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정경유착 가담자인가 대통령 겁박을 받은 피해자인가. 칼로 무 자르듯 판단할 수 없는 문제다. 서로가 이익을 교환하는 소위 ‘윈윈’(win-win) 관계에선 한 쪽의 강요가 어느 정도 있어도 유착관계를 형성하기란 어렵지 않다.

대통령이 재계 서열 1위 총수를 겁박으로 몰아세우는 것이 가능한지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 둘은 수직적 상하관계나 채무 관계와는 다르다. 상당한 자율성과 결정권을 가진 권력자 간 만남이다. 강요가 수월한 관계에 있어서도 아랫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노리고 공무원에게 돈을 주면 뇌물죄는 성립한다. 이 부회장이 강요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려면 다양한 근거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 디자인=이우림 기자
▲ 디자인=이우림 기자

① 이재용 피해자 만들기 → ‘정경유착’ 탈피

2심 재판부는 이 부회장을 대통령 강요의 피해자로 규정했다. 지난 5일 서울고법 형사합의13부 정형식 부장판사는 이 부회장이 최순실씨 관계 회사 4곳에 1여 년간 298억 원을 지급한 것을 “대한민국 최고 정치권력자인 박 전 대통령의 겁박을 거부하지 못한” 결과라고 봤다. 1심 재판부가 인정한 정경유착 규정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 부회장이 피해자라면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수첩에 적힌 각종 삼성그룹 현안은 무엇일까. 2014년 9월10일엔 ‘5.총수준비, 정부가 시행령 등으로 할 수 있는 List’가, 2015년 6월14일엔 ‘4.GALAXY Note 4, -피로 산소포화도 출시, -국내에서는 탑재’, 2016년 1월12일엔 ‘삼성계획→정부지원’이 적혀 있다. 2016년 5월22일에는 ‘박상진 삼성전자 사장 수주 도와줄 것’ 문구도 있다. 청와대 민정비서관실 행정관, 고용복지수석 등 업무수첩에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현안이 적혀 있다.

이 부회장의 피해자화는 재판 전략일 가능성이 있다. 이 부회장은 특검조사에서부터 ‘대통령 눈빛이 레이저를 쏘는 것 같았다’며 2차 독대에서 자신을 질책했다고 강조했다. 전 대통령 박근혜씨는 이에 대해 ‘어이가 없다. 어떻게 내가 그런 말을 하느냐’고 반박하고 있다.

▲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일 오후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석방되어 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민중의소리
▲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일 오후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석방되어 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민중의소리

② ‘승계작업’ 없다 → 부정 청탁 대상 없다 → 뇌물 220억 원 부분 무죄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후원금 16억원과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 204억원이 뇌물에서 제외됐다. 항소심이 ‘승계작업은 없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승계작업이 없으니 이 부회장이 대통령에게 청탁할 대상자체가 사라져 범죄 성립에 필요한 부정청탁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1심 재판부는 개별 현안에 대한 청탁은 인정하지 않았으나 이 부회장의 승계작업을 ‘포괄적 현안’으로 보고 이에 대한 묵시적 청탁은 있었다고 봤다. 특검이 제시한 일련의 삼성그룹 현안은 총수 그룹지배권을 유지·강화하는 작업으로 이 부회장에게 이득이고, 대통령과 이 부회장 모두 이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1심은 이를 근거로 영재센터 16억원을 뇌물로 인정했다.

2심은 이를 모두 부인했다. 개별 현안들이 이 부회장 지배권 강화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확인되는 효과일 뿐이라고 판단했다. 대통령과 이 부회장이 승계작업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도 특검이 제시한 증거만으론 증명이 부족해 ‘명확성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봤다.

2심 판단은 단적으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항소심 선고에 위배된다. 문 전 장관 항소심 재판부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안건에 대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를 챙겨보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고 봤다. 재판부는 또한 삼성물산 합병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삼성 대주주에겐 재산상 이익을, 국민연금관리공단에는 거액의 손해를 끼쳤다”고 판단했다.

▲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5년5월7일 오전 경기도 평택 고덕 국제화계획지구 내 부지에서 열린 삼성전자 반도체 평택공장 기공식에 참석, 기공 발파식을 마친 뒤 이재용 부회장과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5년5월7일 오전 경기도 평택 고덕 국제화계획지구 내 부지에서 열린 삼성전자 반도체 평택공장 기공식에 참석, 기공 발파식을 마친 뒤 이재용 부회장과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③ 최순실은 말을 ‘탄 것’일 뿐 → 승마지원 78억원 중 36억원만 유죄

단순뇌물죄가 적용된 승마지원금은 1심에서 인정된 금액의 절반 수준인 36억원만 인정됐다. 살시도·라우싱·비타나 등 정유라씨가 탄 말과 말 운송차량, 이동차량이 삼성전자 소유물이었다고 보고 최씨 측에 준 42억 원 상당의 송금액을 뇌물에서 제외한 것이다. 최씨가 말과 차량을 독일에서 독점하다시피 이용했지만 최씨 소유는 아니었으니 뇌물이 아니라는 논리다.

