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씨가 민주주의와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면 시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나의 가정이지만 아마 코웃음을 칠 것이다. 광주시민을 학살하며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당사자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군사쿠데타의 정당성을 지금까지 항변하고 있다.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행위에 대해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다. 최근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전두환 회고록’까지 출간, 5·18 기념재단과 5월 단체들이 출판 및 배포금지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제기하기도 했다. 전두환씨와 인권·민주주의는 절대 어울릴 수 없는 단어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 이런 식의 ‘비상식적 상황들’이 정치권과 언론계에서 실제 벌어지고 있다. 좀 거칠게 말하면 전두환씨가 ‘민주주의와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얘기다. 적반하장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자유한국당 방송장악저지 투쟁위원회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가 방송장악을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하고 있다”며 고대영 KBS사장과 김장겸 MBC사장 사수 방침을 선언했다. 이명박근혜 정권 9년 동안 방송장악과 언론자유 침해를 일삼으며 한국 언론을 후퇴시킨 당사자들이 누구였던가. 자유한국당과 그 전신인 새누리당·한나라당 아니었던가.
KBS와 MBC 경영진의 행태도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KBS 양대 노조와 10개 협회가 최근 공동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88%가 고대영 사장 퇴진, 90%가 이인호 KBS이사장 퇴진을 요구했다. KBS 구성원들은 ‘방송의 공정성과 공익성 하락’을 퇴진의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어이없는 건 KBS 경영진의 반응이다. 이들은 12일 공식입장을 내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장이 바뀐다면 방송법에서 정한 3년 임기는 무의미한 것이며, KBS를 권력으로부터 독립시킬 수 있는 근간이 무력화 된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는 존중받아야 하지만 이명박근혜 정권 하에서 방송의 공정성과 공영방송 자율성을 후퇴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당사자들이 내놓을 입장은 아닌 것 같다. 2008년 당시 정연주 KBS사장이 경찰력까지 동원한 정권의 부당한 압력으로 ‘강제퇴진’ 당했을 때 현재 KBS 경영진은 어떤 태도를 보였나. 자유한국당이 ‘언론자유’를 말하는 것만큼 KBS 경영진이 ‘KBS 독립’을 강조하는 게 염치없는 행동이라 여기는 이유다.
MBC 역시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MBC는 최근 메인뉴스에서 “여당 고위 당직자가 공영방송 사장 사퇴를 직접 압박하고 나섰다”며 정부여당을 맹비난했다. 해당 리포트엔 ‘방송장악의도’라는 단어까지 등장했다. “정권교체 한 달 만에 공영방송사 경영진 교체를 압박하고 나선 것은 언론 통폐합을 앞세워 언론을 장악했던 5공 군사정권과 닮았다는 지적까지 나온다”며 문재인 정부를 향해 날을 세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