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개그콘서트’ 끝을 알리는 밴드 연주를 들으며 주말을 떠나보내던 시절이 있었다. 개그콘서트가 방영되는 일요일 저녁이면 너도나도 TV 앞에 둘러앉았고, 월요일이면 각각 학교와 일터에서 어젯밤 나온 유행어를 따라하며 깔깔댔다. 개그콘서트 전성기 연출을 맡았던 서수민 PD는 이 프로그램을 ‘4인용 밥상’에 비유했다. 부모와 자녀 세대 취향에 맞춰 다양한 코너들을 한 상에 올린다는 의미였다.

끼니때에 맞춰 밥상에 둘러앉는 가족은 갈수록 줄고 있다. 4인 가족이 표준이라는 기준도 과거의 것이 됐다. 2018년 현재 공개 코미디 포맷의 프로그램은 밥상 잃은 반찬 신세가 됐다.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웃찾사), MBC ‘개그야’ 등 지상파 코미디를 대표하던 프로그램들은 사라졌다. 지상파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개그콘서트 시청률은 전성기 시절 4분의1 수준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과거 20~30%대에 육박했던 개콘 시청률은 2013년 15% 안팎으로 떨어진 뒤 2015년에 이르러 9%대를 기록하며 두 자릿수가 붕괴됐다. 시청률이 4%대까지 떨어졌던 지난 8월 언론은 ‘개콘의 몰락’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유료 케이블채널의 경우 tvN ‘코미디빅리그’가 최근 비지상파 동시간대 1위를 차지하긴 했으나 화제성 측면에선 큰 반향이 없다.

‘코미디가 위기’라는 철 지난 문제의 근본 이유는 결국 ‘웃기지 않다’는 데 있다. 몇 년 전만해도 매주 개그콘서트를 애청했다는 한 시청자는 “어느 순간부터 재미가 없어서 개그콘서트 방영 시간대에 TV를 안 봤다”며 “개그 스타일이 이제 유치하다. 억지로 웃음을 짜내는 우스꽝스러운 개그가 웃기지 않는다”고 전했다. 한국갤럽이 매월 발표하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TV프로그램’ 순위에서 개그콘서트는 지난 2015년까지만 해도 대체로 상위 10개 프로그램에 꼽혔으나, 2016년 20위권으로 하락, 지난해 결산에선 상위권에 오르지 못했다.

▲ 과거 시청률이 20%대에 육박했던 KBS ‘개그콘서트’는 지난 8월 4%대 시청률을 기록했다. 20년 가까이 변화 없는 포맷과 상대방을 비하하는 개그 코드가 미디어 환경과 시청자 기호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에 직면했다. ⓒ gettyimagesbank·그래픽=이우림 기자
▲ 과거 시청률이 20%대에 육박했던 KBS ‘개그콘서트’는 지난 8월 4%대 시청률을 기록했다. 20년 가까이 변화 없는 포맷과 상대방을 비하하는 개그 코드가 미디어 환경과 시청자 기호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에 직면했다. ⓒ gettyimagesbank·그래픽=이우림 기자

거부감 높이는 소수자·외모 비하…코미디언들 “시청자 눈높이 높아졌다”

개그콘서트 시청률과 선호도가 하락세에 놓인 시기는 코미디 프로그램에서의 비하·혐오 논란이 표면화된 시기와 겹친다. 2015년 전병헌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공영방송 KBS 개그 프로그램에서 노골적으로 외모 차별주의를 내비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해 방영된 코너 ‘사둥이는 아빠 딸’에선 여성 혐오 표현 중 하나인 ‘김치녀’ 표현을 사용하거나 아버지가 딸의 외모를 비하하며 차별대우하는 내용이 개그 소재로 등장했고, ‘도찐개찐’(표준어는 도긴개긴)에서는 여성 코미디언과 오랑우탄 모습을 비교하며 ‘도찐개찐’이라 외치거나 여성 몸매를 대리운전에 비유해 ‘앞 뒤가 똑같다’고 비하해 비판 받았다.

