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성폭력 피해당사자의 동의 없이 그가 누군지 알게 보도해선 안 된다. 이는 언론중재위원회 심의기준 제4조의 내용이다. 이 조항은 “피해자를 특정할 수 있는 내용을 피해자 동의 없이 공개해선 안 된다”는 내용의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24조에 근거한 기준이다. 한국기자협회와 여성가족부도 이 법을 토대로 피해자 보호 우선 원칙 등을 상세하게 제시했다. 이를 위반하면 피해자는 준비도 없이 2차 피해를 받는다.

지난 4월 SBS는 한 기업에서 발생한 성희롱 사건을 단독 보도했다. ‘최근 회사를 떠난 A씨가 퇴사 과정에서 고위 임원의 접대성 술자리 참석 강요사실을 털어놨다’ 등의 내용을 전했다. 해당 기업에선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해명했고, A씨가 자신이 겪은 일을 한 국가기관에 제보했다는 내용도 이어졌다.

A씨는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SBS 보도 직후 ‘제보자 너 맞지’, ‘인기인이네’, ‘어떤 심경 변화가 있어 제보했냐’ 등의 연락을 100건 이상 받았다”며 “심지어 회의 한번 해서 기억도 안 나는 사람한테도 연락이 왔다”고 말했다. 기사에서 기업 이름, 피해자의 직급, 대략의 퇴사 시점, 술자리를 강요한 임원의 개인정보 등을 밝히면서 SBS가 A씨를 특정했다는 게 A씨의 주장이다.

▲ 서울 목동 SBS 사옥. 사진=SBS
▲ 서울 목동 SBS 사옥. 사진=SBS

보도 직후 A씨는 자신이 국가기관이나 SBS에도 제보하지 않았으니 기사에 나온 A씨가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실제 A씨는 몸이 좋지 않아 퇴사했고, 성희롱 사건을 공론화하지 않고 회사 내 극소수 인사에게만 털어놨다. 보도 이후 자신을 제보자로 생각한 지인들과 회사 측의 원치 않는 질문과 항의가 빗발치자 A씨는 SBS에 연락해 기사삭제를 요청했다.

SBS는 메인뉴스 뿐 아니라 아침 교양 프로그램, 비디오머그 등에도 해당 사건을 보도했다. 당시 A씨가 “인터뷰하거나 동의 받은 적 없으니 기사를 내려달라”고 요청하자 SBS 취재기자는 “기사에 (A씨와) 인터뷰했다고 나오지 않는다”며 “내부에서 얘기했는데 기사를 내리긴 힘들고 원하는 대로 수정해주겠다”고 했다. A씨는 ‘A씨가 털어놨다’는 부분 등을 보면 A씨가 제보자로 보인다고 주장했고, 취재기자는 ‘SBS가 아닌 회사 측에 털어놨다는 뜻’이라고 반박했다.

4월 중순 경 취재기자는 해당 사건 이후 제보자들이 더 있었고 나쁜 관행을 바꾸는데 도움이 됐다는 내용의 기자수첩을 작성했다. A씨는 “가만히 있으면 조용해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SBS 기자에게 기사 내려달라고 요청할 때 했던 말을 일부 인용해서 기사를 또 썼다”며 “삭제해달라는 통화를 하면서도 기자는 나에게 계속 다른 피해자 연락처를 물어보는 등 취재를 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취재기자는 지난 27일 미디어오늘에 “A씨는 제보자가 아니었고, 제보자가 더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기사를 썼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며 “해당 기업 직원에게 특정인의 신원을 물어보면 또 다른 피해자의 신원이 드러날 수 있어 A씨에게 물어봤다”고 말했다.

SBS 보도를 인용한 다른 매체 기사들을 보면 다른 기자들도 A씨를 제보자로 해석했다. “A씨가 폭로했다”, “퇴사자의 제보” 등의 표현이 기사에 등장했다. A씨는 성희롱 피해자가 겪는 2차 피해뿐 아니라 내부고발자가 겪는 다양한 고통까지 더해졌다. A씨는 SBS 보도 이후 회사를 떠난 임원에게서 “너가 제보한 거 맞네” “XXX 너 소송할 거야” 등의 협박을 듣기도 했다.

