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법원은 피고인과 두 딸이 겪은 일련의 사건에서 공권력이 범한 참담한 실패와 이로 인해 가중됐을 그들의 극심한 괴로움을 보며 깊은 좌절과 슬픔을 금할 수 없다. (중략) 그 부작위가 두 자매의 자살이라는 참혹한 결과로 이어졌을 개연성에 비추어 보면 이는 국가 공권력의 총체적 실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9일, 서울남부지법의 한 재판정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정욱도 판사는 피고인 장아무개씨에게 무죄를 선고하며 판결문 부언附言에 이렇게 덧붙였다. 같은 시간, 장씨는 집에서 초조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못가죠. 가슴 떨려서 어떻게 가. 무죄날 거라고는 예상도 못했어요.”

장씨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 빌딩 앞에서 “강간하고 살인한 자들이 아직도 반성하지 않는데 내 두 딸의 영혼이 하늘을 맴돌고 있다”는 내용의 1인 시위를 하다가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됐다. 장씨가 든 피켓에는 남성 12명의 실명이 쓰였다. 이 중 6명이 장씨를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검찰에 고소했다. 지난 23일과 25일 장씨를 서울 은평구 자택에서 만났다. 

▲ 장아무개씨 받은 무죄 판결문. 사진=이치열 기자
▲ 장아무개씨 받은 무죄 판결문. 사진=이치열 기자
“이 법원은 깊은 좌절과 슬픔을 금할 수 없다”는 판결문 

2009년 8월28일 한 여성이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18층 빌딩에서 몸을 던져 숨졌다. 장씨의 큰 딸 유미(가명. 당시34세)씨다. 유서에는 "날 단단히 갖고 놀았다. 더 이상 살아 뭐하겠나"라고 쓰였다. 일주일 뒤 경기도 안양시 한 건물의 화단에서 또 한 명의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유미씨의 동생 유진(가명, 당시30세)씨였다. 

일주일 간격으로 딸 둘을 잃었다. 유미씨 장례식이 끝나 집으로 돌아갔던 친척들은 바로 상복을 입고 유진씨 장례식을 치러야 했다. 유진씨는 유서에 “언니가 너무 보고싶다. 엄마가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남겼다. “작은애까지 가고 나서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몇 달을 못 걸은 거 알아요? 지팡이 짚고 다녔어요.”

두 달 뒤 뇌출혈로 투병해오던 남편이 숨졌다. 장씨는 “그래도 그 양반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볼꼴 못 볼꼴 다 봤는데 그 양반은 의식 없이 갔잖아요.” 아버지가 뇌출혈을 얻은 건 2004년 12월, 유미씨가 12명에게 강간 및 강제추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다. 

일주일 간격으로 두 딸이 스스로 몸을 던졌다 

사건은 2004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미씨와 유진씨는 드라마 보조출연 아르바이트를 하러 경남 하동으로 갔다. 가수 백댄서를 하며 드라마 보조출연 아르바이트를 자주했던 동생 유진씨의 제안이었다. 하지만 유진씨는 덥고 힘들다는 이유로 먼저 서울에 왔다. 현장에는 언니 유미씨만 남았다. 

“작은 애는 춤추고 휘젓고 다니고 주변에 친구도 많아. 유미는 범생이지. 1등 자리를 안 놓쳐봤어요. 대학 졸업하고도 그렇게 공부를 하더라고요. 학교, 성당, 집만 왔다갔다 했어요. 성당에서도 매일 애들 가르치고. 너무 책임감이 강하니까 그걸(아르바이트) 하겠다고 있다가 그 사달이 난거에요.” 

‘사달’ 이라는 건 강제추행과 성폭행이다. 유미씨가 생전에 진행했던 형사고소에 따르면 남성 12명은 2004년 6월부터 3개월 동안 약 40회에 걸쳐 유미씨를 강간 및 강제추행 했다. 유미씨는 이를 달력과 일기에 기록했다. 유미씨의 경찰 조사 진술과 병원의무기록사본을 바탕으로 재판부에 제출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 2월23일 장아무개씨를 서울 은평구 자택에서 만났다. 사진=이치열 기자
▲ 2월23일 장아무개씨를 서울 은평구 자택에서 만났다. 사진=이치열 기자
12명이 40차례에 걸쳐 강간과 강제추행 

