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체제와 정권의 성격을 볼 때 ‘북한이 김정남을 암살했다’는 이야기는 나에게 처음에 꽤 그럴 듯하게 들렸다. 반공주의가 아니라 북한의 기층 노동자·민중의 관점에서 볼 때도 북한사회의 모순과 권력집단이 가진 불안정을 말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북한 권력자들이 이익과 권력을 놓고 다투다가 도를 넘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의문이 커졌다. 수사도 하기 전에 북한이 범인이라고 결론을 낸 것부터 이상했다. 암살당한 게 맞다면 그 방식이 너무 어설프고 엉성할뿐 아니라, 왜 CCTV가 가득한 국제공항에서 보란 듯이 범행을 저질렀는지 이해가 안 갔다. 또 굳이 이 시점에 이런 짓을 하는 게 북한 정권에 무슨 득일지도 갸우뚱하게 했다. 암살 도구도 독침→스프레이→액체로 계속 바뀌었다.

결국 VX로 낙찰됐지만, 여기서부터 보수언론들의 보도는 더 심각한 코미디가 됐다. 손에 발라서 얼굴에 문질렀다? 한 방울로 수백명을 죽인다는 그 치명적 화학무기를 손에 바른 사람이 멀쩡하다? 주변 사람들, 공항, 엠블런스, 병원 어디도 피해가 없다?

그런 화학무기를 연예인 지망생 여성 2명이 10만 원을 받고 ‘베이비 로션인 줄 알고’ 사용했다? 서로 다른 성분을 손에 바르고 김정남 얼굴에 바르면서 섞어서 독성이 생겨났다? 두 여성은 바로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어서 괜찮았다?

▲ 지난 2월14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 형인 김정남이 피살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진=KBS 화면갈무리
▲ 지난 2월14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 형인 김정남이 피살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진=KBS 화면갈무리
독성학 전문가에게 갈 것도 없다. 공격자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피부나 코로는 절대 안 들어가고 암살 대상자만 선택적으로 즉사시키는 독극물, 비누와 수돗물로 제독이 가능한 치명적 화학무기, 이게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은하계 최강의 초자연적 무기’라 할만하고 누구 말대로 ‘독살의 역사를 새로 쓸’ 일이다.

이 모든 정보가 주로 국정원에서 나오는 것부터 우리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다. 온갖 부정과 조작을 저질렀고, ‘특수 반창고를 붙여서 기억이 사라진 간첩’까지 만들었던 게 국정원 아닌가. 말레이시아 경찰도 별로 믿을만한 것 같지 않다. 말레이시아는 부정선거를 일삼는 대표적 일당독재 국가이자 언론, 인권, 성소수자 탄압으로 악명높다.

보수언론은 ‘말레이시아가 원래 친북 국가인데 거짓말을 하겠냐’고 쉴드를 쳤지만, 국제정치의 현실을 조금만 살펴보면 이것도 말이 안 된다. 과연 말레이시아가 미국, 일본, 한국과 척지면서 가난하고 고립된 국제적 왕따 국가를 편들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미국은 말레이시아의 최대교역국이자 투자국이기도 하다.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도 끼어있는 말레이시아는 여타 동남아 국가들처럼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해왔지 한쪽으로 기울었던 적이 없다고 보는 게 맞다.

어떤 사건의 진상이 궁금하면, 그것을 통해 누가 이득을 얻는가를 보라는 말이 있다. 그럼, 이 사건으로 누가 좋아하고 있고 누가 가장 이득인가를 보자. 지금 가장 신난 것은 종북몰이와 우익 결집을 시도하며 위기 탈출을 노려 온 이 나라의 보수우파들이다.

이들은 북한의 소행이라는 것을 기정사실화하며 온갖 과장과 호들갑을 떨고 있다. 또 이 사안을 사드 조기 배치에 한껏 이용해 먹고 있다. ‘북한이 VX를 미사일에 실어 쏠 수 있다’(이 땅에서 탄저균 실험을 한 게 누구였더라?)는 호들갑 속에 미국의 북한 테러지원국 재지정 시도와 사상 최대의 북침 선제공격 한미군사훈련도 시작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북한이 김정남을 암살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전제하는 모든 논의를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심지어 최근 말레이시아 정부는 ‘혐의를 입증할 물증이 없다’며 이번 사건의 용의자라던 북한 국적의 리정철을 강제추방해 버렸다.

사실 취재도, 검증도, 오보에 대한 정정과 손해배상도 필요없는 북한 관련 언론 보도는 만연한 북한혐오증과 경쟁적 안보상업주의 속에 이미 창작과 소설의 영역이 돼 왔던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다.

문제는 ‘종북’으로 의심받을까봐 누구도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기 어려운 사회 분위기다. 이런 분위기 속에 민주당 대선후보 문재인은 ‘만약 북한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면..’ 이렇게 말하다가, 하도 욕을 먹으니 ‘만약’을 빼버렸다. ‘이승만과 박정희도 정적을 암살했다’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너무나 합리적 발언도 선을 긋고 부정해 버렸다.

정세현 전 장관의 발언은 지극히 타당한 것이었다. 이익과 권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북한 권력만의 특징이 아니다. 암살? 암살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는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독침, 독약같은 원시적 무기가 필요없다.

오바마 정권 집권 8년 동안 첨단무기 드론을 통해 암살한 사람은 수천 명에 달한다. 죽어 마땅한 테러리스트라서 죽였다? 누군가가 ‘테러리스트’인지 아닌지는 누가 어떤 기준으로 정할까? 미국 정부가 드론으로 죽인 사람의 90%는 민간인이었다. 드론 폭격으로 ‘테러리스트’ 1명을 죽일 때마다 옆에서 7명의 무고한 민간인이 죽었다는 통계도 있다. 최악의 화학무기라는 VX 보유를 공식 인정한 몇 안되는 나라도 미국이다.

‘친인척간의 암투와 형제간 권력다툼’은 너무 심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박근혜 5촌 살인사건에 대한 의문, 박근혜 제부 신동욱이 겪은 살해 위험, 한국 재벌가에서 자주있는 ‘왕자의 난’도 돌아봐야 한다.

결국 아직 진상이 확실치도 않은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면서 ‘잔악’, ‘잔혹’, ‘광기’ 운운하며 지면을 도배하고 있는 보수언론들은 그와 똑같은 잣대를 이쪽 편에서 벌어지는 일에도 적용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 나라의 보수우파와 기성언론들은 결코 그러지 않는다.

이들의 주도로 한국 사회 전체가 북한 소행을 기정사실화하고 어떤 의문 제기도 꺼리게 만드는 분위기로 가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 정부가 북한 선제공격과 정권교체를 공공연히 떠들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나는 이런 사회 분위기가 정말 불편하고 걱정된다.

진보좌파 진영 내에서도 북한의 소행이라는 것을 기정사실화해서 접근하고 주장하고 있는 분들은 두 번 더 생각해 봤으면 한다. 나는 내가 북한 체제와 지배자들에 비판적이고, 그들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이 분위기에 휩쓸려 숟가락을 얹어주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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