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삼상회의가 계속되던 1945년 12월27일 동아일보는 1면 머리에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철학자 도올 김용옥이 최근 자신의 책 ‘우린 너무 몰랐다’에서 이 희대의 오보, 혹은 의도된 대중선동 보도가 한반도의 역사를 엉망으로 만들어놨다고 지적했다.

동아일보는 삼상회의 논의의 핵심을 ‘신탁통치’라고 짚었다. 그 내용은 ‘38선 분할점령’이란 인상을 준다. 그러나 도올은 “동아일보는 ‘남북이 하나의 임시조선민주정부를 설립한다’는 당시 삼상회의 논의 핵심을 완전히 빼버렸다”고 분석했다. 

한반도 역사를 바꾼 동아일보의 가짜뉴스

동아일보는 미국이 “신탁통치안을 반대했고 그 대신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고 했는데, 도올은 당시 미국과 소련에게 조선의 ‘즉시 독립’은 생각할 수 있는 카드가 아니었다고 반박한다. 도올은 ‘즉시 독립’은 삼상회의에서 얘기된 적도 없다며 동아일보의 “완벽한 오보였다. 아니 ‘오보’라기보다는 의도된 대중선동이었다”고 짚었다.

▲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던 덕수궁 앞에서 반탁시위를 벌이던 군중들. 사진=위키백과
▲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린 1946년 5월 덕수궁 앞에서 반탁시위를 벌이던 군중들.  사진=위키백과

 

특히 ‘신탁통치안’은 오히려 미국이 먼저 제시했다. 소련은 원래 조선을 통치할 생각이 없었다. 토지개혁이나 계급혁명을 통한 사회주의적 유대감을 더 강조했던 소련은 신탁통치라는 발상에 관심이 없었다. 소련은 미국이 신탁을 제안하자 오히려 신탁이 빨리 종결될수록 좋고, 최장 5년을 넘어선 안 된다고 한도를 제시했다.

동아일보는 외신의 오보에 의거했다고는 하나 국민들에게 반소·반공 분위글 조성하려는 의도에서 선동적으로 1면에 등장시켰다. 왜 그랬을까. 도올은 “그것은 동아일보가 한민당(한국민주당) 기관지였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고 해석했다.

친일지주 세력이 한민당·동아일보 연결고리

한민당은 해방 직후 움츠려 들었던 지주와 친일세력이 1945년 9월8일 서울의 윤보선 집에 모여 창당을 선언하면서 출발한다. 여운형의 인민공화국에 대항하려고 모든 우파세력이 광범위하게 연합해 최대규모의 연합보수우익정당을 만들었다. 한민당은 9월16일 천도교 대강당에서 1600여명이 모여 성대한 창당대회를 열었다.

지주와 친일세력인 한민당은 고육지책으로 ‘중경임시정부의 적통성을 지지한다’고 내걸었다. 오늘날 우리 헌법 전문에 나오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말의 근원도 따지고 들어가면 한민당의 임정지지 강령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렇게 해서 임정세력과 한민당은 굳건한 동지가 됐고 ‘신탁통치 반대’라는 명분으로 두 세력이 결합했다. 동아일보는 이 결합을 조정했다. 동아일보 보도가 나간 12월27일 당일 한민당은 중집을 열어 신탁통치 배격을 결의했다.

당시 송진우는 동아일보 주필 겸 사장이었고 한민당 초대 당수였다.

송진우는 하지를 만나 신탁통치는 본래 미국 입장이었다는 말을 들었고 외신의 오보를 동아일보가 받아썼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세밀하게 영문을 읽는다.

송진우 암살로 이 땅에 건강한 보수는 사라져

송진우는 삼상회의 논의의 핵심이 ‘신탁통치’가 아니라 ‘임시조선민주정부의 수립을 위한 미소 양국의 합리적인 후견’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송진우는 정직한 교양인이자 고매한 유학자라서 거짓을 그대로 용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송진우는 경교장에

▲ 고하 송진우. 사진=기념사업회
▲ 고하 송진우. 사진=기념사업회

연락하고 12월29일 밤 김구를 찾아간다. 송진우는 거기서 ‘반탁운동’의 정당성 없음을 역설했다. 김구는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자는 매국노’라며 송진우에 맞섰다. 김구는 ‘민중의 데모로 미군정의 통치권을 임정이 이양받아야 한다’는 속셈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송진우는 12월30일 새벽 6시15분 자택에서 암살됐다. 한국현대사 최초의 정치암살이었다. 사람들은 송진우 암살의 배후를 김구라고 말한다. 그러나 도올은 “이는 낭설이다. 김구가 외롭게 귀국했을 때 모든 물질적 정착기반을 마련해준 사람이 송진우”라며 송진우 암살 이후 수혜자에 더 주목한다.

송진우 죽음의 최대 수혜자는 이승만이었다. 송진우 사후 한민당은 급속히 이승만으로 기울었다. 도올은 “이 시점부터 이 땅에 건강한 보수세력은 사라졌다”고 단언한다.

도올, 미소 양국의 ‘신탁통치안’ 수용했어야 

도올은 “당시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논의했던 ‘신탁통치안’ 즉 ‘공동후견제 임시민주정부 수립방안’은 반대할 성격의 것이 전혀 아니다”며 동아일보의 오보가 낳은 한국 현대사의 굴절을 설명해 나간다. 미소 두 강대국이 스스로 적당한 기간 트러블 없이 조선인 스스로 타협점에 도달하게 만들고 평화롭게 빠지겠다는 의지로 ‘신탁통치’를 제안했다는 것이다. 도올은 “미소공동위원회는 바람직한 방안을 내놨다”고 평가했다.

그런 뜻에서 도올은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철저히 신탁통치 찬성이라는 합리적 태도를 견지했다”고 평가한다. 도올은 “당시 전 국민이 일치단결해 신탁통치를 찬성했어야 했다. 그러면 분단도 일어나지 않았고, 제주4·3도 여순민중항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시대배경을 모르면 제주 4·3과 여순민중항쟁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한편 동아일보는 학계의 이런 주장에 2004년 12월12일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이란 연재기사 ‘삼상회의 보도’편에서 “그 기사를 동아일보가 최초로 보도했다고 하는 일부 학자의 주장은 중대한 오류다. 더욱이 이 같은 그릇된 전제 위에서 동아일보 보도가 반탁운동 격화의 도화선이 됐다고 몰아가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고 보도했다. 당시 조선일보와 서울신문도 같은 논조로 보도했다는 것이다. 동아일보의 주장이 맞다해도 동아일보를 비롯한 당시 언론이 삼상회의 내용을 잘못 전한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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