“보조반장으로 근무하던 이아무개씨는 2004년 7월말경 드라마 촬영현장에서 양유미가 촬영 중인 틈을 이용해 갑자기 덤벼들어 왼손으로 양유미의 오른손을 잡고 왼쪽 어깨를 감싸안으며 엉덩이를 만지고 껴안으면서 가슴을 만지는 등 양유미가 반항할 수 없는 상태에서 강제추행” 

“보조출연자 담당으로 근무하던 양아무개씨는 2004년 10월5일 서울 장소불상 도로에 주차한 회색 카니발 차량 안에서 술에 취해 의식불명이 된 양유미의 상의를 벗기고 양유미가 발로 차면서 반항하자 머리채를 쥐어잡고 ‘너 이아무개한테 했던 대로 해보라’며 항거불응 상태인 양유미를 강간 및 간음”

“진행부 과장으로 근무하던 김아무개씨는 2004년 10월19일 술을 마셔 취한 양유미에게 너희 엄마를 죽인다. 동생을 팔아넘긴다’며 의식불명이 된 양유미의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하여 강간 및 간음” 

“진행반장으로 일하던 조아무개씨는 2004년 7월23일 오후쯤 경남 하동에 있는 드라마 촬영장소에서 양유미가 촬영 중인 틈을 이용해 갑자기 손으로 가슴을 만지는 등의 방법으로 추행하고 2004년 9월 같은 장소에서 양팔로 양유미를 껴안고 양손으로 얼굴을 비비는 등의 방법으로 강제추행”

그해 12월 유미씨는 정신 병원에 입원했다. 의무기록사본에 따르면 유미씨는 2004년 9월24일, 불안한 행동을 보였고 감정조절장애 증상이 나타났다. 11월26일 의사에게 자신이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털어놨다. 의사는 “자신에 대한 통제감이 저하되고 피해의식 및 분노감이 두드러진다”고 썼다. 

왜 유미씨는 5개월이 지나서야 이 사실을 의사에게 털어놨을까. 소견서에 따르면 유미씨는 앞서 5월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호소하며 병원을 방문했다. 장씨는 “여리고 내향적인 성격”이라며 “가해자들이 애가 어려보이니까 추행하고 강간한 것”이라고 말했다. 장씨의 말처럼 처음에는 ‘추행’ 이었다가 폭력의 수위가 ‘강간’으로 넘어갔다. 

“경찰 조사 받는 과정에서 진실을 밝히기가 힘들다…”

입원할 즈음 12명에 대한 형사고소를 시작했다. 유미씨는 4명이 자신을 성폭행했고 8명이 자신을 강제추행 했다고 진술했다. 유미씨가 지목한 4명 중에 3명은 성관계를 인정했다. ‘강간’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끝까지 ‘합의하에 이뤄진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유미씨와 유진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후, 장씨가 12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민사소송에서 재판부는 ‘정상적이지 않은 성관계’를 인정했다. “양유미가 2004년 드라마 보조출연일을 하면서 일부 피고인들로부터 강간 내지 업무상위력 등에 의한 간음이나 강제추행 등의 성폭행을 당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판단이 조금 일찍 나왔다면 자매의 인생은 달라졌을까. 유미씨는 형사고소를 제기하고 2년 만인 2006년 7월 고소를 취하한다. 수사가 진행되자 ‘2차 가해’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장씨에 따르면 유미씨를 담당했던 경찰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하지 않았고 심지어 “너를 강간한 이아무개의 성기를 그려오라”고 주문했다. 

“그날 유미가 억울한 마음에 스케치북이랑 색연필, 크레파스를 몇만 원어치를 샀어요. 오죽하면 경찰 조사를 진행하면서 애가 더 아팠어요. 한 번은 경찰 조사가 끝나고 그 앞 도로에 뛰어든 적도 있어요. 죽으려고…그 경찰들이 왜 그랬는지 묻고 싶어요.”

당시 진술서를 보면 유미씨는 “더 이상 사건에 대해 신경쓰고 싶지 않다. 고소할 때에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당연하고 쉬울 줄 알았는데 조사받는 과정에서 진실을 밝히기가 힘들고 다시 그 사건들을 기억하는 것이 참을 수 없어 고소를 취하한다”고 말했다.