▲ SBS 뉴스 로고
▲ SBS 뉴스 로고

A씨는 “조용히 살고 싶어서 문제제기도 안하고 퇴사했는데 SBS 기사 때문에 내가 ‘술 따라주고 노래방 다녀서 승진했다’는 얘기까지 들어야 하느냐”고 말했다. 신원이 알려지자 A씨가 회사에서 활동한 사진 등도 퍼졌다. A씨가 회사에 요청해 사진은 내려갔지만 미디어오늘 확인 결과 약 5개월이 지난 8월말 현재도 구글에서 해당 기업이름에 A씨 초성만 입력해도 A씨 이름이 함께 나왔다.

A씨는 모르는 번호로도 계속 연락 오는 게 무서워 보도 직후 한 달은 휴대폰을 켜지 못한 채 살았다고 전했다. A씨는 외출이 어려울 만큼 불안을 호소했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전문가를 찾았다. SBS 보도를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생각을 하던 중 성폭력 피해자와 지지자들의 모임인 전국미투생존자연대(대표 남정숙)를 알게 됐다. 언론에 의한 2차 피해 구제를 위해 A씨는 지난 6월말 A씨를 제보자로 특정한 매체 5곳과 SBS 등을 상대로 언론중재위원회(언론중재위)에 기사 삭제와 손해배상을 요청했다.

SBS는 기사를 삭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SBS는 “제보를 받고 나서 피해자를 찾는데 주력했지만 피해자가 퇴사를 했고 주변을 수소문해도 연락처를 구하지 못했다”며 피해자에게 동의를 얻지 못한 이유를 설명했다. 피해자가 2차 피해를 주장한 것에 대해 SBS는 “2차 피해는 보도로 인한 문제가 아니라 해당 기업 내부 직원들이 피해자를 대하는 태도, 가해 임원의 반성하지 못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문제”라고 밝혔다.

논란의 기사에도 “사안이 공론화되는 것을 A씨가 원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오지만 SBS는 성희롱 사건이라 하더라도 피해사실이 피해자 소유물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SBS는 답변서에서 “피해자는 동의 없이 자신의 사례를 보도하자 SBS에 손배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나, 사안마다 일일이 당사자에게 동의를 받아야만 보도할 수 있다는 주장은 법적 근거가 없고 현실적이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A씨는 언론중재위 조정 과정에서 보도 피해자에게 불리한 부분이 있다고도 지적했다. A씨는 “위원이 5명인데 판사 1명, 변호사 2명, 언론인 출신 2명인데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언론인 출신 위원들은 ‘언론사가 기사를 삭제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등의 질문을 계속했다”고 말했다.

A씨는 “SBS의 주장은 결국 해당 기업문화를 바꾼 공익 보도였으니 한명쯤 희생해도 된다는 논리”라며 “이런 주장을 하면서도 SBS 쪽에선 ‘A씨가 해당 기업에 소송을 준비 중이라는데 맞느냐’ 등 사실이 아니면서 사안과 무관한 얘기를 꺼내 압박했다”고 말했다. 중재위원 중 인권 전문가를 배치해 보도 피해자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A씨의 주장이다.

▲ 언론중재위원회.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 언론중재위원회.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3차에 걸친 조정에도 SBS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결국 언론중재위는 지난 14일 SBS에 해당 기사 삭제와 300만원 손해배상 조정결정을 내렸다. SBS를 인용한 매체의 경우 1곳은 기사만 삭제, 4곳은 손해배상과 기사 삭제로 결론이 났다.

SBS는 지난 27일 언론중재위 결정에 불복했다. SBS는 “해당 기사는 신청인(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이 아니므로 기사 전체를 삭제하라는 중재부의 결정은 부당하다”며 “300만원 지급 역시 기사에 어떠한 위법성이 없음에도 근거 없이 지급하라는 것이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이의신청서를 제출했다. 양측은 이제 법원에서 이 사안을 다투게 된다.

SBS측은 미디어오늘에 “피해자의 2차 피해에 대해 매우 죄송하게 생각하고 이 부분에 대해 보상할 의사가 있지만 해당 기사의 경우 다른 피해자가 있고 기업문화 개선, 추가 제보 등 여러 순기능으로 작용했다”며 “기사를 삭제하면 책임이 있는 회사와 가해자에도 면죄부를 주는 결과가 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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