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아침, 과천정부청사에서 한국 정치사상 보기 드문 장면이 ‘연출’되었다. 주역은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15명, 느닷없이 ‘출연’을 강요당한 사람은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 위원장 이효성이었다. 방통위는 그날 오전 8시에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홍회(방문진)의 보궐이사 2명을 선임하려고 전체회의를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정우택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 위원장 신상진을 앞세우고 방통위 사무실에 들어선 의원들은 이효성을 향해 폭언과 막말을 퍼부었다. “이 정부의 꼭두각시로 행동을 하고, 그 진도를 나갔다고 규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보궐이사) 선임을 강행하면 공영방송 장악 실행 시도로 보고 강력하게 저항하겠다.”(정우택) “한국당에서 추천한 인사를 후임 보궐이사로 선출하겠다. 그 여부에 대한 확답을 듣고 싶어서 이 자리에 온 것이다.”(과방위 자유한국당 간사 박대출). 이효성이 “저를 꼭두각시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듣기 거북하다”고 항의하자 정우택은 그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뭐가 거북해요”라고 고함을 질렀다. 이효성은 대통령이 임명한 국무위원으로서 행정부에서 요직을 맡고 있는 공직자이다. 그런데 그가 ‘방송문화진흥법’에 따라 보궐이사 선임을 주관하려는 것을 회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입법부의 국회의원들이 저지하려고 한 행동은 3권분립 원칙에 명백히 어긋나는 것이었다.

자유한국당 방송장악저지투쟁특위와 함께 10월26일 오전 정부과천청사 방송통신위원회를 항의 방문한 정우택 원내대표(오른쪽)가 이효성 방통위원장과 면담에 앞서 인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유한국당 방송장악저지투쟁특위와 함께 10월26일 오전 정부과천청사 방송통신위원회를 항의 방문한 정우택 원내대표(오른쪽)가 이효성 방통위원장과 면담에 앞서 인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방통위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자유한국당의 과방위 소속 의원들은 국회로 돌아가 KBS와 EBS에 대한 국감을 정회시켰다. 방통위가 보궐이사 2명을 선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정우택은 긴급의원총회를 소집하고 “방통위가 벌인 방문진 보궐이사 선임은 날치기 폭거라고 규정한다”며 “이효성 위원장은 방통위원장이 아니라 방송장악위원장의 모습을 보였다”고 주장했다. 이튿날인 10월 27일 자유한국당은 국정감사 보이콧을 선언한 뒤 이효성 해임촉구결의안을 국회에 정식 안건으로 제출하고 보궐이사 2명에 대한 임명효력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냈다. 자유한국당의 보이콧 ‘덕분’에 ‘국정원 직원의 돈 200만원을 받고 특정 기사를 누락시켰다’는 의혹 등으로 국감장에서 대기하던 KBS 사장 고대영은 밝은 표정으로 국회를 떠났다.

27일 오전 국회 본관 앞 계단에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공영방송의 입에 재갈을 물리지 마라’는 펼침막을 앞세우고 집회를 하는 자리에서 정우택은 국정감사 전면 보이콧에 대해 “민주주의의 공기(公器)인 언론을 지키기 위한 우리의 의롭고 정의로운 투쟁”이라고 말했다. ‘의롭고 정의로운 투쟁’이라고? 누구를 위해, 어떤 언론을 지키려는 투쟁인가? 현재로서는 자유한국당과 그 지지자들을 위해 MBC가 재갈을 물지 않도록 지켜주겠다는 투쟁이라고밖에 달리 해석할 길이 없어 보인다.