잘 살아보려고 했다. 병원 가는 횟수도 줄었다. “세 모녀가 요리학원 다니면서 자격증도 땄어요. 유미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딴다고 학원도 다니고. 점점 나아졌어요.“ 장씨는 유미씨의 정신이 돌아왔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계속 아팠으면 억울하고 분한 것도 몰랐을테다.
 
▲ 유미씨가 생전에 남긴 기록. 사진=이하늬 기자
▲ 유미씨가 생전에 남긴 기록. 사진=이하늬 기자
재판부 “성폭행은 인정되나…공소시효가 지났다”

자매가 세상과 등진 뒤 장씨는 정신을 놓고 지냈다. 유미씨가 다니던 병원을 이제는 장씨가 다닌다. “따라가려고 했어요. 그래도 따라갈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서 뭔가 해야겠더라고.” 장씨가 분홍색 노트북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얼핏 보기에도 연식이 있어보였다. 둘째 유진씨가 며칠 쓰지 못하고 남긴 것이라 했다. 

정신을 차린 장씨는 12명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12명의 피고들이 공동하여 장씨에게 1억원 및 이에 대해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법원은 가해자 12명의 손을 들어주었다. 가해자들의 혐의가 입증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유는 공소시효만료였다.

재판부는 “피고들과 양유미와의 성관계는 사회통념상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상적인 성관계였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같은 시기에 여러 명과 성관계를 했다는 이례적인상황이었으며 △피고들이 유미씨를 관리감독하는 지위에 있었고 △유미씨가 정신과 증상이 악화돼 치료를 받고 있는 상태였던 점 등이 근거가 됐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양유미가 피고인들로부터 성폭행을 당하였더라도 이 사건 소송은 양유미가 성폭행을 당했다고 한 때로부터 약 9년6개월, 양유미·양유진이 자살한 때로부터 약 4년6개월이 지나서 제기됐는바, 3년의 소멸시효가 지나서 제기됐음으로 장씨의 주장은 이유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가해자 12명 중에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재수사를 받고 싶은데 그럴 수 있을까요?”

“석궁 사건이 이해가 갔어요. 왜 판사를 쐈겠어요?” 장씨가 말했다. “얼마나 아깝고 얼마나 이쁜지 알아요? 너무너무 아깝네. 사람들이 그래요. 시간이 약이래. 그립고 보고 싶은데 약이 어디있어요. 8년이 지났는데요. 길에서 누가 ‘엄마’ 이러면 뒤돌아보게 돼요.” 장씨의 목이 잠겼다. 

유미씨가 소송을 할 당시 성폭행은 친고죄였다. 당사자가 소송을 취하하면 수사도 끝난다. 형사는 당사자가 취하했고 민사는 공소시효 때문에 져버린 상황에서 장씨가 할 수 있는 건 1인 시위뿐이었다.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원래 계획은 가해자 12명이 있는 회사로 가서 다 하려고 했는데 그 전에 소송에 걸려버렸어요.”

장씨는 그 고소가 외려 반가웠다고 했다. 재판장에서라도 그들에게 “너희가 내 딸들을 죽였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6명 외에 다른 이들도 증인으로 신청했다. “우리 애들은 자살한 게 아니에요. 그 12명이랑 조사하던 경찰이 죽인 거에요. 살인이에요.” 

장씨는 딸들의 나이도 잊었다. 75년생과 79년생이라는 사실만 기억한다. 나이를 세는 것도 무섭다고 했다. 

“우리 유미가 떨어져죽은 빌딩, 거기 가는 날이 내가 죽는 날이에요. 그래도 내가 살아있으니 이런 판결도 받아보는 날이 오네요. 우리 애를 처음 강간했던 이아무개는 딸을 낳았다는데…무슨 수를 써서라도 재수사를 받고 싶은데 그럴 수 있을까요?” 사건이 일어난 지 13년이 지났고 자매의 죽음은 더 이상 언론의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정욱도 판사는 부언 말미에 이렇게 썼다. “법원은 공권력의 한 수임자로서 피고인과 두 딸이 겪어야 했던 길고도 모진 고통에 대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사과와 간곡한 위로의 뜻을 전한다. 부디 이 판결이 참척(자녀를 먼저 보낸 고통)의 아픔 속에 살아가는 피고인의 여생에 잠시나마 위안이 되고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버린 두 자매의 안식에 작으나마 도움이 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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