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통신심의위원회 간부가 위원장과 부위원장의 지시를 받고 제3자 명의를 동원해 민원을 넣는 방식으로 ‘청부심의’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방통심의위는 담당 팀장 ‘파면’을 결정하고 관련 사안을 검찰에 수사 의뢰할 계획이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사무처는 19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김아무개 전 팀장에 대한 업무감사 결과 2011년부터 2017년까지 46건의 방송 관련 민원을 제3자 명의를 통해 대리 작성한 것으로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이 가운데 33건(법정제재 19건, 행정지도 14건)에 대해 실제로 제재가 내려졌다.

김 전 팀장이 작성한 것으로 드러난 민원 가운데는 정치권에서 논란이 된 사안이 적지 않다. 즉, 정치권에서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정부여당 추천 위원인 위원장과 부위원장에게 협조를 요청하면 방통심의위가 ‘대리 민원’을 넣어 심의를 진행했을 가능성을 드러낸다.  

▲ 민경중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사무총장이 19일 방송회관에서 긴급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 민경중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사무총장이 19일 방송회관에서 긴급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김 전 팀장은 2015년 3월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 ‘뿌리깊은 미래’에 대해 “역사왜곡 다큐 심의 요청”이라는 이름으로 2건의 민원을 넣었다. ‘뿌리깊은 미래’는 한국전쟁을 다룬 다큐멘터리로 당시 자유한국당과 KBS 여권 이사들이 이념적으로 편향됐다고 주장했던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방송사 재허가·재승인 때 감점이 되는 ‘법정제재’인 경고를 받았다.

김 전 팀장은 2016년 7월 JTBC 뉴스룸이 사드배치와 관련한 외신보도를 오역한 데 대해 민원을 넣었고 ‘법정제재’인 경고를 받았다. 당시 보수진영은 JTBC의 오역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한 바 있다.

또한 2013년 5월 국산 헬기 수리온 실전 배치 기념식에 참석한 박근혜 당시 대통령 소식을 다룬 MBC ‘뉴스데스크’의 보도도 ‘대리 민원’을 통해 ‘법정제재’인 관계자 징계 및 경고를 받았다. 박근혜 대통령과 북한 인공기를 나란히 배치한 사진을 뉴스 화면으로 노출했다는 점에서 정치권에서 논란이 된 사안이다.

김 전 팀장은 방송 프로그램 방영 후 1년이 지난 2016년 10월 JTBC ‘김제동의 톡투유’에  민원을 넣기도 했다. 김제동씨가 방송에서 “군장성 배우자 호칭을 잘못 불러 영창에 갔다왔다”고 발언한 데 대해 뒤늦게 진위 논란이 불거졌고 국방부, 자유한국당 등이 문제를 제기하고 보수단체가 김제동씨를 고발했던 사안이다.

이 외에도 김 전 팀장은 2015년 3월30일에는 JTBC 뉴스아침에서 ‘대통령 폄하 방송 심의 요청’이라는 이름의 민원을 넣은 것을 포함해 JTBC 뉴스 프로그램에 대한 대리 민원만 8건 작성했다.

방통심의위 사무처는 심의안건 상정은 모니터, 민원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함에도 편법으로 안건을 상정한 ‘청부심의’라고 판단했다. 방통심의위 사무처는 “차명으로 민원을 접수시키고 담당자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안건을 상정할 경우 주민등록법 위반, 업무방해, 문서위조 등의 불법행위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방통심의위는 담당자에게 ‘파면’을 결정한 것과 관련해 △민원인이 아님에도 허위로 민원을 신청한 점 △방송심의 담당자가 이를 알지 못하고 심의가 이뤄져 절차의 공정성 및 객관성 등 신뢰를 저하시킨 점 △위원회 심의업무를 중대하게 방해하는 행위로 판단되는 점 △행위가 수년에 걸쳐 반복된 점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했다는 입장이다.

방통심의위 사무처에 따르면 김 전 팀장은 전 위원장, 전 부위원장, 전전 부위원장의 지시를 받아 친인척 등의 명의를 빌려 민원을 신청했다고 진술했다. 이들은 모두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정부여당 추천 위원들이다.

민경중 방통심의위 사무총장은 “방통심의위는 방송의 공정성과 공공성을 유지하도록 제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며 “이번 사건에 대한 조사결과 발표와 검찰수사 의뢰는 그동안 방통심의위가 정치심의, 편파심의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 걸음”이라고 강조했다.

▲ 민경중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사무총장이 19일 방송회관에서 긴급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 민경중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사무총장이 19일 방송회관에서 긴급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이번 조사는 그동안 정황이 드러난 청와대와 국정원의 심의 개입 의혹에 대한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김 전 팀장은 2015년 JTBC가 보도한 청와대 사찰문건에도 등장하는데 문건에 따르면 방통심의위 사무처가 청와대, 국정원 등으로부터 요청을 받고 대리 민원을 넣은 정황도 있다.

이와 관련 민경중 사무총장은 “조사 과정에서 청와대 사찰문건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징계사항에 포함되지 않아 밝히는 게 적절하지 않지만 수사를 의뢰할 경우 검찰에 관련 자료를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아무개 전 팀장은 19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정치적인 사안이 민원 없이 사무처 자체 모니터링으로 상정되면, 안건 상정 자체를 두고 위원들간 논박이 이어지거나 사무처에 불똥이 튀는 경우가 많다”면서 “회의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제3자 이름으로 민원을 넣으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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