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망중립성’을 폐지 결정한 가운데 시민사회와 인터넷 업계는 한국에도 영향을 미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망중립성 폐지를 요구하는 통신사와 이에 맞선 인터넷 기업 간 갈등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연방통신위원회(FCC)는 3:2로 망중립성 원칙 폐지를 결정했다. 광대역 인터넷 엑세스를 ‘공공서비스’에서 ‘정보서비스’로 변경해 정부가 규제하는 대신 시장 경쟁에 맡긴다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망중립성 폐지를 추진했고 격론 끝에 공화당 소속 위원들이 찬성표를 던졌다.

‘망중립성’은 통신망을 갖고 있는 사업자가 망에서 서비스하는 사업자들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통신사 컴캐스트가 넷플릭스와 같은 특정 서비스의 전송속도를 늦추거나, 반대로 통신사와 특수관계인 서비스의 속도를 높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서울 시내 통신대리점. 사진=연합뉴스
▲ 서울 시내 통신대리점. 사진=연합뉴스

‘망중립성’이 폐지되면서 버라이즌, 컴캐스트와 같은 미국의 통신사업자들이 망을 차별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돼 수혜를 입을 전망이다. 반면 넷플릭스, 구글, 페이스북처럼 동영상 데이터가 많이 필요하지만 망을 갖지 못한 사업자들은 막대한 데이터 비용을 내거나 경쟁사업자와 차별을 당하는 등 손실이 예상돼 반발해왔다.

미국의 망중립성 폐지는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한국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통신3사의 영향력이 강화되고 인터넷 상에서 서비스를 하는 사업자들은 불안해하는 상황이다. 특히 데이터 트래픽을 많이 쓰는 네이버, 다음 등 포털과 푹, 티빙 등 인터넷 스트리밍 사업자들은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망중립성이 폐지되면 한국 인터넷 서비스가 월정액제가 아닌 종량제로 바뀔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한국인터넷기업협회 차재필 정책실장은 “미국의 결정은 유감이다. 미국의 정책결정이 한국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면 한다”면서 “망중립성이 훼손된다면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인터넷 기업들의 혁신이 무산될 것으로 우려된다. 정부가 기존 기조를 유지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 인터넷스트리밍 사업자 관계자는 “통신3사는 모두 자체 동영상 서비스를 갖고 있다. 모바일 시장 지배력이 OTT(인터넷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시장 지배력으로까지 옮겨가는 상황이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시민단체 역시 반발하고 있다. 오픈넷은 15일 성명을 내고 “망중립성은 오히려 강화돼야 한다”며 정부가 공론장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망중립성 폐지가 통신사의 불공정 행위를 부추기는 데다 차별적인 망사용이 결과적으로 이용자의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한국은 관련 법규가 마련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망중립성을 고수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5년 미래창조과학부는 KT가 월 3300원으로 카카오의 서비스를 무제한으로 제공하는 ‘다음카카오팩’을 내놓자 망 중립성을 침해할 소지가 크다는 판단을 내린 바 있다.

정부는 국내 정책에는 변화가 없다는 입장이다. 지난 12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기자간담회에서 송재성 통신경쟁정책과장은 “FCC의 망중립성 폐기는 글로벌 트렌드가 아니라 미국 정권 교체에 따른 변화”라며 “한국 정책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우선, 여야 간 온도차가 뚜렷하다. 유승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망중립성 개념을 법제화하는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부정적이다.

지난달 29일 과방위 법안소위에서 김성태 의원은 “망 중립성 원칙은 과거 국가 주도로 구축한 인프라에서는 적합했지만 5G 시대로 바뀌는 상황에서는 과거지향적”이라고 지적하며 법안에 부정적인 의견을 냈다. 박대출 의원 역시 “미국은 망중립성 폐지 기조로 가는데 망 중립성 강화를 하면 업계 이해관계자와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며 신중하게 접근하자는 입장이다.

통신사의 ‘망중립성 폐지 요구’도 거셀 것으로 보인다. 망중립성 이슈는 통신사 간 대립해온 ‘합산규제’ ‘SK텔레콤-CJ헬로비전 인수합병’과 달리 통신3사의 이해관계가 같기 때문에 정부, 국회, 언론을 상대로 한 적극적인 설득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 인터넷 쇼핑몰 11번가의 데이터 프리 정책. SK텔레콤 가입자의 11번가 쇼핑 데이터 요금은 11번가가 부담해 소비자들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 인터넷 쇼핑몰 11번가의 데이터 프리 정책. SK텔레콤 가입자의 11번가 쇼핑 데이터 요금은 11번가가 부담해 소비자들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당장 국내에서 망중립성이 폐지될 가능성은 낮지만 유사한 규제완화조치인 ‘제로레이팅’이 활성화될 가능성이 높다. 제로레이팅은 망 사업자가 망에서 서비스를 하는 제휴 서비스의 데이터 요금을 감면하는 것으로 최근 정부가 본격 허용 방침을 정한 바 있다.

(관련기사: 제로레이팅으로 데이터 공짜? 세상에 공짜는 없다 )

SK텔레콤은 자회사인 11번가의 쇼핑 데이터를 감면하는 제도를 시행한 바 있으며 통신사들이 특정 요금제에 가입하면 자사의 동영상 서비스, 음원 서비스 데이터 요금을 할인하거나 면제하는 경우가 있다.

오픈넷은 제로레이팅이 ‘시장지배력 남용’ 및 ‘부당지원’ 소지가 있다고 보고 있다. 인터넷 스트리밍업체 관계자는 “누군가를 우대하는 건 누군가를 차별한다는 의미이고, 그렇다면 제로레이팅은 사실상 망중립성 원칙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지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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