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사이트 메갈리아4에서 만든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계약이 해지된 성우가 있습니다. 정의당 등 진보정당에서 이를 부당 해고라고 비판하는 성명을 내 논란을 촉발시켰지만 메갈리아는 혐오를 혐오로 대응한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메갈리아4의 정체성을 두고 의견이 엇갈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르포작가 이선옥님이 관련 기고를 보내왔는데요. 이 사건은 부당해고라고 보기 어려우며 페미니즘 대 반페미니즘이나 강자 대 약자의 구도로 볼 게 아니라 애초에 혐오를 혐오로 반박하는 방식 자체에 문제가 있으며 모든 종류의 혐오에 반대하는 게 맞는 방향이라는 주장입니다. 논쟁적인 주제의 글이지만 의미있는 지적을 담고 있다고 판단해 게재합니다. 미디어오늘은 반론과 추가 기고를 환영합니다. 편집자 주.)

자칭 여성주의 커뮤니티 ‘메갈리아’를 후원하는 티셔츠를 입고 인증샷을 찍은 남성향 게임의 여성 성우, 이에 대한 유저들의 항의와 넥슨의 성우교체, 넥슨의 조치에 대한 일부 웹툰 작가와 여성들의 항의, 이에 대응해 메갈리아 지지 웹툰작가 명단 공개와 레진코믹스 탈퇴 운동을 벌이는 웹툰 소비자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한 사건의 발단과 진행 과정이다.

정의당과 녹색당은 “정치적 의견이 직업 활동을 가로막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게임 속 목소리가 지워져도 우리의 목소리는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며 넥슨의 조치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노동당은 여성혐오와 반혐오의 대립으로 이 사건을 규정하며 ”메갈티에 강요되는 침묵에 맞서겠다“는 논평을 냈다. 메갈리아와 진보운동단체 일부는 성우를 교체한 기업 넥슨을 타깃으로 항의시위를 조직하기도 했다. 당사자인 여성 성우는 입장문을 통해 넥슨사와는 계약금을 받았고 잘 해결되었으며 부당해고가 아니라고 밝혔으나 사태는 진정되지 않고 있다.

조직된 세력은 없지만 웹툰갤러리와 클로저스갤러리, 루리웹, 오늘의유머, 일간베스트저장소 같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다수의 남성 유저들과 상당수 여성 유저들의 항변은 계속되고 있다. 이들은 메갈리아를 지지하는 웹툰작가 리스트를 발표하고, 그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는 웹툰 전문 사이트 레진코믹스 탈퇴 운동을 벌이는 중이다. 남성향 게임 유저들의 항의에서 시작된 일이 웹툰이라는 영역으로 옮겨져 확장되었다. 웹툰 작가와 독자들이 날선 말로 공방을 벌이고, 급기야는 메갈리아 지지 작가를 반대하는 일부 유저들이 예스컷(웹툰에 대한 규제)운동을 거론하기까지 한다. 이번 사태는 어느 게임 사이트에서 우연히 돌출된 성별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지난해부터 여성혐오를 주제로 벌어진 많은 문제들이 응집되어 터져 나온 필연적인 결과다.

이번 사건에는 여러 갈등의 전선이 존재한다.

1. 게임 소비자 남성과 페미니스트 여성 성우 간 갈등.
2. 게임 업체와 계약한 성우와 해당 기업 넥슨 사이의 갈등.
3. 혐오에 반대하는 진보 진영과 그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내외부의 대중.
4. 해당 성우 지지와 넥슨 조치를 비판하는 웹툰 작가들과 이에 반대하는 독자,

각각의 갈등은 다른 결을 가지고 있는데 모두 뭉뚱그려져 여성혐오자와 그 반대자의 싸움으로 단순화된다.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갈등이 사건화 되어 터질 때마다 우리는 피로한 공방을 반복해 왔다. 차분하고 냉정한 분석과 합리적인 해결보다는 대결을 부추기고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채로 또 다른 사태를 맞는 상황을 반복했고, 앙금은 그대로 쌓여왔다. 어느 시점에선가 막았어야 할 일을 막지 못하니 둑이 허물어지듯 계속 문제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자연발생적인 운동은 제어의 기능이 없어 어디로 튈지 모른다. 메갈리아 지지 작가들을 계속 수색하는 일이나, 혐오에 맞서 메갈리아 지지 의사를 더 강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주장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이 사태는 여성혐오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 다릅니다.

