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기사에 대해 양상우 한겨레 사장이 기사 수정을 요구해 이를 두고 편집권 침해 논란이 일고 있다. 해당 기사는 지난 6일자로 나온 “박근혜 때도 기업 보수단체 거액 지원 계속돼”, “청(청와대)·국(국정원)·대(대기업) 삼위일체로 지원”이라는 제목의 한겨레21 1186호 표지 기사 2건이다.

기사를 발제하고 취재하는 단계부터 김종구 한겨레 편집인이 길윤형 한겨레21 편집장에게 표지 메인을 차지한 해당 기사를 다른 기사로 교체할 것을 요구했고, 길 편집장이 사표를 내겠다며 이를 거부하자 양 사장이 직접 나서며 논란이 커졌다.

복수의 한겨레 관계자 말을 종합하면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한겨레21은 LG그룹이 박근혜 정부 시절 지주회사 (주)LG를 통해 국가정보원 화이트리스트 단체인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공학연)에 1억 원을 지원한 내용이 담긴 영수증(세금계산서)을 단독 입수했다. 이를 1186호(11월6일자)에 싣기로 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박근혜 정부 청와대에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을 압박해 친정부단체에 68억 원을 지급한 사실을 확인했다. 이번에 한겨레21이 입수한 ‘물증’은 재벌이 전경련을 통하지 않고 직접 보수단체에 자금을 지원한 사실을 보여준다. 대기업과 보수단체 연결고리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며, 다른 재벌에 대해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는 내용의 기사였다.

▲ 한겨레21 1186호 표지
▲ 한겨레21 1186호 표지

주간지 한겨레21은 매주 월요일에 회의 등을 통해 아이템을 정하고 주중에 취재를 마친 뒤 목요일부터 금요일 야간까지 마감 작업을 해 그 다음 주 월요일 날짜로 발간한다. 한겨레21은 출판국 소속이므로 고경태 출판국장이 한겨레21 편집인 역할을 맡고 직제는 ‘양상우 대표이사(사장)-김종구 편집인-고경태 출판국장-길윤형 한겨레21 편집장-한겨레21 기자들’ 순이다.

한겨레21 취재 기자는 지난달 30일 이후 LG쪽 취재에 들어갔다. 그러자 LG 임원이 한겨레 본사를 찾았고 한겨레 콘텐츠를 총괄하는 위치에 있는 김 편집인을 만났다. 김 편집인은 LG 임원과의 만남에 대해 미디어오늘에 “LG 전무가 회사에 찾아온 걸 점심에 우연히 만나 차 한 잔 하자고 했더니 한겨레21 표지기사에 대해 하소연을 하더라”라며 “그래서 ‘살펴보겠다’고 얘기했고, 항의가 들어왔으니 기사를 들여다 본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6일자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겨레지부(지부장 지정구) 노보에 따르면 김 편집인은 지난 1일 양 사장과 고 출판국장을 불러 “표지이야기를 교체하는 게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 김 편집인에 따르면 양 사장과 고 출판국장 모두 기사 발제를 봤을 때부터 우려할 만한 부분이 있었고, 우려한 점이 실제 기사에 반영됐기 때문에 ‘표지이야기 감이 안 되는 기사’로 판단했다. 이에 길 편집장은 고 출판국장이 전달한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사표를 내겠다며 맞섰다.

그러자 목요일인 지난 2일 김 편집인이 길 편집장을 불러 ‘해당 기사가 함량이 떨어지니 표지이야기에서 빼고 무리하게 의혹을 제기해선 안 된다’는 뜻을 알렸다. 취재 기자는 아직 기사를 쓰지 않은 상황이었다. 통상 한겨레21 표지이야기는 금요일에 마감하지만 이 기사에 대해선 목요일에 마감하라는 요청이 있었다고 한다. 취재 기사가 쓴 초고에 비해 길 편집장이 데스킹을 본 원고의 분량이 다소 늘었다. 해당 기사에는 “LG지주사가 삼성의 미래전략실과 같은 위치에 있다” 등 LG 재무 쪽 직원의 비판적인 코멘트가 있는데, 여기에 LG지주회사의 적절성을 설명하는 부분을 추가하고, LG 측의 해명 등도 추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요일인 3일 기사를 본 김 편집인이 A4 2쪽 분량으로 기사에 대한 평가를 담아 고 출판국장을 통해 길 편집장에게 전달했다. 해당 문서에는 함량미달인 기사라며 ‘참 딱하다’ ‘뒷북 기사다’ 등의 표현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오후 3시경 사장실에서 양 사장과 길 편집장이 만났다. 김 편집인은 “길 편집장이 자신의 인사 문제까지 거론했기 때문에 사장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양 사장은 길 편집장이 데스킹한 기사 출력물에 펜으로 밑줄을 그으며 내용을 지적했고, 길 편집장은 “쓴 것을 달라”며 출력물을 받아갔다. 마감이 임박한 이날 오후 6시경 양 사장은 지적 사항 9가지를 정리해 길 편집장 카카오톡 메시지로 전달했고, 이 중 일부가 기사에 반영됐다.

▲ 양상우 한겨레 사장이 길윤형 한겨레21 편집장에게 보낸 지적사항. 자료=언론노조 한겨레지부
▲ 양상우 한겨레 사장이 길윤형 한겨레21 편집장에게 보낸 지적사항. 