한국양성평등진흥원과 서울YWCA가 지난 3월 진행한 ‘2018년 대중매체 양성평등 모니터링 보고서’는 개그 프로그램이 구태의연한 모습을 벗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개그콘서트의 경우 ‘올라옵show’ 남성 출연자들이 무대에 올라온 여성 방청객 몸을 잡아 흔들며 “내 여자야”라는 말을 한 대목이 “여성을 소유물로 간주하면서 함부로 대하거나 동의 없이 신체접촉하는 장면 등은 성희롱, 성폭력을 정당화할 여지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봉숭아학당’은 여성 코미디언 얼굴을 만지며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한 사례, 아내가 남편이 벌어온 돈을 성형에 사용한다는 고정관념을 확산한 사례가 비판 받았다.

▲ KBS '개그콘서트' 코너 중 하나였던 '도찐개찐'은 여성 개그맨 외모를 오랑우탄과 비교하며 비하한 사례로 비판 받았다.
▲ KBS '개그콘서트' 코너 중 하나였던 '도찐개찐'은 여성 개그맨 외모를 오랑우탄과 비교하며 비하한 사례로 비판 받았다.

익명을 전제로 입을 연 전·현직 코미디언들도 기존 개그 코드의 한계를 호소했다. A씨는 “시청자들이 과거에 비해 눈높이가 높아졌다”며 “과거 열풍이었던 이봉원 선배의 ‘시꺼먼스’ 같은 코너를 지금 하면 흑인 비하 논란을 받을 것이다. 얼마 전에도 한 코미디언이 시커멓게 분장했다 논란이 된 적이 있다”고 전했다. B씨는 “예전에 몰라서 했던 개그를 이제는 알아서 못하게 되는 측면이 있다”며 “과거 소재로 사용하던 것들을 못하게 되니 솔직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거침없이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TV 프로그램 위기가 코미디언 생존 문제로…“코미디도 바뀌어야 산다”

다만 현재 코미디의 위기를 코미디언들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구조적 문제도 있다. 지상파 공개 코미디에 의존해 온 한국 코미디 시장이 변화한 미디어 환경 속에서 지닌 한계가 있다. 이른바 ‘코미디의 위기는 곧 지상파의 위기’와 맞닿는다는 것. 한 코미디언은 “공개 코미디라는 형식이 처음 생긴 1999년에는 15~20개 코너를 콘서트 형식으로 진행하는 것 자체가 파격적인 시도였다. 지금까지 거의 20년 째 같은 포맷으로 진행하다보니 시청자들이 볼 때는 식상함을 느끼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또 다른 코미디언은 “요즘에는 유튜브나 SNS를 통해서 실시간으로 구미에 맞는 것들을 볼 수 있지 않나. 빠르고 자극적인 콘텐츠를 이길 도리가 없다”고 털어놨다.

코미디 프로그램이 소위 ‘안 팔리는’ 상품이 되면서 붕괴된 기존의 신인 육성 시스템은 악순환을 낳고 있다. 방송사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이 경쟁 구도에 놓여 있을 때에는 지금에 비해 신인들이 자라날 수 있는 시스템이 돌아갔다. KBS의 경우 지난 2005~2006년 ‘실력파 코미디언 발굴을 위한 순수 아마추어 개그 프로그램’을 표방한 심야 시간대 개그 프로그램 ‘개그사냥’이 있었다. 신인 코미디언들이 개그사냥에서 무대 훈련과 실력 검증을 거치면 ‘메이저리그’인 개그콘서트에 오르는 식이다. 인기 코미디언으로 꼽히는 김원효, 김지민, 박성광, 최효종, 김준현 등 KBS 20기 초반 기수들이 이 시스템을 통해 데뷔했다.