게임 유저들은 왜 성우를 교체하라고 요구했으며 이는 여성혐오자들의 부당한 공격인지,
넥슨이 페미니스트임을 인증한 여성 성우를 교체한 일은 부당한 갑질이며 해고인지,
넥슨의 조치에 항의한 웹툰 작가들은 왜 그런 것인지,
웹툰 작가들을 비판하는 독자들은 왜 분노했으며 모두 여성혐오자인지,
정의당과 녹색당 등 진보진영이 주장하듯 이 사태가 신념의 자유를 지키고 혐오와 성차별에 맞서 싸우는 일인지 등,
각각의 갈등에 대한 사안별 해석이 필요하다.

클로저스 게임 유저들은 왜 페미니즘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인증한 여성 성우를 교체하라고 요구한 것일까? 이는 여성혐오자들의 성차별적인 공격일까?

한 사례를 기억해 보자. 올해 초 화장품업체 MAC은 개그맨 유상무를 광고모델로 썼다가 곤욕을 치렀다. 당시 유상무는 팟캐스트에서 동료인 장동민, 유세윤과 여성혐오 발언을 해 문제가 된 상황이었다. 주 발언자는 장동민이었지만 멤버 셋은 함께 사과를 했다. SNS에는 여성들이 주 소비자인 제품에 여성혐오 발언을 한 남성을 모델로 써서는 안 된다며 불매운동이 벌어졌고 해당 업체는 사과와 함께 동영상을 삭제했다.

(관련 기사 : "여성혐오 발언자가 화장품 광고"…불매운동 곤욕)

지난해부터 여성 소비자들의 ‘불매운동’이 여성혐오 반대 운동의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여성들은 혐오 발언을 한 연예인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이나, 협찬사를 압박해 해당 연예인의 광고나 협찬을 중단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지갑 여는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하라는 것이다.

(관련 기사: 혐오를 혐오하는 효과적인 방법)

이번 클로저스 유저들의 주장과 행동도 넷페미니스트의 운동과 같았다. 소비자로서 자신들을 혐오하고 비하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요구다. 그동안 게임계는 캐릭터가 성차별적이며 성적 대상화를 강조하고 있다는 비판을 계속 들어 왔다. 이들에게 메갈리아는 ‘한남충’이라는 표현을 통해 한국남성 일반을 혐오하는 집단이고, 게임계에 대해 특히 비판적인 여성들이다. 여성을 혐오하는 남성이 여성 화장품의 모델이 되는 게 부적절하다면, 남성혐오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계속 들어야 하는 것도 부적절하다는 논리다. 유상무는 직접 혐오에 가담한 사람이고, 성우는 지지자라는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한남충을 번식에서 탈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집단을 지지하고 후원하며, 이를 정당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곧 혐오의 가담자이다. 장동민이 주 발언자였던 옹달샘 사태에서 멤버 셋의 경중을 따져 잘못을 묻지 않았듯 소비자에게 이들의 행위는 같다.

이에 대해 ‘남성혐오는 없다’거나 ‘메갈리아의 행위는 여성혐오에 반대한 것이니 정당하지만, 게임 유저들의 행위는 약자를 위한 행동이 아니므로 부정의하다’는 주장, ‘메갈리아4는 혐오 표현으로 비판받은 초창기 메갈리아와 다르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남성혐오는 없다는 주장과, 메갈리아4는 다르다는 주장은 바로 반박 당한다. ‘팩트폭격’이라는 이름으로 메갈리아4의 남성혐오 표현을 캡처한 화면이 제공된다. 메갈리아는 정당하고 이들의 행위는 부당하다는 논리는 ‘혐오’를 규정하는 입장에 따라 다르다. 문제는 혐오가 아니라 정의를 선택적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한 반발과 누적된 대중의 분노인데, 이를 여성혐오나 반여성주의로 치부해 버리는 데서 일어난다.

