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대법원장 때 법원행정처가 청와대 요구로 원세훈 전 국정원장 2심 재판부의 의중을 파악해 청와대에 알려주려 한 정황이 담긴 문서가 공개됐다.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 등을 규명하기 위해 꾸려진 대법원 추가조사위원회(위원장 민중기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청와대의 관심 재판 진행 상황과 사법개혁을 요구하는 판사들의 동향 등을 사찰하고 선제대응책을 담은 문건을 찾았다고 22일 발표했다.

해당 발표로 실제 판사들의 뒷조사 사실이 밝혀지면서 ‘삼권분립을 훼손했다’는 주장을 넘어 형사처벌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가운데 일부 신문에서는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없다’ ‘인사상 불이익이 없었다’는 내용을 부각해 보도했다.

다음은 23일자 아침종합신문 1면 머리기사 제목이다.

경향신문 “양승태·청와대 ‘원세훈 재판’ 검은 결탁”
국민일보 “바람 앞 촛불 같은 남북대화 지켜주길”
동아일보 “폐-팔 이식수술 허용 유전자치료 규제 푼다”
국민일보 “규제혁신, 시도한 적 없는 혁명적 접근”
세계일보 “신제품·신기술 규제 족쇄 풀린다”
조선일보 “文정부도 ‘규제와의 전쟁’”
중앙일보 “‘자사고·외고 없어진대’ 대치동 집 찾는 마포맘”
한겨레 “양승태 대법, 청와대 요구로 원세훈 재판부 동향 보고”
한국일보 “미러클! 정현”


2012년 대선 개입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 2심 선고 전후 동향을 청와대에 보고한 사건은 사법부의 독립을 뒤흔든 위헌적 행각이라는 게 다수의 지적이다. 특히 대법원은 원 전 원장의 선거 개입 혐의를 유죄로 판단한 2심 판결 이후 우병우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 요구한 대로 사건 소부를 전원합의체로 넘겼다.

▲ 23일자 경향신문 만평
▲ 23일자 경향신문 만평

대법원 추가조사위가 밝힌 문건에 따르면 청와대는 판결 선고 전에 항소 기각을 기대하며 행정처에 전망을 문의했다. 행정처는 ‘우회적이고 간접적인 방법’으로 재판부 의중을 파악하려 했고, 재판 결과에 대해 ‘예측이 어려우며 행정처도 불안해하고 있다’며 부정적 결과를 예상했음을 전했다. 한겨레는 이에 대해 “1심 재판 때도 모종의 의사교환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추측했다.

2심에서 선거개입 유죄가 선고된 뒤 청와대의 요구는 더 강했다. 문건에 따르면 우병우 수석은 사법부에 큰 불안을 표하며 향후 결론에 여지가 있는 경우 상고심 절차를 조속히 진행하고 전원합의체에 회부해 줄 것을 희망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실제 우 전 수석 요구대로 소부를 거쳐 신속하게 전원합의체에 넘어갔고, 전원합의체는 국정원 트위터팀 직원의 파일 2개의 ‘증거능력’을 문제 삼으며 결과를 되돌렸다.

한겨레는 “대법원의 이런 대응은 양 대법원장이 추진하던 ‘상고법원’과 관련 있어 보인다”고 분석했다. 문건에는 ‘상고심 판단이 남았고 청와대의 국정 장악력이 떨어지고 있는 국면이니 발상을 전환하면 이제 대법원이 이니셔티브를 쥘 수도 있음’ ‘상고법원과 관련한 중요 고비를 넘길 수 있도록 추진 모색’ 등의 표현이 나온다.

법원행정처는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판사들을 사찰해 대응책까지 마련했다. 진보·보수 성향과 장애, 출산경험 유무 등을 기준으로 법관을 임의적으로 분류했고, 법관들의 사법행정 참여를 독려하려 만든 위원회 구성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정 연구회 활동을 막으려 대응 방안을 마련했고, 이 중 일부는 실행됐다고 밝혔다.

2016년 3월28일 행정처는 고등법원장에게 제공할 목적으로 ‘우리법·인권법연구회와 유대관계’, ‘법관사회의 상징성’ 등을 고려해 ‘반드시 포함(1순위)’은 빨간색, ‘유력한 후보군으로 고려(2순위)’는 파란색, 3순위는 검은색으로 분류해 추천 수위를 달리했다. 행정처에 비판적인 인권법연구회가 2016년 말 ‘공동학술대회’ 개최 논의에 들어가자 행정처는 중·단기로 나눠 대응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예산 삭감 및 다른 연구회 행사 개최로 연구회를 견제하는 방안도 논의했다. 임종헌 당시 행정처 차장 지시로 작성된 이 문건들은 실장·처장 주례회의에 보고됐다.

또한 행정처는 2014년 말 여성 판사들을 중심으로 만든 익명 법관 카페 ‘이판사판야단법석’ 현황을 파악하고 대응책을 담은 문건을 작성했다. 행정처는 상고법원 및 쌍용차 해고노동자 유죄 대법원 판결 등에 비판적인 글과 댓글을 ‘문제 글’로 분류해 “카페 자발적 폐쇄 유도”, “대법원 공직자윤리위 권고의견 등 위반소지가 있다는 점을 설득·엄포용 카드로 활용” 등 대응방안을 마련했다.

