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베트남에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 지난 11일 베트남전 한국군 파병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이 말했다고 전해진 이 발언으로 다시 베트남 민간인학살 문제가 수면위로 떠올랐다.

파병 당시 대중잡지를 분석한 연구 “대중매체에 표상된 베트남전쟁과 젠더 이데올로기-1964~1973년 ‘선데이서울’, ‘여원’을 중심으로”(이진선, 2017년)에 따르면 당시 미디어는 베트남여성 뿐 아니라 한국여성도 한국 군인을 위로하기 위한 수단으로 동원했다.

논문은 대중잡지 ‘선데이서울’과 ‘여원’을 베트남파병이 이뤄진 기간인 1964년부터 1973년까지 분석했다. ‘베트콩’(공산진영)을 상대로 싸우는 한국군, 한국여성의 지원을 받는 한국군, 실제론 폭력도 당했지만 한국군을 ‘위로’하는 베트남여성, 한국군의 전유물이 된 베트남민중 등이 미디어에 등장했다. 정부는 반공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가부장제와 군사주의 등을 적절히 활용했고 미디어는 이를 확산시켰다.

한국군 파병은 공산주의로부터 폐허가 된 베트남민중을 구하기 위한 과정으로 이미지화했다. 자연스럽게 ‘구원자’가 벌인 학살은 미디어에서 사라졌다. “맨주먹으로 2명의 적을 생포한 장하사”(1967년 11월호 여원), “울려고 내가 왔나 싸우려고 내가 왔지, 낯선 월남 땅의 청룡소총수”(1969년 8월31일자 선데이서울) 등은 베트콩을 때려잡는 군인의 용맹함을 강조했다.

▲ 베트남파병 당시 포스터. 박정희 정부는 '타도하자 베트콩', '평화의 십자군' 등의 포스터를 통해 베트남전 참전을 독려했다.
▲ 베트남파병 당시 포스터. 박정희 정부는 '타도하자 베트콩', '평화의 십자군' 등의 포스터를 통해 베트남전 참전을 독려했다.

또한 “청룡포병대대 용사들은 푸옥 록 마을에 아담한 팔각정을 지어 주고 60세 이상의 노인 58명을 초대하여 인삼주 맥주, 그리고 아리랑 담배로 경로회를 베풀어 주었다”(1966년 9월호 여원)처럼 시혜를 베푸는 모습도 등장했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이 한국에 행했던 일과 흡사하다고 저자는 지적했다.

한국 여성은 한국군을 돕는 역할로 묘사된다. 주로 ‘현모양처’, 군인들을 위로해주는 어머니의 따뜻함, 남편·아빠가 없는 가정에서 여성의 어려움 등을 강조하며 후방에서 전장을 돕는 국민의 역할을 담당하는 모습으로 비춰졌다. 모성은 근대의 발명품이라고 알려졌지만 전쟁이나 징병제가 유지되는 현 한국 상황에선 예외였다. 

실제 베트남전쟁 당시 탈영이 많았고, 가족들의 반발이 심했다. 국가가 가족들을 모아놓고 정신교육을 했다는 증언까지 있다. 국가와 미디어는 ‘현모’의 따뜻함으로 잔혹한 현실을 덮는다. ‘양처’로는 채명신 장군의 부인 문정인씨가 많이 등장했다. 문씨는 당시 이화여대에서 ‘홈커밍퀸’으로 뽑히는 등 ‘엘리트 여성’의 대표주자로 전쟁 당시 ‘내조의 롤모델’이 됐다고 해당 논문은 분석했다.

▲ 선데이서울 1969년 3월30일자. 베트남 위문공연을 간 한국 여성들의 모습
▲ 선데이서울 1969년 3월30일자. 베트남 위문공연을 간 한국 여성들의 모습

위문공연·위문편지 등은 역시 성애화한 형태로 군인을 위로했다. 선데이서울은 주 독자층이 남성이기 때문에 선정적인 이미지를 노출시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경향이 강했고, 여원은 주 독자층이 여성이기 때문에 ‘편지를 보내달라’는 요청이 주를 이뤘다는 차이도 있다. 

김활란 이화여대 초대총장이 일제강점기 제자들에게 위안부 참여를 독려하고, 한국전쟁 당시엔 학생들을 동원해 ‘파티대행업’에 나섰던 것은 베트남전 당시 이대에서 열린 파월가족위안의 밤 행사 등과 함께 국가가 바라는 여성의 역할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는 지적이다.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아무리 지독한 냄새가 난다고 할지라도 결국 닭고기보다도 소고기보다도 우리 병사들의 입맛을 끄는 것은 김치이고 고추이고 마늘입니다”(여원 1966년 9월호)와 같이 파월장병에게 씨앗 보내기 운동, 김치보내기 운동 등이 강조됐다. 저자는 “‘국민화’가 강해지고 ‘상상의 공동체’는 더욱 공고화된다”며 “그것을 비판하는 초월적이고 역사 외재적인 관점을 갖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전쟁국가-군인-한국여성’의 위계가 뚜렷해지면서 권력은 강한 동원력을 갖게 됐다. 이때 발산하는 에너지는 폭력이 아니라 스트레스에 대한 보상 정도로 여겨졌다. 다음은 1967년 7월호 여원에 실린 소설형식 기사의 한 부분이다. ‘꽁가이’는 베트남말로 여자, 소녀란 뜻으로 성차별적인 단어다.

“오늘 허길주 하사 분대는 베트콩 꽁가이 하나를 차고 와야 해”
“염려 마십시오. 입으로 꼭 깨물어 뜯어도 비린내도 나지 않는 싱싱한 처녀를 끌고 오겠습니다”

여성의 몸은 남성의 식민지였고, 베트남은 ‘한국 내부의 식민지’였다. 논문은 베트남전쟁 당시 미디어가 베트남여성은 베트콩의 악함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거나 한국군의 치어리더 역할로 활용되는 등 ‘성적인 동물’ 이하로 표현됐다고 지적했다. 열등한 베트남여성이 한국 남성과의 결혼을 통해 문명화되는 판타지도 드러난다.

▲ 여원 1967년 2월호. 월남의 신부
▲ 여원 1967년 2월호. 월남의 신부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벌인 수많은 성폭행과 양민학살은 이런 토대에서 발생했다. 한국군은 80여건에 걸쳐 약 9000명의 민간인들을 집단학살했다. 베트남엔 3기의 한국군 증오비와 50여기의 위령탑이 서있다. 한국사회는 이를 은폐하는 쪽에 가까웠다. 베트남전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전쟁특수’를 누린 사건 수준에서 달라지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등에 공식 사과하지 않았다. 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문명금·김옥주씨가 생전 모은 돈을 베트남전쟁 진실위원회에 기증했는지를 고민해보면 한국군이 벌인 만행을 정치인의 말로 넘어갈 문제는 아니다. 한국 정부가 나서서 비용과 노력을 들여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고 가해 주체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동시에 그런 자세를 일본 정부에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이 언급한 “마음의 짐”에는 이런 것들이 포함됐을까. 한-베 평화재단은 지난 16일 “진정한 사과는 가해사실에 대한 인정과 책임이 전제돼야 한다”며 “문 대통령의 영상 ‘사과’가 형식적인 외교적 수사로 끝나지 않기를” 기대했다. 이어 “그 길에 언론의 바른 역할도 기대해 본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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