몸무게 100킬로가 넘는 거구의 남성 A와 50킬로를 겨우 넘는 왜소한 남성 B가 있다. 둘은 평소 서로 때리며 대화를 하는 습관이 있다. 어느 날 몸이 약한 B의 분노가 폭발했다.

B: 야, 때리지 마. 너무 아프잖아. 나쁜 놈아!
A: 너도 나 때리잖아. 지금도 때리고.
B: 야, 니가 내 덩치의 두 배인데 이게 무슨 때리는 거냐?!

이 경우 둘 사이의 몸무게 차이라는 조건과, 폭력이라는 행위 중 어디에 무게를 두어야 할까. 강자가 약자를 때리면 아프니까 안 되는 것인지, 폭력은 누구에게든 하면 안 되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물어보자. 정의로운 사람이라면 대부분 후자라고 답할 것이다. A는 강자라서 아프지 않으니까 약자인 B의 타격은 허용해도 된다고 하면 폭력이라는 부정의를 선택적으로 용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의와 불의의 대결이 아닙니다.

게임 유저들은 바로 이 지점을 말하고 있다. 남성이 하면 혐오이고, 여성이 하면 왜 혐오가 아닌지, 여성의 불매는 왜 정당한 사회운동이고, 남성의 불매는 왜 여성혐오자들의 준동인지.

성적대상화를 반대하는 페미니스트가 성적대상화의 전형으로 욕먹는 게임의 성우로 참여하는 건 괜찮은데, 그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은 변태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왜 여성 대상의 성애물은 문제가 아니고 남성 대상의 성애물은 옷차림에서 캐릭터의 표정, 동작 하나까지 여성혐오인지.

정의와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적인 정의, 즉 불편부당함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들은 정의와 부정의의 판단이 일관되게 적용되길 원하는 것이지 내 폭력은 정당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게임 유저들은 메갈리아로 대표되는 넷페미니스트들의 행동을 그대로 재현했다. 문제라고 생각한 성우의 행위에 대해 입장을 묻고, 해당 성우가 이의 정당함을 주장하자 업체인 넥슨에 교체를 요구했다. 넥슨은 소비자의 요구를 받아들여 해당 성우를 교체했다. 올해 초 벌어진 여성들의 불매운동에 해당 업체들은 “고객층에 여성 소비자가 많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넥슨사의 대응 역시 같았다. 메갈리아는 넥슨의 성차별 조치라고 반발했지만 유저들은 소비자의 권리행사라고 표현한다. 당신들이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이잖아! 라는 항변과 함께.

그런데 여성계와 진보진영은 이 지점은 모르거나 혹은 외면한 채 성차별주의자들이 페미니즘을 공격한다고만 말한다. 게임 유저에서 웹툰 소비자들로 이 싸움이 빠르게 확산된 이유는 그동안 대중들에게 누적된 분노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는 꼭 남성 일반과 여성의 성대결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상당수의 여성 유저들은 메갈을 싫어하는 여성들의 존재를 알아야 한다며 여성인증 후 탈퇴하기도 한다. 남성들만 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방식이야말로 모든 사안을 성별 대립 구도로 단순화해 적대를 강화한다. 혐오가 나쁘면 누구든 해선 안 된다는 문제제기를 일축해 버리는 한 이런 갈등은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다.

초창기 메갈리아의 혐오 표현에 대해서는 여성운동 진영 안에서도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넷페미니스트들이 벌인 여성혐오 반대 운동이 성과를 내면서 정당한 사회운동으로 용인하고 지지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이들은 온라인을 통해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구조적 폭력현상을 중단시키는 실질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윤지영 연구자).

