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DOC의 ‘수취인분명’을 둘러싼 논란은 일주일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 조금씩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있다. 지금이 워낙 숨 가쁜 투쟁의 시기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논란은 지금의 박근혜 퇴진 투쟁이 과연 여성과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가의 문제와 연결돼 있고, 그 점에서 여전히 되짚어볼 여러 측면이 존재한다. ‘해일이 닥치는 데 조개를 줍느냐’는 시선을 거슬러 이 문제를 끄집어낼 필요는 여기에 있다.

나도 전에 DJ DOC를 좋아했었다. ‘생각없는 날라리 양아치’ ‘돈벌이 기획성 아이돌’ 취급받던 그들이 사회와 경찰 비판 노래들을 발표할 때 기억이 난다. 그 노래들은 그 시절의 나에게 꽤 위로와 용기를 주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번 DJ DOC의 노래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의식적이고 심각한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미스’와 ‘세뇨리타’는 유럽연합에서도 성차별적이라며 사용을 금지한 용어이고, ‘하도 찔러대서 얼굴이 빵빵’, ‘생긴 건 꼭 일수’ 등은 여성의 성형 중독을 비웃거나 외모를 비하하는 뜻으로 들리는 게 분명하다.

‘미스’가 아니라 ‘미스테이크’를 말한 것이라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이 부분은 알려졌듯이 문제제기가 나오자 나중에 바꾼 것이고, 그것도 여전히 ‘미스’라고 부르면서 뮤직비디오 자막에서만 그렇게 해놓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미스테이크’가 아니라 ‘미스(테이크)’라고 함으로써 두 가지 해석을 다 가능하게 했다.

외모를 문제삼는 것은 일반적으로 별로이지만, 남성과 여성의 차이도 간과되기 어렵다. ‘쥐명박’과 ‘닭그네’도 동등하게 문제가 되진 않는다. 왜냐하면 외모로 평가받고 상처받는 것은 이 사회에서 압도적으로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별·혐오적 표현없이는 풍자와 해학이 가능하지 않다면 상상력의 부족을 탓할 수밖에 없다. 다수가 문제없다며 재밌어한다는 것도 변명이 되긴 힘들다. 원래 차별은 소수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DOC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도 옹호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여성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변명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관적 의도가 아니라 객관적 결과이다.

‘박근혜 혐오’이지 여성혐오가 아니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그런 식이면 지배자를 공격할 때 어떤 소수자 차별·혐오 표현도 가능할 것이다. 더구나 문제제기한 사람들이 걱정한 것은 그런 표현으로 박근혜가 아니라 피억압자들이 받을 마음의 상처라는 게 분명하다.

결과적으로 이 노래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 수 있고, 특히 예술이나 대중문화는 각자 다르게 해석할 수 있으니 특정 해석을 고집하지 말자’는 일부의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다양한 해석과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존중하며 토론하는 것이 나름의 분명한 가치 판단을 흐리는 것이 될 수는 없다.

▲ DJDOC     ⓒwikipedia


예컨대 ‘선 자리가 달라지면 풍경이 달라진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이것은 각자가 서로 다른 자리에서 본 풍경이 다 타당하지 어느 하나가 옳은 게 아니란 말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우리는 거기서 가장 약하고 아픈 처지에 있는 사람의 자리에서 보려고 해야 한다. 그럴 때 강하고 힘 있는 자리에서 못 보던 많은 풍경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DOC의 이번 노래를 우리가 어떤 사람의 자리에서 들어야할지 분명해 진다. 중식이밴드의 ‘야동을 보다가’ 논란 때 내가 느낀 것이 이것이다. 나는 처음에 그 노래가 매우 신선하며, 심지어 독특한 예술적 성취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논란이 벌어지고, 많은 반박을 접하고 나서, 다시 내가 ‘리벤지포르노에 고통받는 여성’이라고 생각하며 그 노래를 다시 들어 보았다. 그러면서 느낀 소름끼치는 기분은 아직도 남아있다.

DOC 노래도 마찬가지다. 직장에서 ‘미스 박’이라고 무시와 하대 당하던 여성이 광장에 나와서 그 노래를 듣는다고 상상해보자. 외모에 대한 스트레스로 성형 수술을 하고, 그것이 또 콤플렉스가 된 여성이 광장에 나와서 “하도 찔러대서 얼굴이 빵빵” 가사를 듣는다고 생각해 보자. 해석은 다양할 수 있지만 우리는 특정 해석을 편들어야 할 때가 있다.

따라서 여성 단체들의 문제제기는 정당했고, 공연이 임박하고 광고도 대대적으로 된 상황에서도 주최측이 그것을 전격적으로 수용한 것도 잘한 것이다.(다만 취소 과정과 이유를 설명해줬다면 이후 논란이 덜 커지지 않았을까 아쉬움은 있다.) 이것이 DJ DOC가 박근혜 정권을 비판하고 풍자하려던 의도 자체를 무시하거나 말살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현실에서는 다양한 억압과 모순이 교차해 있고 어느 하나만 강조하거나 어느 하나도 간과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예컨대 미국 경찰의 흑인에 대한 총기살해를 강력 규탄한 유명한 흑인가수의 뮤직비디오에서 성차별적 코드를 보면 실망스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별로 큰 문제도 아닌 걸 꼬투리 잡아서, 용기를 내서 권력에 맞서는 가수에게 너무 심하다’는 식으로 DJ DOC를 옹호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이것은 강자에 대한 비판의 자유를 검열하려는 것이 아니고, ‘박근혜 공격에도 부족한 시기에 뭣이 중한지 모르고 운동을 분열시키는’ 것도 아니다. 약자가 상처받지 않고 이 운동 속에서 편안함을 느낄 때, 그것은 더욱 강력하고 단결된 운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서 DJ DOC에 대해 너그러운 태도도 동의하기 어렵다. 앞서 말했듯이 DOC에 대해서도 평가하고 사줄 측면이 존재한다. 그러나 여성 문제에서는 DOC에 대해서 반성과 성찰을 권할 측면이 더 많다.

