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 공방”, “진실 공방”, “마지막까지 치열한 공방”. 27일 열린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등 사건 결심공판에 언론이 붙인 이름이다.

27일 하루 동안 포털 네이버에는 공판을 다룬 기사가 452건 전송됐다. 재판부가 엠바고(보도시점 유예)를 푼 오전 11시45분께부터 밤 12시 사이, 12시간 동안의 일이다. 그 가운데 이른바 따옴표 보도, 즉 제목에 검찰‧김씨‧안 전 지사의 말을 직접 인용한 보도는 291건(64.4%)이었다.

재판을 ‘불꽃 공방’ 류 반열에 올린 것은 언론이다. 재판에서 오간 법리 논쟁을 외면한 채 양측의 표현을 따와 극적으로 대조시켰다.

27일 재판에서 오간 것은 진실공방이 아니다. 안 지사 측 변호인은 이날 최후변론에서 “피해자 김씨의 진술이 일관되고 신빙성 있다는 걸 인정한다”고 말했다. 변호인은 “지위 고하에서 오는 신분상 차이로 인한 불평등도 있다. 위력이 존재한다”고도 인정했다. 안 지사가 김씨에게 누누이 당부했다는 김씨 진술 내용도 인정했다. “거울처럼 투명하게 비춰라, 그림자처럼 살아라” “수행비서는 모두가 ‘노’ 할 때 ‘예스’ 하는 사람” “마지막까지 지사를 지켜라” 등이다. 

변호인단은 범행 직후 혹은 과정에서 김씨에게 피해사실을 들은 증인이 있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데이트, 식사, 커피 한 번 따로 한 적 없다”는 검찰 측 진술도 반박하지 않았다. 3월5일 폭로 직후 안 전 지사의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비서실 입장은 잘못”이라는 온라인 글도 반박하지 않았다.

▲ 성폭행 의혹을 받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지난3월19일 오전 서울서부지검에 출석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다가 국민과 지지자, 아내 등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 성폭행 의혹을 받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지난3월19일 오전 서울서부지검에 출석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다가 국민과 지지자, 아내 등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재판의 핵심은 ‘위력을 행사했느냐, 아니냐’는 법리 공방이었다.  공판을 지켜본 여성학자이자 전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 권김현영씨는 “전날 사실에 대해선 아무것도 공방하지 않았다. 양측 변호인단의 진술은 해석 공방이었다”고 말했다. 배복주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상임대표는 “재판은 사실관계 공방과 무관하다. 관건은 일상에서 수직 관계였다가, 어떻게 그 (성관계 요구) 순간 평등하게 거부 의사를 표시할 수 있는지 안 전 지사 측이 입증하느냐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언론은 이 위력을 둘러싼 양측의 주장을 살펴야 했다는 지적이다.

김씨 측은 위력이 행사됐다고 주장했다. 안 전 지사 측은 김씨와 동등한 관계였다고 주장했다. 재판의 핵심인 법리 공방에 집중하면, 양쪽 가운데 어디에 무게가 실리는지는 명백하다.

안 지사 측 변호인단의 ‘위력 행사는 없었다’는 주장의 근거는 김씨 태도가 ‘통상 성범죄 피해자와 달랐다’는 것이다. △김씨가 의사표시 및 상황인식 능력이 뛰어남에도 사건 당시 명백한 거부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고. △김씨가 사건 이후 도피하지 않고, 실수 없이 직무를 수행했으며 △안 전 지사 및 제3자에게 안 전 지사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는 것이다. 변호인단은 “피해자의 말과 행동과 생활이 심각하게 불일치하며, 결국 이는 성폭행 피해자가 아니라는 의미”라고 주장했다.