“메갈리안이 실험한 것은 쾌락의 언어와 농담의 에너지를 운동의 에너지로 전화시키는 것이었다.”(윤보라 여성학 연구자)

“메갈리아 만큼 대중적이고, 가시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성과를 끌어낸 곳은 없었다고 생각한다.”(손희정 문화평론가).

‘일부 부작용은 있지만 성과와 의미가 있는 운동’이 메갈리아 활동에 대한 여성운동 진영 내부의 평가라 할 수 있다.

(관련기사:1. [허핑턴포스트코리아 인터뷰] 2015년, 한국의 '여성혐오'를 진단하다
2. [메갈리아 1년]<1>"나는 왜 메갈리안이 됐나"
3. [메갈리아 1년]<2> '남성 메갈리안'의 시각
4.  [메갈리아 1년]<3> 메갈리아, 어디로 가나)

메갈리아에는 성차별을 반대하고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내용과 남성 일반과 장애인, 성소수자, 노인 같은 사회적 약자를 혐오하는 표현이 공존한다. 전자는 장려하고 후자는 쳐냈어야 하는데 공존하는 게 현실이다. 메갈리아 1, 2, 3과 메갈리아4는 다르다는 항변은 메갈과 워마드는 페미니즘이 아니라는 주장만큼 무의미하다(사건 진행 중 온라인에서는 #나는메갈이다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져 메갈 1, 2, 3과 4는 다르다는 구분은 의미가 없어졌다). 대중은 좋은 페미니즘과 나쁜 페미니즘을 구분하지 않으며, 나쁜 혐오와 좋은 미러링(메갈리아를 상징하는 운동 전략으로 거울처럼 비춰 자각시키기 위해 남성을 혐오한다)도 구분하지 않는다. 동아일보 기사의 한 대목은 이를 잘 보여준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현재 사회 분위기에서는 온갖 혐오 발언을 일삼는 메갈리아와 일베를 동일 선상에 두고 있다.”(관련 기사 : 클로저스 성우 교체 논란, “왜 넥슨이 욕을 먹어야 하나?” ) 더구나 메갈리아4는 남성의 성기 크기를 비하, 조롱하는 로고가 상징인 메갈리아의 이름을 계승한다. 이들의 활동에서 혐오 표현을 발견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미러링의 사회운동적 의미를 이해하고 긍정하는 집단을 벗어나서, 과연 일반 대중들에게 저 로고와 혐오가 정당한 운동으로 설득될 수 있을까?

통진당에 문제가 생기면 노동당에 항의전화가 온다. 민주노동당에서 서로 갈라진지 몇 년이 지났고, 노동당과 민주당 사이에 실개천이 흐른다면 통진당과 노동당 사이에는 장강이 흐른다고 할 정도로 이질적인데, 대중에게는 모두 같은 진영일 뿐이다. 대중이 무지해서 그런다고 해봐야 해결되지 않는다. 문제는 대중의 무지가 아니라 모두 하나로 인식되는 상황 자체에 있고 이는 진영이 자초한 일이기 때문이다.

강자와 약자의 대립이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진보진영의 대응은 유감이다. 정의당과 녹색당, 노동당은 이 사안에 대해 각각 문화예술위원회, 청년녹색당, 여성위원회 차원의 논평을 했다. 그런데 그동안의 논평과는 달리 내부 당원들의 비판에 직면했다. 정의당의 경우 문화예술위원회의 논평에 당원들이 이례적으로 격렬한 비판을 하고 나섰다.

(관련 기사 : “김자연 성우 관련 논평을 낸 정의당 위원회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녹색당과 노동당의 논평에도 진보정당이 ‘혐오’를 지지하고 옹호할 수 있느냐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약자와 강자라는 구도에 갇혀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대중의 표와 지지를 먹고 사는 정당은 ‘정의로운 운동’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대중적인 수위가 어디까지인지 민감하게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녹색당은 “티셔츠 인증이 마땅히 규제되어야 하는 정치적 의사 표현이라는 주장‘을 규탄하며,...이런 시도(페이스북을 상대로 한 메갈리아의 소송)조차 반사회적이며 인권 침해적이라고 규정하는 일련의 주장을 규탄한다”고 논평했다. 게임 유저들과 웹툰 소비자로 확산된 일련의 대중들은 성우의 정치적 의사표현을 규제하자고 주장한 게 아니다. 메갈리아가 계정삭제에 대응해 페이스북을 고소하는 행위를 인권침해라고 규정하지도 않았다. 메갈리아의 혐오발언 행위를 문제 삼고 있다. 비판은 사실에 기반 해야 하는데 이번 진보정당들의 논평은 가상의 적대를 만들어 부추기는 모습을 보였다.