일부 신문은 법원의 이 같은 행태를 강하게 질타했다. 한겨레는 사설 “판결 빌미로 청와대와 뒷거래한 ‘양승태 대법원’”에서 “법원이 이렇게까지 타락했나 싶을 정도로 충격을 금할 수 없다”며 “재판의 독립, 판사의 독립을 위해 애써야 할 행정처가 거꾸로 ‘사법부의 국정원’처럼 사찰과 뒷거래를 시도했다면 정확한 진상규명과 법적·행정적 책임 소재를 가리기 위해 새로운 차원의 수사와 조사가 불가피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 23일자 경향신문 4면 기사
▲ 23일자 경향신문 4면 기사

경향신문 역시 사설 “양승태의 사법질서 파괴행위 묵과할 수 없다”에서 “판사 블랙리스트 작성은 법관의 독립을 규정한 헌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라며 “‘박근혜 게이트’에 버금가는 반민주적·반헌법적 행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비판했다. 이어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과 법원 수뇌부는 사법질서 문란행위에 대해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민일보도 사설 “헌법 정신 훼손한 법원행정처의 권한 남용”에서 “법원행정처의 업무 영역과 방식을 다시 검토해 전면적인 조정이 이뤄져야 한다”며 “특권에 기초한 엘리트주의와 고압적인 자세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감추고 적당히 덮고 넘어가서는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을 수 없다”고 했다.

조선·중앙, 판사 블랙리스트 없다

하지만 일부 신문은 전혀 다른 논조로 보도했다.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판사명단이 적혀있고 성향을 구분해 명백하게 불이익을 주는데 이용한 문건이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법원행정처를 비판적으로 바라본 한겨레·경향신문 등은 1면에 이 소식을 전한 데 비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12면에서 이 사건을 소극적으로 보도했다. 중앙일보는 ‘블랙리스트’가 없다는 논조로 1면에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조사 결과 행정처가 판사들의 뒤를 파서 인사에서 불이익을 주는 ‘블랙리스트’는 확인되지 않았다”며 “하지만 행정처가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판사들의 성향과 동향을 정리한 문건은 여럿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 23일자 조선일보 12면 기사
▲ 23일자 조선일보 12면 기사

조선일보는 “행정처가 문건을 만든 것 자체가 사법행정권 남용으로 비칠 수 있는 소지는 있지만 법조계에선 문건대로 실행이 됐는지는 다른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며 “실행 여부 측면에서 보면 추가조사위 발표 내용도 다르게 볼 여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추가조사위는 행정처가 동향을 파악한 일부 판사들에게 실제로 인사에서 불이익을 줬는지에 대해 ‘조사 범위 밖’이라며 언급하지 않았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또 다른 기사에서 국제인권법연구회를 공격했다. 추가조사위 위원 6명 중 4명이 이 연구회 소속이며 최한돈 부장판사는 지난해 7월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의 재조사 거부에 반발해 사표를 던지기도 했다고 지적한 것이다. 이 신문은 “김 대법원장도 이 연구회 1·2대 회장을 지냈다”며 “이 때문에 ‘이들이 완장 찬 듯 밀어붙인다’는 말이 나왔다”고 비판했다.

조선일보는 “이 과정에서 판사 사회는 둘로 쪼개졌다. 최근 판사들 익명 게시판에선 법원행정처에 근무했던 판사들을 ‘따까리’ ‘적폐’ 같은 표현으로 비하하는 글을 올려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고 전했다.

조선은 사설 “실체 없는 ‘판사 블랙리스트’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에서도 최근 10년 사이 법원에 접수된 본안 사건은 14% 준 반면 2심 사건은 40%, 대법원 3심은 65% 가까이 증가한 것을 언급한 뒤 “당사자들이 하급심 판결에 승복하지 않는 것, 바꿔 말하면 판사들이 신뢰를 잃었다는 뜻”이라며 “법을 수호한다는 판사들이 법을 맘대로 어기고, 네 편 내 편 갈라 욕설 패싸움을 벌이고 ‘재판이 곧 정치’라는데 누가 판사들을 믿겠나”라고 지적했다.

중앙일보 역시 사설 “블랙리스트 못 찾은 판사 블랙리스트 조사위”에서 “위원회가 추가 조사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인사 불이익 의혹’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 셈”이라며 “문건 전체를 보면 법원행정처 측이 개별 재판에 개입할 방법이 없다는 입장을 청와대에 우회적으로 전달했음을 설명하는 게 해당 대목의 작성 취지”라고 주장했다. 이어 “조사위는 리스트에 버금가는 증거를 확보했다고 주장하지만 법원과 온 나라를 뒤흔들며 진행해 온 조사 결과로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고 덧붙였다.

동아일보는 12면에서 ‘인사상 불이익 조치가 없었다’는 내용을 제목으로 뽑았다. 이 신문은 “법관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블랙리스트가 없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특정 법관에 대한 동향을 파악한 것에 놀라움을 표시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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