사장의 지적 사항 중에는 “‘한겨레21’은 LG의 이 같은 해명을 존중한다”는 기사 원문에 대해 “(스트레이트) 기사 표현 형식에 맞지 않는 건 빼는 게 낫겠다”는 사장의 지적이 있다. 사장 의견이 반영돼 실제 기사에서 빠졌다. 사장의 지적 자체가 타당해 보이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이 문장은 취재 기자가 작성한 초고엔 없던 내용이다. 데스킹 과정에서 LG의 입장이 과하게 반영됐다가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양 사장과 김 편집인은 ‘콘텐츠 질 향상’도 언급했다. 김 편집인은 “왜 세금계산서를 발행했는가를 지적하는데 실제 기업이 협찬을 하면서 자료도 없이 거래하는 게 더 문제가 아니냐”, “영수증이 아니라 세금계산서가 적확한 표현이다”, “세금계산서에 LG전자 사장(조준호)과 LG그룹 회장(구본무) 이름이 적혀있는 거에도 의문을 갖는데 대표이사니 이름을 적게 돼 있는 것일 뿐이다”, “기업과 보수단체를 잇는 ‘컨트롤타워’가 있다고 의혹을 제기하는데 그 근거가 없다” 등을 지적했다. 노보에 따르면 기자들은 “대표이사와 편집인 주장이 지속해서 반영되면서 기사 주제가 흐리멍덩해졌다”며 오히려 질이 나빠졌다고 반박했다.

편집권 침해인가

한겨레 노사 단체협약 편집권 규정에 따르면 ‘기본적 편집방침’은 대표이사를 비롯한 전체 구성원이 가지고 있고, ‘개별기사 취급결정권’은 전체 기자들이 공유하며 편집위원장에게 귀속된다. 김 편집인은 이를 대표이사에겐 ‘정확한 사실보도’ 등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에 대한 편집권이 있고, 한겨레21 편집장에겐 기사 분량이나 배치 등을 결정하는 권한이 있다고 해석했다.

양 사장의 개입은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고 의혹 제기에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기본적 편집 방침’을 행사한 것이라는 게 김 편집인의 주장이다. 김 편집인은 “이 사건은 ‘사장의 편집권 침해 사건’이 아니라 ‘함량 미달 기사 고집 사건’”이라고 했다.

지난 7일 양 사장·김 편집인·고 출판국장·한겨레21 기자들이 모여 이 문제를 두고 토론을 벌였지만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한겨레21 기자들 일부는 지난 10일 양 사장에게 개별 보도에 대한 개입을 멈추라고 비판하며 사과와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양 사장은 부당하게 편집권을 개입한 사실이 없으니 사과할 필요도 없다는 입장이다.

재벌 광고주 의식한 건 아닌가?

이 사건이 민감한 이유 중 하나는 재벌 비판 기사이기 때문이다. 김 편집인이 LG 임원을 만난 이후 일련의 사태가 벌어진 점, 한겨레21 해당 호가 나온 지난 6일자(월) 한겨레 백면(28면)에 LG전자 전면 광고가 실린 점 등 때문에 한겨레 경영진이 LG를 의식한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양 사장 측과 김 편집인은 “우연일 뿐”이며 광고 문제와 관계없다고 반박했다.

한겨레는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가장 강도 높게 비판한 언론사 중 하나다. 삼성 광고가 대폭 줄어 재정난을 겪고 있다. 연 70억~100억 원 수준의 최대 광고주인 삼성의 눈치를 보지 않은 한겨레가 LG 눈치를 보겠냐는 게 양 사장 측 관계자의 설명이다.

양 사장이 올렸던 페이스북 글

기자들과 경영진의 토론과 비판이 오가던 중 양 사장은 고 출판국장을 통해 지난 13일 “부끄럽고 유감이다”는 뜻을 전달했다. 공방이 일단락되는 듯 했지만 다음날 양 사장이 페이스북에 남겼다가 지운 글이 논란을 다시 키웠다.

▲ 양상우 한겨레 사장. 사진=이치열 기자
▲ 양상우 한겨레 사장. 사진=이치열 기자

양 사장은 페이스북에 “부끄러운 일들이 끊이지 않는다”며 “거센 파도가 몰려오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직 남의 일처럼 관심도 없다. 심하게 흔들리는 배 위에선 자기 소유물 찾기 바쁠 뿐”이라고 남겼다. 이어 “20년 전 대우그룹 붕괴 당시의 모습이 꼭 이랬다”며 “권한과 책임을 가진 간부들이 권한을 행사하기 꺼려한다. 책임지는 게 싫어서다” 등의 내용도 남겼다.

양 사장 측 관계자는 “한겨레21 논란만을 가리킨 내용은 아니”라며 “구성원들 중 권리 의식은 강한데 책임 의식이 부족한 간부들이 일부 있어 위기감을 불러일으키려 글을 올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주변에서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많아 글을 내렸다고 전했다.

이에 한겨레지부는 16일 성명을 통해 “사실상 편집권을 침해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문제의 책임을 구성원에게 돌리는 모습은 한겨레신문사 대표이사로서 해야 할 일은 아닐 것”이라며 “이 글을 접한 한겨레21의 한 조합원은 ‘출판국장과 편집장에게 한 말로 이해를 한다’는 입장을 밝히며 매우 불쾌해 했다”고 비판했다.

한겨레지부는 “경영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에도 회사를 ‘침몰하는 배’에 비유하고, 구성원을 탓하며 질타하는 대표이사의 모습에 구성원 모두는 깊은 상처를 받았고 자괴감에 빠졌다. 언론 산업이 위기에 처해 ‘거센 파도가 몰려오는 모습을 보면서도’ 명색 중앙일간지 대표이사가 기자들의 개별 기사를 데스킹할 시간이 있는가? 기자들과 ‘내가 옳니’, ‘네가 옳니’하는 토론을 벌일 시간이 있는가? 밤늦게 SNS에 회사 간부들을 비난하는 글을 올릴 시간이 있는가?”라고 비판하며 편집권 침해 사태와 부적절한 글 게재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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