작품에 대한 퇴출과 낙인찍기는 창작자들의 사상과 양심을 침해하는 행위라 규정하고 비판한 것도 불편부당함 면에서 공정하지 못했다. 창작자에 대한 낙인찍기와 작품 검열, 퇴출 요구 운동은 메갈리아로 대표되는 넷페미니스트 진영에서 먼저 해 온 방식이다. 이들은 혐오표현에 대한 기준을 논의하거나 사회적인 합의를 만들려는 노력보다, 여혐작가와 표현물을 발굴해 낙인과 퇴출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운동을 벌여 왔다. 몇몇 사건은 결국 부작용을 낳아 창작자의 고소로 이어지고 있다. 여혐 작가 리스트 공개와 낙인, 여혐 콘텐츠 발굴과 퇴출 요구에 대해  운동에 대해 그간 진보정당들은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 적이 없다. 산발적으로 문제의식이 제기되기는 했으나 진보진영은 ’여성혐오 배격‘이라는 대의 앞에 입을 닫았다.

여성혐오와 성차별을 끝장내야 한다는 진보정당의 대의에 반대할 당원은 없다. 부당해고에 동의하는 당원은 더더욱 없다. 넥슨사의 성우교체가 부당해고라는 주장이 힘을 얻지 못한 이유도,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보다 익숙한 프레임 안에 집어넣으려는 운동 진영의 관성이 지지 받지 못해서다. 해당 성우가 큰 피해를 입은 건 사실이다. 계약금은 받았다지만 참여한 노동의 성과물이 사라졌고, 커리어에도 손상을 입었다. 이 사건이 앞으로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갑을관계에서 벌어지는 부당해고로 이 사안을 규정하기는 어렵다. 당사자 역시 부당해고가 아니며 그렇게 말하지 말아달라고 했지만, 갑질 때문에 해고당한 약자 프레임에 익숙한 진보진영은 관성을 반복한다. 그 관성에 대해 일부 당원들이 진영 안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게 이번 사태다.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정당 당원들이 갑자기 성차별주의자에 시장만능주의자가 되기라도 한 것일까?

지금 당원들은 메갈리아의 혐오를 옹호하고 나선 진보정당의 행위가 과연 진보다운 일인지 묻고 있다. 진영 안의 구성원은 무엇이 정의인가를 묻고 있고, 진영 밖의 대중은 정의의 규정을 독점한 운동권을 진보꼰대라 비판한다. 왜 이런 규탄이 내외부에서 터져 나오는지 헤아리지 못하고 반동의 물결 앞에 선 지사로 스스로를 인식하는한 진보진영은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고립될 것이다. 귄위적인 계몽주의자와 선민의식에 대한 대중들의 반감과 분노는 생각보다 크다. 이는 웹툰 작가들과 독자 사이의 갈등에서 잘 드러난다.

착한 낙인은 없습니다.

게임 사이트에서 벌어진 사건은 웹툰계로 튀어 확산됐다. 넥슨의 조치에 반대하고 해당 성우를 지지하는 발언을 한 웹툰 작가들이 대중의 눈에 띄면서 시작됐다. 메갈리아를 지지하는 웹툰 작가의 리스트가 작성됐고, 독자들은 이 가운데 가장 많은 작가들이 작품을 연재하는 레진코믹스의 탈퇴운동을 벌이고 있다. 불똥은 엉뚱하게 레진불매 운동으로 번졌다. 넥슨처럼 성우를 교체한 조치를 한 것도 아닌데 레진코믹스에게는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작가들이 해당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은 단일하지 않다. 문화예술인으로서 넥슨의 조치에 분노한 사람도 있고, 메갈리아를 지지하는 입장도 있다. 메갈리아와 무관하게 이번 사태를 여성혐오의 문제로 바라보는 작가도 있다.

