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발발 직전까지 갔던 지난 1994년 북핵 위기 당시 북과 협상을 했던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회고록이 나왔다. 회고록에는 북핵 위기 당시의 상황에 대한 설명, 경제제재의 효과, 박정희 정권에 대한 기억 등이 담겨 있다.

특히 현재 북미대화가 조율 중이고 우리 정부가 사절단을 파견한 가운데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회고록은 여러 모로 시사점을 준다.

지미 카터는 지난 1977년 미 39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1981년까지 재임했다. 1982년 아내 로잘린 스미스 카터와 함께 비영리기구 카터센터를 설립했고, 2002년 세계 평화 중재자 역할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번에 나온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회고록은 ‘구순 기념 회고록’(지식의날개)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그는 “평화를 위협하는 많은 사례들을 카터센터를 대리하여 직접 다뤄야 했다”며 지난 1994년 북핵 위기 당시 일을 회고했다. 1994년 북핵 위기는 국제원자력기구가 북의 핵개발 의혹을 제기하며 불거졌다. 원자력기구는 북에 특별사찰을 받을 것을 요구했고 6차례 걸쳐 사찰이 이뤄졌지만 보고서에 플루토늄의 양과 실제 양이 다른 것으로 나왔다. 북은 원자력기구의 사찰을 거부하기에 이르렀고, 미국과 우리 정부는 중단됐던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했다. 북은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했다.

북미 갈등은 남북 갈등으로도 이어졌다. 1994년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특사교환 실무회담에서 박영수 조평통 부국장은 전쟁 가능성을 얘기하며 ‘서울 불바다’ 발언을 내놓으면서 갈등이 극에 달했다.

특히 후에 밝혀진 일이지만 1994년 5월 당시 클린턴 미 대통령이 월리엄 페리 국방장관에게 동해에 항공모함 5척을 보냈고, 작전계획 5027하에 따라 북한의 핵시설을 공습하는 것을 검토했다.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의 전화 통화를 통해 한반도 전쟁 우려를 전하며 공습 명령을 막을 수 있었지만 최악의 전쟁 위기로 치달았던 것이다.

전쟁 위기 이후 등장한 협상자가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다. 그는 부인 로잘린 스미스 카터와 함께 평양을 방문하고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내가 평양을 방문해서 그와 미국 정부 간의 적대관계를 일부라도 해소시켜 줄 수 있을지 3년 동안이나 요청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문제로 기본적으로 불쾌한 인식 때문에 이 요청을 피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북미 갈등이 커지자 북측에서도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수년 동안 접촉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결국 내 역할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긴 했지만 내가 북한의 일반방문 승인을 요청하자 백악관에서는 이를 기각했다”고 썼다.

그가 말하는 1994년 북핵 위기는 이렇다.

“북한은 핵확산방지조약의 의무 조항을 무시하고 핵시설에서 감시단을 철수시켰고, 사용한 우라늄 연료봉으로 플루토뇸을 재처리하기 시작했다. 미국정부는 북한과 대화하길 거부했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로 이 사안을 넘겨 징계적 제재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몇몇 중국친구들은, 만약 북한을 국제사회의 악당으로 낙인찍고 그들이 숭배하는 지도자를 범죄자로 몰고 가면 북한은 남한을 공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위기를 해소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전략을 구상하면서 내가 직접 평양에 가기로 결심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두번째 방북 승인을 요청했지만 빌 클린턴 대통령의 거부했고, “대통령 앞으로 설령 승인하지 않더라도 어쨌거나 나는 평양에 가겠다는 편지를 썼다”고 밝혔다. 북한 방문 승인은 앨 고어 부통령의 조언대로 편지 내용의 표현을 변경한 뒤에 이뤄졌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북에 “베이징을 통해서가 아니라 남한을 통해 직접 북한을 방문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에 북은 유엔사무총장도 중국을 통해 북을 방문한다고 항의했지만 결국 “43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에서 비무장지대를 통과해 평양”으로 들어갔다고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밝혔다.

그는 “핵기술자로서 나의 지식을 활용해 그들과 핵문제와 관련해 상세히 토론했다”며 “김일성이 서글서글하고 놀라울 정도로 모든 사안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기억했다.

김정일-카터 회담을 통해 합의한 내용은 국제사찰단 조사 허용, 남북 정상회담, 비무장 지대 전진배치된 군대의 철수 등이었는데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난 뒤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제네바 공식회담에서 김일성-카터 회담 내용에 대해 합의하면서 1994년 북핵 위기가 마무리됐다.

현재 우리 정부가 북미대화를 조율하기 위해 특별사절단을 평양에 파견하는 등 최악의 갈등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가운데 1994년 북핵위기 당시 대화를 통한 중재 노력은 되돌아볼 지점이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대북경제제재에 대해서도 효과가 크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정권을 대상으로 경제제재나 경제봉쇄조치를 취하는 전략은 대부분 효과를 거두기 힘들고 오히려 역효과만 내기 쉽다”고 썼다.

그는 “미국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65년 전부터 북한에 엄격한 경제제재조치를 취해왔다. 이 조치를 통해 북한경제에 최대한 타격을 가하고 붕괴시키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폭압적인 북한의 독재 정권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가혹한 제재로 시민들만 볼모로 잡고 있는 듯 하다”고 주장하면서 “비군사적 압박이 필수적이라고 간주될 경우, 억압받는 국민들의 삶과 밀접한 국가경제를 붕괴시킬 것이 아니라 결정권을 가진 해당국 관리들의 여행 제한, 해외계좌 동결, 그리고 기타 특권을 겨냥하여 경제제재를 가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밝혔다.

회고록에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대통령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나 남긴 인상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돼 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박정희 장군(General Park Chung-hee)이라고 칭하면서 “나는 우선 한국이 경제성장을 실현한 점을 축하했다”면서 “그러고 나서 우리는 몇 시간 동안 쟁점사안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이 사안들 가운데는 그가 자주국방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가 벌인 중대한 인권유린 사례들이 포함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이 회담은 그동안 내가 우리 동맹국 지도자들과 가진 토론 가운데 아마도 가장 불쾌한 토론이었을 것”이라고 기억하면서 “박정희의 젊은 딸이지 북한 암살범에 의해 살해된 어머니를 대신해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고 있던 박근혜 덕에 분위기가 어느 정도 누그러지긴 했다”고 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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