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붙은 공약전쟁. 한 언론사의 기획연재 표제다. 박근혜 파면으로 대선국면에 들어가면서 예비후보들의 공약이 쏟아지고 있다. 무릇 공약은 선거에 나선 정치인이 표를 달라며 내건 약속이다. 대선에서 한 약속은 더 무겁다. 물론, 그 무거움을 내놓고 조롱하는 대통령도 있었다. “선거 때 무슨 말을 못하겠나.” 기자들 앞에서 이명박이 언죽번죽 뱉은 말이다.

박근혜를 보면 차라리 이명박은 정직했다. 박근혜는 ‘경제민주화’를 내걸고 집권했지만 집권 뒤에 ‘안면 몰수’했다. 박근혜가 대기업 회장들을 불러 국민 세금으로 호화오찬을 즐기거나 으밀아밀 재단을 궁리하고 있을 때, 벼랑에 몰린 민중들의 집회를 겨냥해 살천스레 ‘법질서 수호’를 부르댈 때, 대한민국의 가난한 사람들과 청년들은 깊은 고통에 잠겨야 했다.

객관적 통계가 뒷받침한다. 박근혜 집권 4년 동안 소득 1분위, 하위 20%의 월평균 노동소득은 1.8% 줄어들었다. 반면에 소득 5분위, 상위 20%의 소득은 12.1%나 늘어났다. 금액으로 따지면 차이는 더 크다. 2016년 청년실업률은 통계조사가 시작된 1999년 이래 최고인 9.8%다. 실제 청년들이 겪는 체감실업률은 22.5%에 이른다. 그렇다고 성장률이 높은 것도 아니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낮아 3%를 밑돌았다. ‘국민행복 시대’를 내건 박근혜의 집권 내내 ‘행복’했던 사람들이 있다면, 소득이 두 자리 숫자로 늘어난 상위 20%일 가능성이 높다.

▲ 2013년 2월25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취임식을 마친 뒤 차량으로 이동하며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 2013년 2월25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취임식을 마친 뒤 차량으로 이동하며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박근혜가 이미 전 정권이 된 지금, 톺아보면 한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공약을 온전히 지킨 사람은 없었다. 이명박의 ‘국민 성공시대’는 새삼 말할 나위 없이 국민 환멸만 남겼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도 공약을 지키지 못했다. 만일 국민과의 약속을 지켰다면, 우리는 지금 ‘대중의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경제체제’에 살고 있어야 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던 조건을 감안하더라도 대통령 김대중은 대중경제를 구현할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통령 노무현도 인간 노무현에 대한 애틋한 정서와 별개로 공약 이행을 냉철하게 평가해야 옳다. ‘분배를 통한 성장’이라는 획기적 공약, 임기 중에 적어도 ‘노사간 힘의 균형’은 이루겠다는 약속 모두 이루지 못했다.

그렇다면 다음 대통령을 맡겠다고 나선 예비후보들의 ‘불붙은 공약’도 이제는 차분하게 살펴야 옳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현 가능성과 의지다.

▲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예비후보가 3월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정국구상을 밝히고 있다. 사진=문재인 캠프 제공
▲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예비후보가 3월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정국구상을 밝히고 있다. 사진=문재인 캠프 제공
2017년 3월14일 현재 여론조사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히는 문재인의 공약은 이미 넘친다. 역대 최대 규모의 싱크탱크에서 두툼한 정책들을 망라해놓기도 했다. 하지만 유권자들이 궁금한 것은 방대한 공약자료집이 아니다. ‘나라다운 나라’를 실제 구현할 수 있다는 확신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 모든 자료들의 의미는 퇴색할 수밖에 없다. 노무현 정부를 경험하며 실망한 사람들, 특히 호남의 선진적인 정치의식을 지닌 유권자들이나 진보적인 민중들에게 특히 그렇다. 그들의 깨끗한 열정을 담아내지 않아도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전략 또는 전술 차원에서 대처할 문제가 아니다. 실제 그렇게 이길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촛불을 든 민중의 절실한 소망을 구현해내지 못할 때 우리는 다시 ‘미완의 혁명’을 씁쓸하게 추억하고 기념해야 할지도 모른다.

바로 그래서다. 최우선 공약은 ‘공약 이행’에 두어야 한다. 딱히 문재인만이 아니다. 다음 대통령에 도전하고 있는 모든 예비후보들에게 권한다. 청와대 비서실에 ‘공약실천 수석’을 약속하라. 그 일에 ‘수석비서관’까지 둬야 할 이유는 명쾌하다. 단순히 점검하는 일이 아니라 왜, 어디서, 누가 공약이행을 가로막고 있는지 끊임없이 분석하고 대통령에게 직언을 해야 제대로 굴러갈 수 있다. 헛된 공약으로 대한민국이 언제까지 세월만 낭비할 수 없다. 미국과 중국, 일본의 변화는 우리에게 조금의 방심이나 안일도 허락하지 않는다. 어떤 저항이 있어도 반드시 공약을 지키겠다는 옹골찬 의지가 뚝뚝 묻어나는 대통령을 만들 때다. 촛불의 다음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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