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차원에서 왜 불만이 없었겠나. KBS가 참여정부 시절 비판 보도를 많이 해서 지지자들이 ‘KBS가 참여정부의 신뢰를 무너뜨렸다’는 항의도 많이 했는데. 그러나 전화는 없었다.”

정연주 전 KBS 사장은 지난 2016년 6월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이처럼 말했다. 자신의 임기 동안 노무현 대통령이 KBS 사장에 전화를 걸어온 적이 없었다는 증언이다. 생전 노 대통령은 재임 시절 검찰총장과 KBS 사장에는 전화 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때때로 언론과 각을 세우곤 했지만 그는 언론 자유의 의미를 이해하는 대통령이었다.

MBC 사장을 지낸 최문순 강원도지사도 6·13 지방선거를 앞둔 지난 5월 인터넷 언론 ‘ㅍㅍㅅㅅ’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언론에 일종의 결벽증이 있었다. 제가 사장으로 재임한 2005년 2월부터 2008년까지 전화 한 통화 없었다. DJ 정부도 대통령께서 직접 하신 건 없지만 그래도 여러 정치인이 항의는 많이 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그조차도 없었다.” 전직 공영방송 사장들 증언은 이렇게 일치한다.

‘리틀 노무현’. 한때 언론은 이재명 경기도지사를 노무현 대통령에 빗댔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그 뒤 자수성가한 삶, 기득권에 대한 저항과 화려한 언변 등 두 사람은 얼핏 보면 닮은 구석이 많다. 그러나 언론 대응에선 차이점이 뚜렷하다.

지난 21일 SBS 시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는 이 지사가 성남 지역 최대 폭력 조직 ‘국제마피아파’에 연루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 방송 전 이 지사는 본부장, 책임 프로듀서(CP) 등 SBS 핵심 관계자들(사내에서는 박정훈 SBS 사장에도 이 지사가 전화했다는 증언이 여럿 나온다)에게 연락을 돌렸다. 사실 관계를 제대로 보도해달라는 취지로 전해졌다. 

이 사실은 이 지사가 방송에서 담당 PD에 “우리 PD님에게 미안한데 ‘위쪽’에 전화를 해 죄송하다”고 발언해 알려졌고 이 행위는 본인 스스로 “원래 제가 그런 건 안 하는 사람”이라고 할 만큼 부적절 행위로 평가됐다. 

박정훈 SBS 사장, 남상문 시사교양본부장, 김기슭 CP 모두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이력을 쌓은 베테랑들. 이들을 상대로 한 이 지사의 ‘위쪽’ 전화는 효과가 없었다.

▲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성남시장이던 지난해 1월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TV조선은 반드시 폐간시킬 것”이라며 TV조선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가 TV조선 보도를 반박하고 있는 모습.(사진=김도연 기자)
▲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성남시장이던 지난해 1월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TV조선은 반드시 폐간시킬 것”이라며 TV조선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가 TV조선 보도를 반박하고 있는 모습.(사진=김도연 기자)
이 지사 측은 진행자인 배우 김상중씨 쪽에도 전화했다. 전화를 받은 김상중씨 측 매니지먼트 관계자는 이 사실을 배우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혹여 배우가 위축될까봐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종합해보면 세월호 참사 당시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이 김시곤 KBS 보도국장에 고압적 전화를 걸어 보도 축소를 압박했던 것과 양상이 많이 다르지만 방송사 경영진으로 향하는 정치인 전화엔 뒷말이 나온다.

김형민 SBS CNBC PD는 2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재명 지사의 방송상 큰 패착은 SBS의 ‘위에’ 전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걸 PD에게 얘기한 일”이라며 “가장 저열한 방식의 압력인데 불행한 건 별로 안 통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걸 잘 통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 지사도 나름 산전수전 겪은 분인데 그럴 줄은 몰랐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탐사 보도에 정치인이 대응하는 방법 중 하나는 ‘대면 인터뷰’에 적극 임해 방송에서 자신의 분량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다. 당당해야 유권자들과 지지자들 의심을 덜 수 있다. 언론을 피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이에 비춰보면 이 지사의 언론 대응은 이번에도 실패에 가깝다.

이 지사 언론관은 줄곧 논란을 불렀다. 6·13 지방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뒤 불편한 질문이 나오자 인이어를 빼며 MBC 인터뷰를 중단한 일이 대표적이다. 또 지난해 1월 TV조선을 향해선 기자회견까지 열어 “TV조선은 반드시 폐간시킬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지자들은 시원함을 느낄지 모르지만 유력 정치인이 스스로 ‘언론사 폐간’을 입 밖으로 꺼내는 건 무모하다. 언론 자유를 보장하는 나라에서 언론사 폐간은 어려운 일이다.

경기도지사직 인수위원회 수석대변인을 맡았던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6월 KBS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 ‘저널리즘 토크쇼J’에 출연해 “이재명은 ‘제도 언론은 풀 스토리를 보도하기보다 편집을 한다’는 피해의식을 분명 갖고 있다”며 “이제는 경기도지사에 당선됐기 때문에 과거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모든 미디어를 국민으로 생각하고 제대로 섬기는 모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기자도 지난 6월 기사에서 “체급이 올라간 만큼 이 지사 언론관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쓴 바 있다. 그가 더 큰 정치를 꿈꾼다면 비판 언론에 보다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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