그러나 코미디 시장이 활력을 잃으면서 신인이 설 자리가 사라졌다. 개그콘서트는 저조한 시청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지난해 900회 특집을 기점으로 김대희, 신봉선 등 ‘OB의 귀환’을 시도했으나, 시장 변화를 이겨낼 만한 한 수가 되지는 못했다. 한 코미디언은 “시청률이 높지 않다보니 모험을 하기 어렵고 얼굴이 알려진 이들에게 기회를 주는 상황이다. 선배들도 프로그램을 위해 이것저것 병행하다보니 집중하기 힘들고, 후배들은 어차피 스타가 될 기회를 잡기 어렵다는 생각에 선배들 따라 프로그램 나오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세대교체가 이뤄지지 않아 ‘고인 물’이 되고 있다는 것.

등용문이 사라진 코미디언들에게 코미디 프로그램 위기는 생존의 위기다. 지난해 SBS 웃찾사 폐지로 코미디언 150명이 실직했다. 전직 코미디언은 “다른 공채 직군은 월급이라도 받으며 살아가는데 코미디언들은 1년이면 헌신짝처럼 버려진다. 프로그램이 없어졌을 때 어디서 뭘 먹고 사는지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며 “마흔 넘어 사회로 나와 취업하려고 하면 누가 알아주나. 취업도, 결혼도 어렵다”고 전했다. 그는 “사람이 적어서 목소리를 못 냈고 부당해도 부당하다 말 할 수 없었다. 노조도 없지 않느냐”며 “사람들 재밌게 해주려고 한 죄 밖에 없는데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방송사가 너무 가혹했다는 생각도 든다”고 털어놨다.

▲ 개그맨 홍윤화, 김민기 부부는 유튜브 채널 '홍윤화 김민기 꽁냥꽁냥'을 통해 다양한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유튜브 '홍윤화 김민기 꽁냥꽁냥' 갈무리
▲ 개그맨 홍윤화, 김민기 부부는 유튜브 채널 '홍윤화 김민기 꽁냥꽁냥'을 통해 다양한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유튜브 '홍윤화 김민기 꽁냥꽁냥' 갈무리

TV 공개 코미디 시장의 한계를 체감해 방송사 밖에서 활로를 찾고 있는 코미디언들도 있다. 과거 공연의 성지였던 서울 대학로나 홍대 일대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를 비롯한 공연 코미디들이 관객을 만나고 있다. ‘까브라더쑈’, ‘용진호쇼’, ‘홈쇼핑 주식회사’, ‘투깝쇼’ 등이다. 저글링, 마임, 비트박스 등 이른바 ‘논버벌(non-verbal) 퍼포먼스’로 국제 코미디페스티벌에서 각광받고 있는 코미디그룹 ‘옹알스’는 최근 부산코미디페스티벌에서 ‘K코미디스타상’ 대상을 받았다. 팟캐스트 기반으로 성공한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이나 ‘홍윤화 김민기 꽁냥꽁냥’, 이홍렬의 ‘풀벌 이야기’, 이수근의 ‘우리들만의 리그’ 등 유튜브 진출 사례도 부쩍 늘었다. 그러나 이 같은 성공 사례는 전체 코미디언들 중 극소수에 불과하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콩트가 어려워졌을 때 이를 살린 것이 개그콘서트라면 이제는 지금 시대에 맞는 형식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정 평론가는 “유튜브 개인 방송을 끌어안는 형식의 ‘날 보러 와요’(JTBC)나 ‘가로채널’(SBS) 같은 방식을 개발해야 한다. 실시간 방송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온라인 플랫폼을 통한 콘텐츠에 집중하면서 코미디언을 활용하는 방식이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중문화 분야를 취재해 온 서병기 헤럴드경제 선임기자도 “한국 코미디에 대한 논의가 단순히 개콘을 어떻게 살리느냐에 맞춰져선 안 된다고 본다”며 “코미디는 공개 코미디 외에 다양한 장르가 있지만 한국에는 대중적이지 않다. 다양한 장르를 활성화하고 OTT, MCN 전략으로 해외까지 진출할 수 있는 거점 전략도 필요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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