등장하는 도승지로 기억될 성싶다. 광해군이 의식을 잃자 똑같이...
문재인-김정은의 평양 정상회담을 앞두고 남과 북 모두 ‘새로운 시대’를 다짐했다. 노동신문 전망처럼 “드디어 평화의 길, 화해협력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일까. 다짐과 전망이 현실로 나타나려면 정상회담 18년을 톺아볼 필요가 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연결된 국가정보자문회의(NIC)는 2000년 12월에 낸 보고서에서 2015년 남북이 통일하고 동북아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리라 전망했다. 보고서는 근거를 명확히 밝히진 않았지만 2000년에 6‧15 공동선언이 발표된 사실에 주목하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국내에서도...
“중요한 것은 무슨 원칙이나 주의가 아니라 국민 삶을 개선하고 일자리를 늘린다는 실사구시정신이다.”언론에 보도된 ‘청와대 관계자’의 말이다. 나는 그 ‘관계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특정 개인보다 청와대의 전반적 기조가 중요해서다. ‘실사구시’가 정부의 사회경제 정책이 과거의 틀을 벗어나기는커녕 답습하고 있다는 비판이나 행정적 탄압을 받고 있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모르쇠를 놓고 있다는 비판을 의식한 발언이라면, 분명히 경고한다. 문재인 정부의 미래는 어둡다. 물론, 문재인 정부에 적극적인 사회경제 정책을...
누구나 대통령 자리에 앉으면 나라 경제가 부담일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오천만 국민이 먹고 사는 문제라는 엄중한 책임감이 문득 문득 엄습할 터다. 게다가 언론이 끈질기게 ‘경제 위기’를 들먹이고 그 원인이 대통령의 경제 정책에 있다고 몰아치면 흔들리게 마련이다. 선한 대통령일수록 짐의 무게는 더 큰 법이다. 검증되지 않은 정책으로 국가 경제를 실험하지 말라는 ‘협박’이 정치 모리배들 아닌 대학 교수의 입을 빌려 나올 때는 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찬찬히 짚을 필요가 있다. 경제 위기를 부르대는 언론과 그 언론에 기웃...
가슴을 가다듬고 두드린다. SOS. 긴급구조신호다. ‘소득주도 성장호’ 침몰 위기. 몇 차례나 가만히 있으려 했다. 지켜보자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거센 파도가 ‘소득주도 성장호’를 끊임없이 때린다. 소득주도 성장론이 되레 소득분배를 악화한다는 아우성이 나온 것은 오래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방선거에서 압승한 뒤 처음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참모들에게 “청와대야 말로 정말 유능해야 한다”고 당부한 까닭도 저간의 비난들을 염두에 두었을 터다. 조국 민정수석도 “민생과 일자리, 소득 증가에서 국민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정부는 버림...
“모든 미디어가 북한의 평창 겨울올림픽 참가와 예술단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는 이 순간에도 북한에선 추운 겨울날 생존 자체가 목적이다.” 조선일보와는 그래도 다르다고 자부해온 중앙일보 기사(2018년 2월12일자)의 들머리입니다. 표제도 “참혹한 북 주민 실상, 올림픽 중에도 잊지 않았으면”입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북의 동포들이 겪는 고통을 잊지 말자는 기사는 선의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어떤가요. 우리 언론은 정작 올림픽으로 고통 받고 있는 남쪽의 민중을 잊고 있지 않은가요. 연세대 청소노동...
민 형. 첫 편지를 띄웁니다. 문득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해 오더군요. 촛불혁명으로 새 정부가 들어섰음에도 대한민국이 무장 쓸쓸해서입니다. 박근혜와 가장 앞장서서 싸운 민주노총 위원장은 지금도 ‘감빵’에 있습니다. 왜 그가 아직도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 묻는 ‘청와대출입 기자’는 한 명도 없더군요. “한상균 위원장이 눈에 밟힌다”고 공언했던 대통령이 그를 사면하지 않을 만큼 영향력이 큰 참모는 누구일까요. 대체 어떤 간언을 했을지 저는 몹시 궁금합니다. 사실관계를 더 확인하고 편지를 띄울게요. ‘새해’들어 대한민국이 을씨년스러운...
이낙연 총리. 장점이 많은 정치인이다. 무엇보다 겸손하다. 노동운동 출신도 국회의원이 되면 목에 깁스를 한다는 우스개가 실감나는 오늘이지만, 언젠가 국회에서 인사 나눈 의원 이낙연의 목은 이미 다선이었음에도 깁스를 하지 않았다. 그의 문체도 말씨처럼 온건하고 합리적이다. 30대 기자 이낙연이 쓴 정치기사는 논리 정연했다. 그가 전남도지사를 거쳐 문재인 정부의 첫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내심 기대가 컸다. 취임 초기에 이 총리가 ‘문재인 정부는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부’임을 틈날 때마다 강조했기에 더 그랬다. 그런데 언론에 보도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