단일한 입장은 아니어도 작가들은 대체로 두 가지 주장에 동의한다. 누구든 자신의 신념을 표현할 권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과, 여성에 대한 혐오를 반대한다는 것. 문제는 작가들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이는 독자들 또한 이 주장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성우 교체를 요구한 게임 유저들을 비하한 일부 작가들의 표현은 누적되어 있던 대중의 분노를 자극했다. 하지만 두 가지 대의를 고수하는 작가들에게 이 분노는 불의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일부 작가는 독자와 날선 공방을 벌였다. 여성혐오 독자는 필요 없다는 발언이나, 보기 싫으면 내 작품 보지 말라는 발언, 여혐은 지능의 문제라거나, 미개, 야만인 같은 멸시 발언은 사태의 확산에 불을 지폈다. 신념의 차원에서 정의를 수행한다고 생각할수록 발언은 선명하고 태도는 완강한 법이다.

만일 작가들이 생산자인 자신과 소비자인 독자 사이의 문제로 바라봤다면 불만을 접수하고 타협점을 찾아 피해를 최소화 하는 방식으로 진화에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의 문제는 서로가 이 사안을 바라보는 관점이 애초부터 다르다는 데서 시작한다.

독자들은 소비자의 권리 행사로 이 사태를 바라본다. 자신의 구매가 있어야 작품 활동이 가능한 생산자가 자신을 한남충이라 비하하고 미개한 독자로 무시하며 갑질을 한다고 받아들인다. 반면 해당 작가들은 여성혐오에 반대하는 신념과 정의를 실행하는 문제로 이 사태를 바라본다. 그래서 사상검증이라는 말까지 등장한다. 쉽게 굴복할 수 없다.

혐오와 반혐오의 대립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면 놓치는 게 있다. 여혐 정서도 일정 부분 섞여 있지만 독자들은 여혐만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다. 복합적인 이유들이 있는데 모두 성차별주의자에 여성혐오자로 규정된다는 게 문제다. 이는 독자들에게 부당한 낙인과 배제가 된다. 그렇게 규정 당해온 억울함과 분노가 있는데 또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이다. 자신들이 당해 온 혐오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고, 자신들의 분노는 여성혐오자의 불의로만 취급당한다. 배제되고 이해받지 못하는 억울함은 계속된다.

당했던 방식 그대로 불매운동을 벌였더니 또 여성혐오라고 한다. 여혐작가 리스트와 메갈작가 리스트는 다른가? 앞의 것은 정의이고 뒤의 것은 낙인인가? 작가들이 여혐으로 규정되어 공격당할 때 그 혐오의 규정이 정당한지, 낙인찍기 방식은 옳은지 논의는 진행되지 않았다. 개별 작가들의 대응과 사과, 혹은 분쟁으로 파편화되었다. 여혐작가 리스트가 돌 때 지금 발언하는 작가들은 어떤 태도를 보였느냐는 물음까지 여성혐오자의 발언이라 무시해버리면 이 사태는 해결도 진정도 될 수 없다.

공론의 장을 회복해야 합니다. 

독일의 정치가이자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가 결합된 정치가를 이상으로 제시했다. 신념 윤리는 자신의 신념과 내면의 가치를 위해 헌신하는 태도이며, 책임윤리는 그 신념을 현실에서 추구할 때 벌어질 결과까지 고려하고 책임지는 태도를 말한다. 신념 윤리를 중시하는 사람은 행위의 결과물이 나빠도 세상의 나쁨을 탓하거나 신념의 순수성을 강조하며 책임을 회피한다. 책임 윤리를 중시하는 사람은 인간의 선의나 완전성 대신 결함과 불완전성을 고려하며 행위의 결과에 책임을 진다. 베버는 이 둘의 상호보완적 결합이 정치가에게 필요한 덕목이라고 제시했다. 대의를 추구하는 운동가들과 신념을 지킬 권리를 주장하는 개인들이라면 모두 새길만한 대목이다.  