여기서 지금 MBC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새삼 이야기하려니 구차스럽기 짝이 없다. 전국언론노조 MBC본부 조합원 2000여명은 지난 9월 4일부터 방문진 이사장 고영주와 사장 김장겸 퇴진을 요구하며 50일이 훌쩍 넘도록 총파업을 벌이고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9년 동안 ‘청와대 방송’ ‘권력의 앵무새’라는 비난을 받던 MBC는 총파업의 거센 폭풍 앞에서 TV도 라디오도 불구 상태에 빠져버렸다. 자유한국당이 국감 보이콧을 ‘의롭고 정의로운 투쟁’이라고 주장하려면 MBC노조가 총파업에 들어가기 전인 7월 19일 한 일간지에 낸 광고(‘고영주와 김장겸을 반드시 끌어내겠습니다!)’의 문안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 지난달 4일부로 파업 중인 KBS·MBC 언론인 1000여 명이 23일 한 자리에 모였다. 총파업 50일차를 맞아 전국언론노동조합 KBS·MBC본부 조합원들은 이날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공동집회를 열고 ‘공영방송 정상화’ 열망을 확인했다. 사진=이치열 미디어오늘 기자
▲ 지난달 4일부로 파업 중인 KBS·MBC 언론인 1000여 명이 23일 한 자리에 모였다. 총파업 50일차를 맞아 전국언론노동조합 KBS·MBC본부 조합원들은 이날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공동집회를 열고 ‘공영방송 정상화’ 열망을 확인했다. 사진=이치열 미디어오늘 기자
“한때는 사랑받았습니다. 뉴스, 시사, 드라마, 예능, 라디오 모두 최고의 방송사였습니다. 용감하게 고발하고 비판했습니다. 국민은 우리를 마봉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MBC를 파괴했습니다. 뉴스를 사유화하고, 저항하는 언론인을 학살했습니다. 해고 10명, 중징계 110명, 유배 157명, MBC는 지금도 겨울입니다. 언론자유를 위한 최후의 전쟁을 준비합니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95.4%가 그들의 퇴진을 요구했습니다. 반드시 승리해 MBC를 국민께 돌려드리겠습니다.”

자유한국당의 전신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9년 동안 집권당이었던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이다. 그 기간에 공영방송을 포함한 여러 언론 장악의 몸통이 이명박과 박근혜였다면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의 집행부뿐 아니라 많은 의원들은 ‘공범자들’이었다. 지난해 10월 말에 시작된 촛불집회는 평화적 혁명으로 발전하면서 마침내 ‘대통령 박근혜 파면’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현재 자유한국당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세력은 탄핵에 반대하던 의원들이다. 그런데 촛불집회 1주년인 10월 29일을 눈앞에 두고 자유한국당이 ‘언론자유 수호를 위한 투사’를 자처하고 있으니 웬만한 분별력을 가진 중학생도 웃을 일 아닌가?

전국언론노조 KBS 조합원 2000여명도 MBC본부와 같은 날 총파업을 시작한 뒤 ‘이사장 이인호와 사장 고대영 퇴진’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앞으로 구여권 추천이사 1명이 사퇴하면 이사회에서 힘의 중심이 구야권으로 넘어갈 것이 분명하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을 자유한국당은 ‘MBC 사수’에 실패하면 KBS로 칼끝을 돌릴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주권자들은 명분도 정당성도 없는 극우보수정당의 ‘언론자유 수호 투쟁’을 지지할 리가 만무하다. 그렇다면 자유한국당은 차라리 지금 국회 과방위에서 잠을 자고 있는 ‘언론장악방지법안’을 본회의에 상정해 통과시키자고 제안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지난해 7월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과 무소속 의원 162명은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뼈대로 하는 ‘방송법 개정안(세칭 언론장악방지법안)’을 공동발의했다. 정권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공영방송 이사와 사장 선임구조를 바꾸자는 이 법안은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의 끈질긴 반대로 과방위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KBS 이사회와 방문진 모두 여·야 추천이사 수를 7 대 6으로 하고, 사장은 ‘특별다수제’로 선출하자는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지금 야당이니 언론장악방지법이 제정되면 권력의 ‘언론자유 침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국정감사는 국회가 행정부를 비롯한 국가기관들의 업무를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잘못을 시정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이다. 국민의 대표인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부질없이 ‘MBC 사수’에 골몰하지 말고 하루라도 빨리 국회로 돌아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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