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비서를 위력으로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서울서부지법 형사합의11부(조병구 부장판사)는 김지은 전 정무비서에 대한 피감독자 간음·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강제추행 등의 혐의를 받는 안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적어도 피해자 심리상태가 어땠는지를 떠나서 어떤 위력을 행사했거나 피해자가 제압 당할 만한 상황이라고 볼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며 이같이 판결했다.

▲ 연합뉴스tv 보도 갈무리
▲ 연합뉴스tv 보도 갈무리

재판부는 “피고인(안 전 지사)이 유력 정치인이고 차기 대권주자, 도지사로서 임명 권한을 가진 점을 본다면 이를 ‘위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면서도 “(김씨에 대해) 위력의 존재만으로 상대를 억압했다고 볼 증거는 부족하다. 따라서 개별적으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위력 행사에 의해 피해자 자유의사를 제압할 수 있는 정도로 성적 결정권을 침해하는 결과가 발생해야 처벌할 수 있다”며 “피고인이 (피해자) 심리상태를 떠나서 위력을 행사했거나 피해자가 여기에 제압을 당했다는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대표적으로 미투 운동이 시작된 시점에 이뤄진 한 차례 간음 혐의를 두고 “(김씨는) 사회적 가치에 반한다고 말하거나 오피스텔 문을 열고 나가는 등 최소한의 회피나 저항을 할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았다”고 했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해명이 객관적 증거에 비춰 납득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고도 밝혔다. ‘피해자 트라우마’나 ‘수치심’ 등 “피해자 진술 증명력을 판단할 때 ‘성인지 감수성’을 고려했다”면서도 “피해자는 개인의 취약성 때문에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날 재판부는 “사회에서 사용하는 성폭력 개념과 형사법의 성폭력 범죄 개념이 일치하지 않는다”며 “기존 처벌 규정이 사회 변화에 부응하지 못하고 행위와 책임 사이 불합리한 괴리가 발생한다는 비판도 있다”고 수긍했다. 그러면서도 “형사법적 책임은 죄형법정주의 아래 엄격히 규정해야 할 책임”이라고 밝혔다.

앞서 안 전 지사는 자신의 수행비서였던 전 충남도 정무비서 김지은 씨를 상대로 지난해 7월 29일부터 올해 2월 25일까지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4회,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1회, 강제추행 5회를 저지른 혐의로 지난 4월 불구속 기소됐다.

이번 사건은 ‘위력에 의한 간음’(형법 제303조,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10조)이 핵심이었다. 법률상 존재했지만 현실적으로 적용되지 않던 죄목이었다.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죄에는 5년 이하 징역 또는 15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선고한다.

앞서 검찰은 안 전 지사에게 징역 4년형을 구형했다. 검찰은 “안 전 지사가 광역자치단체장이나 차기 유력 대선후보로서 우월적 지위를 지녔으며, 피해자 김씨는 안 전 지사에 의해 임명권이 좌지우지되는 위치였다”고 주장해왔다.

안 전 지사측 변호인단은 “위력이란 정신적·물리적 측면으로 힘이 있어야 하고, 피해자의 성적 결정권을 침해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대법원(2005.7.29 선고)은 위력에 대해 “피해자의 성적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세력으로서 유형적이든 무형적이든 묻지 않으며 폭행·협박뿐 아니라 행위자의 사회적·경제적·정치적인 지위나 권세를 이용하는 것”이라 판시했다.

피해자 측 “위력 축소 해석, 피해자 측 증거 배척… 법 뒤에 숨었다”

여성·인권운동단체들은 즉각 기자회견을 열고 재판부를 향해 “법 체계 뒤에 숨어 면피했다”고 규탄했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현행 법 체계상 엄격한 해석이 필요하다’고 밝힌 재판부에 “위력이 무엇인지, 성적자기결정권 침해는 어떻게 이뤄지는지 구체적 현실에서 판단하는 건 사법부의 몫인데 입법체계로 자신의 책임을 미뤘다”고 밝혔다.

이들은 재판부가 위력 개념을 자의적으로 축소 해석했다고 비판했다. 여성단체들은 “성폭력이 일어난 그 때 공간에서의 유형력 행사에만 초점을 맞춘 좁은 해석과 판단은 강간에 대해 성적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상황을 두루 살피는 최근 대법원 판례의 흐름 조차 따라가지 못했다”며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제재하겠다는 입법취지는 무색해지고 법조항은 다시 사문화됐다”고 밝혔다.

법원은 피해자 진술을 믿을 수 없다고 결론냈다. 정혜선 변호사는 “검사도 피해자 말을 무턱대고 믿은 게 아니다. 피해자는 ‘합의 성관계’를 반박하기 위해 자료찾기 위해 노력했고 개인폰까지 검찰에 제출했다”며 “피해자는 16시간 심문을 견디며 피해사실을 일관되게 진술했다. 법원은 관련 증거를 쉽게 배척했다. 이번 판결 변호인으로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사회적 의미와 무게감에 대한 고민 없다”는 비판도 나왔다. 한국여성민우회의 정하경수 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지난 1월29일 검찰 내 성폭력 사건 폭로 이후 미투운동이 촉발됐고 지난해 같은 시기 대비 상담횟수가 40% 증가했다”며 “피해자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수십년전 피해를 말하고 싶다. 하지만 믿어줄 것인가. 성폭력에 대해 말하기가 두렵다’고 말해왔다”고 말했다.

피해자 김지은씨는 입장문을 통해 “내가 굳건히 살고 살아 안희정의 범죄 행위를 법적으로 증명하겠다”고 밝혔다. 김씨는 “재판정에서 피해자다움과 정조를 말할 때 결과는 이미 예견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며 “권력자의 권력형 성폭력이 법에 의해 정당하게 심판 받을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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