2심은 말 소유권을 둘러싸고 최씨와 박상진 전 삼성전자 사장이 주고 받은 문자 내용을 1심과 달리 해석했다. 최씨는 2015년 11월 살시도가 삼성소유로 기재된 것에 대해 ‘이재용이 VIP 만났을 때 말 사준다고 했지, 언제 빌려준다고 했냐?’고 화를 냈고 박 전 사장은 이에 “기본적으로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겠다, 결정하시는 대로 지원해드리겠다”는 답을 한 적이 있다. 1심은 이 시점부터 최씨가 마필의 실질적 소유자라고 판단했다.

삼성전자가 말 구입부터 관리·점검까지 소유자라면 마땅히 하게 되는 역할을 하지 않은 사실도 간과됐다. 정유라는 25억 여 원 상당의 명마 비타나V, 라우싱1233에 대해 삼성이 말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적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10억 원을 호가하는 비타나V의 경우 ‘선수마로서 생명은 끝났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부상이 심했다.

④ “재산 도피 의도 없었다” → 재산국외도피 전부 무죄 → 형량 대폭 감소

국내 재산을 법령을 위배해 국외로 이동시키는 행위엔 재산국외도피죄가 적용가능하다. 삼성전자가 독일로 송금한 정씨 승마지원금이 뇌물일 경우 재산국외도피 혐의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특검은 삼성이 독일로 송금한 78억 원 전체에 재산국외도피죄를 적용했고 1심은 이 중 36억 원만 인정했다. 2심은 전체 금액에 무죄를 선고했다.

정 판사는 “공여 장소가 국외라는 사정 뿐”이며 “최순실씨 필요에 따라 소비·은닉했을 뿐 삼성전자 피고인들이 대금을 지배관리했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36억 원은 뇌물로 판단됐지만, 독일에서 오고 간 것이지 한국에서 송금되는 과정에서는 ‘삼성의 재산 도피 의도’가 없었다는 논리다.

특검은 2심 선고 후 이와 관련해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라는 것과 같은 논리”라고 비판했다.

그 결과 이 부회장 등의 처단형은 대폭 완화됐다. 재산국외도피는 적용된 법중 법정형이 가장 높은 범죄였다. 도피액이 50억원 이상이면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이, 5억~50억원 사이일 땐 5년 이상의 유기징역이 선고될 수 있다. 특검은 78억 원을 적용해 이 부회장에게 12년을 구형했고 1심 재판부는 36억 원을 인정해 징역 5년을 선고에 반영했다.

▲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삼성노동인권지킴이, 전국금속노동조합 등 시민사회단체는 5일 오후 서울법원종합청사 정문 앞에서 재판부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손가영 기자
▲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삼성노동인권지킴이, 전국금속노동조합 등 시민사회단체는 5일 오후 서울법원종합청사 정문 앞에서 재판부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손가영 기자

⑤ 대폭 삭감된 뇌물 → 딸림 범죄도 대폭 축소

1심에서 80억 원이 인정된 횡령금액은 2심에서 36억 원으로 대폭 감소했다. 2심 재판부가 △정유라 승마지원 △영재센터 후원 △미르·K재단 출연금 등 세 가지로 분류된 뇌물혐의 중 승마지원만 뇌물로 인정했고 이 중에서도 말·차량·기타 부대비용을 제외한 용역대금 36억 원만 뇌물로 판단한 결과다.

범죄수익은닉법 위반도 같은 논리로 36억 원 부분만 유죄로 인정됐다. 특검은 삼성전자가 정씨 승마지원을 위해 최씨 차명회사와 체결한 용역계약이 뇌물을 합법적 금전 지원으로 가장하기 위한 범죄로 봤다. 삼성전자가 “범죄수익의 발생 원인에 관한 사실을 가장”했고 “범죄수익등의 취득 또는 처분에 관한 사실을 가장”했다며 78억 원 승마지원금에 범죄수익은닉법을 적용했다.

횡령은 단순뇌물공여보다 형량이 높은 혐의였다. 횡령의 경우 이득액이 50억원 이상일 땐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이, 5억~50억원일 땐 3년 이상의 유기징역이 가능하다. 단순뇌물공여죄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2심은 결과적으로 삼성그룹에서 최씨 관계회사로 이전된 금전 298억원 중 승마지원금 일부인 36억원만 뇌물로 판단했다. 범죄 사실이 대폭 축소되면서 이 부회장의 형량은 징역 5년에서 징역 2년6월 및 집행유예 4년으로 낮아졌다. 이 부회장은 선고 직후 석방됐다.

최지성 전 미래전략실장 및 장충기 전 차장은 징역 4년에서 징역 2년 및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석방됐다. 박상진 전 사장은 1심 선고형 징역 3년 및 집행유예 5년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징역 2년6월 및 집행유예 4년을 받았던 황성수 전 전무에겐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선고 직후 참여연대는 “단순한 횡령이 아니라,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오로지 사익을 추구한 재벌의 행태에 대해 명시적, 묵시적 청탁은 물론, 포괄적인 현안으로서 ‘승계작업’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오늘 판결은 재벌 봐주기, 이재용에 대한 면죄부라 아니할 수 없다”면서 “이번 법원 판결은 ‘사법부다운 사법부’를 기대했던 국민들에게는 경악과 분노를 남기고, ‘사법부 적폐론’을 외치던 사람들에게만 다시 한 번 ‘언제나 그래왔던 우리 사법부의 민낯’을 확인시킨 난장(亂場)에 다름 아니”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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