사회화된 모든 주장과 행동은 신념에서 시작하되 책임을 동반한다. 해야 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 까지는 신념의 차원이지만, 이를 추구하는 행위에는 책임이 따른다. 행위의 책임을 묻는 대중에게 신념의 당위를 주장하는 대응은 서로 만날 수 없기에 평행선을 달린다. ‘민중은 개돼지’ 발언은 개인을 특정해 피해를 주지 않았지만 대중은 분노한다. 메갈리아가 여성을 혐오하는 남성의 행위를 특정해서 비판하지 않고, 남성 일반을 ‘한남충’과 ‘씹치’라 혐오하는 전략을 취했을 때 이들의 분노 또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SNS라는 공간에서 혐오와 멸시의 표현이 도를 넘었을 때, 나와 같은 신념을 공유하는 이의 혐오표현은 용인하고, 반대되는 이의 표현은 혐오라 공격하는 편향이 드러났을 때 막았어야 했다. 같은 신념을 공유하는 진영 안에서 극단주의자들이 우리의 신념을 대표하는 상황으로 가지 않도록 자정 노력이 있었다면 이런 사태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반혐오 운동 진영이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이어야 할까? 메갈리아1, 2, 3과 4는 다르다, 혹은 메갈과 워마드는 다르다, 혹은 그 페미니즘은 우리와 다르다고 주장하는 일일까? 그러려면 오유나 일베나, 메갈이나 일베나, 라는 표현도 안 하거나 감수해야 한다. 그게 서로가 원하는 결론은 아닐 것이다.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선언과 여성혐오 배격 운동이 이어진 최근 2년 동안 적어도 ‘여성’이라는 키워드를 가진 사건은 논쟁 대신 억압적인 분위기가 지배했다. 논의는 실종되고, 공론장은 사라졌다. 혐오를 없앤다는 명분으로 혐오의 언어가 확산되고, 낙인과 공개적인 망신주기가 횡행했다. 이건 아닌데 하는 목소리는 혐오와 반혐오라는 단일 전선에서 설 곳을 찾지 못한 채 중립충, 공정충, 진보피시충과 같은 혐오의 언어로 공격당했다. 갈등은 단일하지 않은데 전선은 단일하게 강요됐다. 이번 사태도 여러 결의 갈등과 전선이 존재하는데 ‘티셔츠 하나 입었다고 해고당하는 여성혐오 세상’ 같은 자극적인 주장이 앞선다. 사태를 해결하기보다 이런 갈등을 반복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진영과 진영이 대립하고 불편부당함이 아닌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우리는 어떤 해결책을 찾아야 할까?

혐오의 표현은 어느 집단을 막론하고 배격하되 불편부당함의 원칙을 지키는 방향으로 나가는 길밖에 없다. 문제 제기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의 극단적인 모습을 부각해 증오를 강화하는 방식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억압에 침묵하기보다 계속 발언하고, 내부의 극단주의자들을 고립시키고, 설득하면서 합의해야 한다. 여성 문제에 관해서 우리 사회는 공론장의 기능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 이를 인정하는 일이 먼저 필요하다. 사라진 공론장을 회복해서 혐오의 개념, 혐오의 범위, 혐오행위에 대한 사회적 제재, 동료시민으로서 역할을 논의하면 된다. 내치거나 멸시하지 않고, 집단으로 일반화하지 않고, 성차별이라는 구조적인 경향성은 인정하되 개별 사안마다 가진 맥락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사는 모습이 곧 우리가 바꾸려는 세상의 모습이다.”

운동 진영에서 내부 성찰을 주장할 때 자주 쓰는 말이다. 원론적인 이야기 같지만 이 신념의 윤리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책임의 윤리에 기반한 행동을 시작하는 게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이 글이 공론의 장을 회복하는 작은 불씨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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