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는 역사의 초고다. 제주 4·3 당시 언론은 4·3을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다.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왜곡과 허위로 지면을 채웠다. 그 결과 ‘제주 4·3’은 70년 간 ‘제주 빨치산 봉기’, ‘제주 4·3 사태’, ‘제주 4·3 민중 항쟁’ 등으로 불렸을 뿐 제대로 된 이름조차 얻지 못했다.

지난 2000년 제정된 제주4·3 특별법은 4·3을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했다. 이 시기 언론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폭력적인 정치 선전 도구와 메신저 기능에 충실했다.

제주 주민 불만 짚지 못한 언론

4·3에 대해 미군정 당시 이인 검찰총장은 사태 원인을 관료들의 부패에서 찾았다. 이 총장은 “고름이 제대로 든 것을 좌익 계열에서 바늘로 터뜨린 것이 제주도 사태의 진상”이라고 말했다. 이인은 훗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2기 위원장을 맡아 반민특위 와해를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하나다. 그런 그조차 제주도민의 찌든 삶을 헤아리지 못한 정부의 책임을 지적했다.

▲ 강요배의 '천명' 4.3 당시 초토화작전으로 마을이 불태워지고 쫓겨나는 아비규환 장면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사진=4.3미술제 홈페이지
▲ 강요배의 '천명' 4.3 당시 초토화작전으로 마을이 불태워지고 쫓겨나는 아비규환 장면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사진=4.3미술제 홈페이지

제주도 주민들과 공무원들은 1947년 3월 중순 대대적인 파업에 나섰다. 같은 달 13일자 동아일보는 “앞서 전북에서 100명, 전남에서 200명 도합 300명의 경관대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출동했다”며 “제주도내 이번 총파업은 전에 보지 못한 대규모적인 것으로 그 귀추가 크게 주목된다”고 전했다. 파업 원인은 나와 있지 않았다.

2년 가까이 흐른 1948년 11월26일자 동아일보에는 ‘여수·순천 10·19 사건’, ‘제주 4·3’ 등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낸 “반란 사건의 교훈”이란 기사를 통해 “직접적인 도화선은 감정, 오도되고 악화된 감정”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민족 감정의 악화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양심적인 문화인 내지 정신인을 많이 육성하고 동원해 각 직장, 군, 학교에 침투”시키자고 제안했다. 현존하는 제주 주민들의 생활고를 축소하고 비민주적인 해법을 내놓은 것이다.

해방 이후 제주 주민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20만 남짓이던 제주 인구가 6만 명가량 불었다. 일제강점기에 돈 벌러 일본으로 향했던 사람들이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미군정은 이들이 일본에서 번 돈과 생활필수품을 가지고 오지 못하게 했다. 일자리가 부족한 가운데 친일 경찰은 여전히 모리배 노릇을 했다.

1946년 여름, 매일 평균 50명의 콜레라 환자가 발생했고 흉년으로 식량마저 부족해졌다. 4·3의 시작점인 1947년 3·1절은 새 시대를 향한 열망이었다. 그런데 이날 관덕정에서 기마 경찰 말발굽에 아이가 치였고 경찰이 구경꾼을 향해 총을 쐈다.

시위대에 책임 전가하는 정치권력

조병옥 경무부장은 같은 달 20일 제주 파업에 대해 “북조선의 세력과 통모휴수(通謀攜手)해 미군정을 전복해 사회 혼란을 유치해 자기 세력을 부식하려는 전체적 운동의 부분적 현상”이라며 3·1절 시위를 ‘폭동’, 시위 참가자를 ‘악도배’, 이들의 주장을 ‘모략적 선전’으로 규정했다. 조 부장은 “총파업이 30만 제주도민의 생활을 위협케 했다”며 “사회는 경찰과 협력해 법과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8년 3월19일 법무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경제 살리기와 선진 국가는 법과 질서가 지켜지는 바탕 위에서만 만들 수 있다”며 “우리 사회가 얼마만큼 법과 질서를 안 지키는가 하는 예는 여러 가지가 있다”며 노동조합의 파업을 예로 들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2016년 10월21일 경찰의날 기념식에서 “법 위에 군림하는 떼법문화, 불법 파업, 불법 시위 등 법질서 경시 풍조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국가 권력이 민중 저항을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4·3 당시 언론은 미군정이 유포한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을 그대로 전했다. 한 예가 인공기를 단 괴선박이 출현했다는 기사다. 1948년 10월13일 동아일보는 “제주도 미국민사청장 노우엘 소좌는 10월8일 하오 1시경 성산포 20마일 해상에서 부산 방면으로 항행 중인 잠수함 1척을 발견했는데 잠수함의 번호는 ‘c53’이며 함미에는 인민공화국기가 달려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고 보도했다.

