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에서 반대 의견 못내는 사람처럼… 무용계 분위기가 그렇다.”

십수년 동안 무용 안무 활동을 하고 있는 이인성씨(가명)는 연극계를 중심으로 확산되는 문화예술인들의 ‘#MeToo’(미투·나는 고발한다) 운동 참여를 보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다른 문화·예술계열과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음에도 피해자가 쉽사리 피해 사실을 폭로할 수 없는 무용계의 구조적 여건 때문이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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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자신이 직접 혹은 전해 들은 성폭력 사건만 3건이 넘는다고 말했다. 한국무용·현대무용·발레 등 장르를 불문하고 저명한 교수들이 저지른 범죄로, 강제 추행부터 성폭행까지 양상이 다양했다. 여성 무용수가 남성 교수에게 ‘니가 좋다’는 말을 들으며 강제 키스를 당한 성폭력, 남성 무용수가 남성 교수에게 강제 추행 및 성폭행을 당한 사건, 무용단원들이 안무가의 누적된 성희롱·성추행에 무용단 간부에게 문제를 제기했으나 ‘이 얘긴 어디가서 말하지 말라’는 말을 들은 사건 등이다.

이씨는 당사자가 아닌 탓에 섣불리 나설 수 없다. 피해자가 원치 않는 상황에서 피해 사실을 밝힐 경우 2차 가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26일 서울 모처에서 미디어오늘과 만난 이씨는 무용인들이 미투운동에 쉽게 참여하지 못하는 이유로 무용계의 고질적인 폐쇄적 구조를 짚었다. 그에 따르면 무용계는 연극, 뮤지컬, 문학 등 다른 계열보다도 활동 범위가 좁기 때문에 특정 집단에게 권한이 지나치게 쏠려있다. 그가 지적한 특정 집단은 학계의 교수다. 그 중에서도 입학 경쟁률이 치열한 일부 상위권 대학 중심의 얘기다.

무용인들은 입시부터 사회진출까지 교수의 영향권 아래 있다. 이씨는 이를 ‘필드와 교육이 분리가 되지 않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대학을 벗어난 무용활동 현장, 달리 말하면 무용인의 ‘밥벌이’를 학계의 교수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의미다. 예술 중·고교, 대학 등에 출강을 나갈 때도 교수의 배경이나 힘이 필요하다. 무용은 연극이나 실용음악만큼 상업 영역이 활성화 돼있지 않아 강의 자리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더욱 귀하다.

불과 4~5년 전까진 각종 지원사업, 콩쿨 등을 심사하는 위원도 대부분이 교수진이었다. 이씨에 따르면 무용계에서 평론가나 안무가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지는 4~5년이 되지 않았다. 그는 근래 서울문화재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의 기관이 다양하게 지원사업을 시행하면서 이제야 다양한 집단에게 결정권을 나누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그 전까지 무용인이 교수의 영향권 아래 있는 무용단에서 나와 독립적으로 활동을 하는 것은 ‘맨 땅에 헤딩’ 같은 일이었다. 지원사업이 다양화된다고는 하지만 1~2년 후에도 재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불확실하다. 콩쿠르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하면 출강 자리 등 경제활동이 안정적으로 보장된다. 이런 극심한 불안정이 유명세를 타는 무용 교수들의 권한을 막강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남성 무용인의 경우엔 군대 면제 쟁점도 있다. 현대무용과 발레의 경우 ‘서울국제무용콩쿠르’와 ‘코리아국제현대무용콩쿠르’ 등에서 1·2위로 선정되면 사회복무요원으로 군대를 대체할 수 있다. 한국무용은 동아콩쿠르와 신인콩쿠르 1·2위 수상자가 대체복무 자격을 가진다. 

콩쿠르 심사위원은 대부분이 교수진이다. 이씨는 “올해는 ‘어느 대학의 파워가 세니 누가 선정될 것이다’ 등의 말이 미리부터 나돌아 다니는 게 무용계 실상”이라며 “물론 모두가 그렇지 않고 콩쿠르에서 낮은 점수를 받은 사람의 불만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이런 현실을 수긍하는 무용인이 더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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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문제는 공고한 위계질서 속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게 이씨의 지적이다. 이씨는 성폭력 뿐만 아니라 ‘갑질’도 일상화됐다고 지적했다. 이씨는 제자 안무가가 짠 안무를 일방적으로 바꿔버리거나, 제자 안무가가 안무를 다 짰음에도 크레딧에 교수 이름을 넣는 사건들을 적지 않게 봤다. ‘니가 그러고도 무용을 할 수 있을 것 같냐’는 반협박조의 호통도 종종 들었다고 했다.

무용계처럼 필드와 교육이 분리되지 않은 예술계열은 상황이 마찬가지일 것이란 게 그의 추측이다. 바꿔 말하면 학계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덜한 연극·방송계에서나마 좀 더 많은 종사자들이 미투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물론 연극계도 사정은 비슷하다. 오성화 문화기획자는 지난 26일 한국여성단체연합의 주최로 열린 긴급 토론회 ‘우리는 아직도 외친다. 이게 나라냐!’에서 연극계의 ‘1인 구조 체제’를 언급했다. 오 기획자는 “연극은 일반적 생산구조를 따르지 않기에 국가지원이 많은 영역인데 예술지원사업을 결정하는 권한이 연출가나 대표에게 집중돼 있다”면서 “정보와 돈, 작품을 결정할 권한이 1인 몰려있는 체제를 들어다 봐야 한다”고 말했다. 연극계 미투운동으로 폭로된 가해자 대부분이 연출가나 극단 대표였다.

현재 미투운동은 검찰·문학·언론계를 지나 연극, 영화, 방송, 대학, 대중음악 등으로 확장되고 있다. 보다 페쇄적인 예술계열인 사진계 등에서도 미투 고발이 나왔다. 배병우 사진작가는 서울예대 사진과 교수로 재직 당시 제자들을 성추행하고 성희롱을 일삼았다는 주장이 제기된 후 “철저히 반성하며 상처를 받으신 분들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공식 사과했다. 만화계 웹툰작가 이태경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애니메이션과 교수인 박재동 화백이 2011년 자신을 성추행했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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