권김씨는 위 세 가지 사항은 “(양 측이) 얼마나 아끼고, 평등한 관계이며 연애 관계였는지를 조금도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먼저 “김씨가 안 전 지사를 챙기고, 살갑게 이모티콘을 보내며 안부를 묻는 일은 원래 수행비서로 해왔던 직무”인 까닭이다. 김씨의 피해 이후 행동을 두고도 “성폭력 피해자 트라우마는 굉장히 다양하게 표현된다”고 풀이했다. 권김씨는 “안 지사 측이 기껏 제시한 증거는 김씨가 보직이 달라지자 섭섭해 했다거나, 안 전 지사가 (김씨를) 알아봐주는 걸 중요시했다는 문자메시지”라며 “이는 조직 내 권한이 한 사람에게 집중될 때, 상대방에게 모든 신경이 집중됨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언론은 양쪽 발언을 단순 전달했다. 그것도 김씨 발언 취지보다는 자극적 표현에 주목했다. 언론은 133건의 보도에서 김씨 최후진술을 제목에 직접인용했다. 전체 공판보도의 3분의1 규모다(29.4%). 대부분 “어떤 여자와도 잘 수 있다는 안희정” “비정상적 성적 욕구 숨기지 못해” “밤에 한강 가서 뛰어내리려고도” “안 전 지사 정신적 문제가” 등 선정적 문구를 내세웠다. 오후 안 전 지사의 최후진술 직전까지 106건 보도했다. 안 전 지사 진술 후에는 그의 발언만 인용하거나(47건, 10.4%), 양쪽을 대결 구도로 인용(29건, 6.4%)한 제목을 주로 내보냈다. 배 대표는 “휴정하자마자 ‘김지은, ‘안 지사 남자로 생각한 적 없다’’는 속보가 떴다. 그 내용을 속보로 낸다는 게 단적인 예”라고 말했다.

▲ 지난 7월13일 오전 수행비서 성폭력 의혹으로 재판 중인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5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등 회원들이 ‘증인 역고소’에 항의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 지난 7월13일 오전 수행비서 성폭력 의혹으로 재판 중인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5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등 회원들이 ‘증인 역고소’에 항의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자극적 따옴표 보도는 피해자 진술 취지와 어긋난다는 지적도 나왔다. 배 대표는 김씨 측 변호인단이 엠바고 직후 피해자 최후진술 전문을 기자들에게 제공했다고 밝혔다. 김씨가 진술에서 ‘위력’을 강조하고자 했고, 전체 의도를 (언론이) 봐주길 바란 까닭이다. 배 대표는 “그러나 보도를 보니 ‘피해자가 더 있다’ ‘영혼 파괴’ 등 자극적 문구를 주로 (제목에) 사용했다”고 말했다.

이전 공판 보도에서 언론은 진실공방에 속하지 않는 영역을 공방으로 비화시키기도 했다. 안 전 지사의 아내, 민주원씨 증언 보도다. 민씨는 피해자가 안 전 지사를 이성으로 좋아했다고 여길만한 증언을 유일하게 했다. 언론은 민씨 발언을 검증하지 않았다. 권김씨는 “민주원씨는 안 전 지사 가족이기에 위증죄 적용 대상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보통 가족의 증언은 신빙성이 낮다고 여겨 재판부가 ‘감안하고 들으라’고 권한다”는 것. “연애관계 여부는 상당히 큰 쟁점이다. 이를 짚어주는 보도가 없어 피해자만 이상한 사람이 됐다”고 풀이했다. 언론이 프레임 전쟁에서 말렸다는 해석이다.

따옴표 보도는 이 재판이 담고 있는 사회적 맥락도 담지 못했다. 배 대표는 이번 ‘미투 재판’이 사회적 의미를 지녔다고 말했다. “미투 폭로의 다수가 권력형 성폭력에 해당한다”며 “사건의 중요성과 쟁점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력’의 개념이 중요하다”고 배 대표는 다시금 강조했다.

권김씨는 “따옴표 보도를 해도 사회적 맥락을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테면 안 전 지사의 최후 진술도 직접 인용하는 데 그칠 게 아니라 위력이 없었다는 주장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보도가 맥락과 관점을 지녔느냐 여부다. 한겨레는 28일 기사에서 △ 재판의 핵심 쟁점 △2차가해 길 열어준 재판부 △언론의 자극적 보도 등 이번 재판에서 나타난 문제를 정리했다.

[관련 기사: 2차가해 ‘지옥도’ 펼쳐놓고 “나서라, 싸워라” 할 수 있을까요]

한편 피고인 안 전 지사 측 변호인단이 최후변론하는 동안, 방청석 곳곳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현장에서 발언 전체를 들은 이들에게는 재판의 핵심 쟁점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언론이 공방을 강조하며 오히려 쟁점을 가리진 않았는지, 선명한 사안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았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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