다음날인 14일 서울신문 역시 비슷한 내용을 보도했다. 미군 G-2 보고서의 붉은 바탕에 별 하나가 그려진 깃발이 서울신문에는 인민공화국기로 변해있었다. 이는 한 번도 확인된 적 없는 허위다. 괴선박 출현설은 공교롭게 토벌 작전이 시작되기 전 수차례 나타났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북괴가 광주에 침투했다’는 유언비어가 신군부와 그들이 통제한 언론보도에서 시작된 것처럼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강경 조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건 언론이었다.

가해자 미화에 나선 언론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를 보면 4·3 희생자 가운데 약 78%가 토벌대, 즉 정부 측에 의해 사망했다. 하지만 4·3 당시 언론은 토벌대를 미화했다. 1948년 11월30일 동아일보는 “치안인이 회복된 부락을 군경 부대가 통과할 때는 부락민 남녀노소가 도로 연변에 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짖는 광경을 볼 수 있다 한다”고 보도했다.

▲ 제주 4.3 희생자 분포 지도. 현재까지 희생자로 신고돼 인정된 명단에 근거한 지도로 본적지가 파악되지 않은 66명은 표기되지 않았다. 사진=제주 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 제주 4.3 희생자 분포 지도. 현재까지 희생자로 신고돼 인정된 명단에 근거한 지도로 본적지가 파악되지 않은 66명은 표기되지 않았다. 사진=제주 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이후 학살자를 추모하는 역사가 펼쳐졌다. 제주시 노형동 충혼묘지 입구에 제주 4·3 진압 사령관을 맡은 박진경 대령(9연대장) 추모비가 있다. 추모비에는 “우리 30만 도민과 군경원호회가 합동해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해 단갈(短碣·무덤 앞에 세우는 작고 둥근 비석)을 세우고 추모의 뜻을 천추에 기리 전한다”고 써 있다.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이사는 지난해 현충일 경상남도 추념식에서 박 대령이 경남 대표 인물로 선정된 것에 대해 “그를 현충일 ‘경남 대표’ 인물로 내세우는 데 관여한 사람은 어떤 상징으로 박진경을 선정했을까”라며 “멋모르는 추모객들을 조롱하려는 의도는 없었을까”라고 비판했다.

문상길 중위 등 군 후배들은 박 대령을 암살했다. 문 중위는 사형 직전 “매국노의 단독 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 하에 한국 민족을 학살하는 한국 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제 마지막 염원”이라고 말했다. 일본군 소위 출신 박 대령은 “제주도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선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했을 정도다.

언론은 끊임없이 친일파와 학살자들이 내세운 반공을 미화했다. 1954년 1월30일 동아일보는 “포항반공청년교도소에 수용돼 있는 애국 청년 중에서 자진해 국군에 입대할 것을 지원하는 애국청년 ○○○명은 지난 27일 포항시민 8000여명의 환송리에 제주도 제1훈련소로 향했다”고 보도했다.

자연스레 토벌대는 ‘살인자’에서 제외됐다. 1948년 10월2일 경향신문은 “제주에 또 폭동 지금 양방 교전 중”이란 기사에서 “1일 오전 7시경 100여명의 무장한 폭도들이 서귀포 남영지서관내에 나타났는데 경찰에서는 방금 접전 중이라 하며 양민 2명과 경관 1명은 폭도에게 피살됐다고 한다”고 보도했다.

미군정 언어가 언론을 통해 반복적으로 유포됐다. 탄압 시기가 길어질수록 주민들에게 산사람, 산부대라는 말은 사라지고 ‘폭도’라는 말이 일상화됐다. 제민일보 취재팀이 펴낸 ‘4·3은 말한다’ 제5권에 나온 남원면 주민 김학배씨는 “폭도들은 우리 집에도 들이닥쳐 어머니에게 창을 들이밀면서 ‘쌀을 내놓으라’고 강요했다”고 증언했다. 가해자가 쓰던 언어가 피해자 언어로 전이된 것이다.

이관열 강원대 교수는 ‘제주 4·3 사건 보도의 언론사적 의미’란 글에서 “해방 후 한국 언론이 미군정하에서 우리의 언론 철학을 수립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동족에 대한 정치 세력의 엄청난 범죄에 협조했다”고 비판했다. 제주 4·3 보도는 한국 언론의 불행한 출발이었다.

※ 참고 문헌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4·3이 머우꽈?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4·3 길을 걷다
김주완, 제주 4.3학살 주범 박진경 대령이 현충일 경남대표라고?
이관열, 제주 4·3 사건 보도의 언론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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