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노동조합(1노조·위원장 이현진)이 8일 오후 파업 잠정 중단을 선언했다. 고대영 KBS 사장이 이날 KBS노동조합의 용퇴 요구에 “방송법 개정안이 처리되면 사퇴하겠다”고 거취를 밝히면서 KBS노동조합이 10일 0시부로 파업을 잠정 중단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KBS노동조합에 따르면, 고 사장은 “KBS 정상화를 누구보다 바란다”며 “여·야 정치권이 방송 독립을 보장할 방송법 개정안을 처리하면 임기에 연연하지 않고 사퇴하겠다”고 말했다.

KBS노동조합은 “고 사장의 거취 표명이 미흡하지만 방송법 개정을 통한 사장 퇴진과 공영방송 정상화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라 평가한다”고 밝혔다.

이 같은 결정에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본부장 성재호·2노조·새노조)는 8일 성명을 통해 “지금의 국회 상황을 감안하면 방송법과 여·야 대치 법안이 국회에서 신속히 처리될 리 만무하다. 국회의 방송법 개정을 재촉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강도 높게 파업을 벌여야 한다”며 지난 9월 돌입한 파업 투쟁을 계속 이어갈 것을 강조했다.

언론계 안팎에선 고 사장 거취와 방송법 개정을 연계하는 것이 도리어 고 사장 임기를 연장하는 수단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 고대영 KBS 사장이 지난 9월1일 오후 63빌딩에서 열린 방송의날 축하연 입장 중 KBS 새노조 조합원들의 퇴진 요구를 받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 고대영 KBS 사장이 지난 9월1일 오후 63빌딩에서 열린 방송의날 축하연 입장 중 KBS 새노조 조합원들의 퇴진 요구를 받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먼저 방송법 개정에 대한 각 정당 셈법이 다르다는 점에서 국회가 합의에 이를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더불어민주당은 야당 시절인 지난해 7월 일명 ‘언론장악방지법’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공영방송 이사진 구성을 여‧야 추천 7대6으로 재편하고, 사장 선임 시 이사회의 사장추천위원회 구성을 의무화하며 재적 이사 3분의 2의 찬성을 요구하는 ‘특별다수제’가 골자다. 또 노사 동수 편성위원회 구성하고 3개월 이내 KBS 이사회를 재편토록 하는 조항도 있다. 종합편성채널에도 영향을 미칠 노사 동수 편성위원회는 자유한국당과 보수 진영이 “노영방송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하는 조항이다.

앞서 한국당은 이에 반발해 새 개정안을 발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 경우 고 사장 임기(~2018년 11월) 안에 합의가 이뤄질지 장담할 수 없다. ‘뉴라이트 학자’인 이인호 KBS 이사장이 7일 “방송법은 개정해야 한다. 그러나 KBS 이사와 사장 선출과 관련해 현재 국회에 상정돼 있는 것보다 정치적 영향을 덜 받는 방식의 개정안이어야 한다”고 밝힌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무엇보다 현 여권은 자신들이 발의한 방송법 개정안을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8월 방송법 개정안 문제점을 지적하며 재검토를 지시해 주목받았다. 문 대통령의 문제의식은 여·야 합의를 통한 공영방송 사장 선출로는 양쪽의 눈치를 보는 “소신 없는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다”는 데 있다. 이는 “국민이 직접 공영방송 사장을 선출해야 한다”는 이용마 MBC 해직 기자 주장과도 맞닿아있다. 이 때문에 민주당 역시 기존 방송법 개정안보다 더 독립적인 개정안을 발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고 사장에게 ‘명분’을 준 KBS노동조합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KBS 기자 출신 최경영 뉴스타파 기자는 8일 KBS노동조합 파업 중단 기사를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유하며 “동요하지 말아달라”며 “파업도 제대로 하지 않았던 KBS노동조합이 존재감 입증하기 위해 사측과 합작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시민 여러분 힘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싸움”이라며 “새노조가 고립됐다. 도와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

최승호 MBC 해직 PD도 “고대영 사퇴 전제 조건인 ‘방송법 개정’은 가능성이 없다”며 “방송법 개정은 야3당이 주장하는 건데 여당은 응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방송법 개정안은 언론노조도 반대하고 있다. 그러니 고대영씨가 사퇴할 일은 없다”고 단언했다.

최 PD는 “또 파업 중단한다는 KBS노조는 그동안 파업을 열심히 하지 않았던 1노조를 말한다”며 “영화 ‘공범자들’에서 알 수 있듯 1노조가 이명박 정권과 제대로 싸우지 않으니 기자·PD들이 새노조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병도 전 KBS 기자협회장도 KBS노동조합을 겨냥해 “같은 회사 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다는 게 정말 부끄럽다. 분노가 치민다”면서도 “나는, 우리(새노조)는 고 사장이 조건 없이 사퇴할 때까지 끝까지 싸울 것이다. 우리 목표는 단지 고대영 개인의 퇴진이 아니라 그동안 뿌리 깊게 박혀있던 공영방송 KBS의 적폐를 청산하고 KBS를 다시 국민의 품으로 돌려드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통합노조였던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는 기술직군 중심의 ‘KBS노동조합’(기업노조)과 현재의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새노조·산별)로 나뉜 상태다. 2008년 정연주 전 KBS 사장 불법 해임 사태와 2009년 MB 특보 출신 김인규 전 사장을 기존 노조가 묵인한 데 대해 권력 비판적 KBS 기자·PD들을 중심으로 2009년 12월 ‘새노조’를 창립했다.

새노조는 김인규 전 사장 시절인 2010년 임금 및 단체협상 체결과 공정방송위원회 설치 등을 요구하며 29일간 파업을 벌였고, 2012년에는 ‘김인규 퇴진’을 기치로 내걸고 95일 동안 파업을 벌였다. 2014년에도 박근혜 청와대와 길환영 전 사장의 KBS 세월호 보도 개입에 반발, 파업을 통해 길 전 사장을 퇴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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