이번 노래 가사만이 아니라 DOC는 과거에도 가요계의 한 여성그룹에게 씻기 힘든 상처를 준 바 있다. 요즘에도 DOC 멤버중 한 명은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가 심각하게 넘쳐나는 케이블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아무런 문제의식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번에 DOC에 공연에 대해 여성주의 활동가들이 반발했던 것도 단지 이번 노래만이 아니라 그런 맥락과 배경이 있었다. 그런데 관련된 많은 논의 과정에서(특히 DOC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일수록) 다소 아쉽게도 이 부분을 간과하는 측면이 있어 보인다.

DOC의 재능과 긍정적 측면을 살리길 원하는 사람일수록 이런 문제에 대해 따끔하고 쓰디쓴 고언을 해야 한다. 나도 DOC의 몇몇 노래와 추억들을 여전히 좋게 간직하고 있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는 DOC가 반성과 성찰을 통해 거듭나고 신뢰를 회복하려 노력하는 게 먼저 필요한 일이라고 본다.

마지막으로 이런 문제에서 균형있는 태도가 무엇일까에 대해 말하고 싶다. 어떤 사람들은 이번 논란에서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기 보다는 감정적 비난을 하는 태도가 서로에게서 나타났다고 지적한다. 감정적으로 대립하기보다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소통해야 함께 답을 찾을 수 있을텐데 양쪽 모두 문제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DOC 논란 과정에서 현실에서 벌어진 일은 단지 양쪽 모두 귀를 막고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는 그림이 아니었다. 내가 먼저 목격한 것은 문제제기를 한 여성단체들과 DOC 공연을 취소시킨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의 페북과 홈페이지를 뒤덮은 차마 보기 괴로운 심각한 공격들이었다.

‘박그네같은 것들’, ‘메갈년들’, ‘꼴페미’, ‘페미나치’, ‘미친년들’. ‘그거 따질때냐’, ‘뒤져라’, ‘지랄하네’, ‘염병하네’ ... 지난 메갈리안 티셔츠 논란 때의 ‘메갈몰이’를 일부 떠올리게 하는 이 상황 자체가 한국 사회의 여성 차별과 혐오를 증거하고 있었다.

일부 여성주의 활동가들에게서 겉보기에 다소 과하고 감정적으로 보이는 반발이 나온 것은 바로 이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개별 사례까지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전체적 그림은 이런 것이었다. 이런 맥락은 못 본 채 감정적 반작용부터 본 일부 사람들은 ‘DOC 노래를 좋게 보고 공연 취소를 아쉬워하는 나 같은 사람은 다 여혐론자인 거냐’고 오해하고 불쾌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름의 이견을 제기했다가 ‘여혐이 뭔지도 모르는 한심한 멍청이’ 취급받은 사람들은 서운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해는 오해다. 정말 진지하게 우호적으로 DOC 노래가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며 의문과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매도와 비난을 하는 경우는 찾기가 쉽지 않다. 설사 특정 개인이 그런 성마른 태도를 보였더라도 그것이 마치 여성주의 진영 전체의 프레임과 태도인 것처럼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더구나 우리는 ‘비명이 너무 크고 날카롭다’고 하기보단 왜 비명을 지르는지 봐야 한다. 먼저 예민하게 나서는 사람들 덕에 우리는 배울 수 있었고 기준은 높아져 왔다. 예컨대 ‘민중의례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일률적 요구가 장애인에게 상처일 수 있다는 것을 누구 덕에 배울 수 있었던가.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서 있는 사회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오랜동안 차별과 혐오에 고통받아 온 사람들이 있다. 이것을 대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직접 겪어왔거나 누구보다 잘 알기에 매우 민감하고 아무리 작은 가시라도 바로 빼고 싶어 한다.

상대적으로 차별과 혐오에 덜 직면해 왔거나 그 고통을 간접적으로 겪어 온 사람들은 아무래도 덜 민감할 수 있다. 또, 다른 가치들이 다 같이 중요한 게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잘못도 탓도 아니지만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양쪽 모두에게 ‘상대를 이해하고 소통하려고 하라’고 하기 보다는, 기울어진 운동장의 위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더 강조해서 말해야 한다. 고통과 상처를 호소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까칠함을 이해하고 먼저 손을 내밀자고 말이다.

아직도 한국 사회는 이 문제에서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여혐 딱지가 무서워 말도 함부로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진실은 ‘까칠하다’는 말을 들을까봐 눈치보며 불편함을 삼키는 여성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왜 200만이 촛불에 나오는데도 ‘여성들에겐 촛불시위에 나가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글이 일부 여성들 사이에서 공감을 얻겠는가. ‘왜 촛불 이후의 사회에서 여성들이 설 자리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제기되겠는가? 그런 생각과 의문에 동의하기 어렵고, 그것을 고쳐먹으라고 말하고 싶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 불신은 먼저 공감하고 손을 내미는 실천적 연대 속에서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200만 촛불이 여성과 소수자들의 목소리에 매우 민감하다는 것, 그것을 중심에 두고 박근혜 이후 사회에 대한 꿈을 그려갈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것이 먼저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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