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대통령이 피의자 신분에서도 물러나지 않은 일은 초유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대통령의 편이었다. 박근혜 탄핵 소추안 통과(2016년 12월9일) 이후 60일이 지났다.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의 탄핵사유를 놓고 공방이 오가는 가운데 태극기 집회세력이 탄핵 반대를 외치며 세를 결집했다. 탄핵에 대한 판단은 결국 헌법재판관이라는 ‘인간’이 결정한다는 점에서 변론이 길어질수록 ‘결과의 불확실성’이 모두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론은 흔들렸다.
주류언론의 분위기는 두 달 전 탄핵 국면과 사뭇 다르다. 촛불집회의 의미를 축소하고 관제데모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태극기집회를 상대적으로 부각시키며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이라는 사태의 본질에서 비켜나려는 모양새다. 조선일보는 지난 11일자 사설에서 “정치권과 각종 단체가 경쟁적으로 탄핵 찬반 시위에 군중을 동원하려는 분위기가 일고 있다. 마치 집회에 누가 더 많이 나오느냐로 탄핵 여부가 결정된다는 분위기”라며 양비론을 펼쳤다.
박근혜 측에서 헌재 결정 지연을 위한 전략으로 내놓은 ‘고영태 녹음파일’도 대다수 방송사가 박근혜측 프레임에 호응하고 있다. 일례로 TV조선은 지난 10일 “탄핵심판과 관련해 청와대가 상당히 분위기가 좋아졌다”며 “박 대통령 측은 원로 법조인들이 탄핵반대 광고를 낸 데 대해 법리 싸움도 해볼 만하다고 했다. 고영태가 K스포츠재단을 장악하려 했다는 의혹이 담긴 녹취록에도 주목하고 있다”며 청와대 입장을 무비판적으로 전달했다.
공영방송의 경우 어김없이 국정농단 의제를 축소 또는 왜곡하고 있다.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는 지난 8일 자사 보도 모니터보고서를 내고 “KBS의 최순실 국정농단과 박 대통령 탄핵 관련 뉴스가 SBS의 절반 수준, JTBC의 3분의1에도 못 미칠 정도로 축소됐다”고 지적했다. 1월1일부터 5일까지 메인뉴스 전체 리포트 대비 국정농단 및 탄핵관련 리포트 비율이 KBS는 17.8%였으나 SBS는 37.1%, JTBC는 60.4%였다는 것이다. KBS본부는 이를 두고 “박근혜와 국정농단 일당을 비호하기 위한 것”이라 비판했다.
김언경 민언련 사무처장은 “MBC의 경우 태블릿PC조작 주장이나 고영태 녹음파일을 타사보다 빨리 집중보도하며 대통령 대변인 측의 주된 언론플레이 창구역할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와 관련 MBC기자·PD등은 매일 본사 로비에서 “MBC는 청와대방송을 중단하라”는 피켓팅을 진행하고 있다.
민유기 경희대 사학과 교수는 “극우세력은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나도 대통령이 당장 구속되고 법정에 서는 것을 막기 위한 압박차원에서 세를 과시하고 있다. 작년 12월 같은 분위기라면 당연히 대통령의 형사소추면제권이 없어지는 순간 체포해야 하지만, 지금처럼 대규모의 태극기를 통해 이들은 탄핵이 인용된 이후의 상황을 대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하경 중앙일보 주필은 2016년 12월13일자 칼럼 ‘시민혁명 원년, 박정희와 결별하자’에서 “55년 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축조한 획일적 국가주의의 앙시앵 레짐(구체제)은 현재진행형”이라고 지적하며 “촛불혁명은 앙시앵 레짐에 의해 훼손된 정의와 시민적 가치의 지체 없는 회복을 명령하고 있다”고 밝혔다. 태극기집회에 흔들린 언론이 ‘촛불혁명의 명령’에 얼마나 응답하고 있는지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