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가 ‘정윤회 문건’ 후속 보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청와대의 언론탄압이 없었다면 2년 전에 나왔을 기사들이다. 13일자 세계일보 1면과 8면, 9면에 걸친 추가 문건 보도는 ‘문고리 3인방’ 가운데서도 실세 안봉근 전 청와대 비서관을 겨눈다.

“OOO이는 내가 뱃지를 달아주었다. (중략) 국회의원 그거 별거 아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3~4명쯤은 대장(박근혜 대통령)께 이야기할 수 있고 달아주는 것 문제도 아냐”, “내가 대장에게 한마디만 하면 수석 하나 둘쯤 날리는 것은 일도 아냐. 말이 비서관이지 실장보다 내가 더 결정권이 있어”, “대장은 나를 신뢰하기에 모든 것을 다 맡긴다. 심지어 여자 개인물품까지 들어있는 핸드백도 나에게 맡기기 때문에 내가 대장을 제일 잘 알고 있어.(중략) 나를 거치지 않으면 김기춘이도 대장에게 보고서를 낼 수가 없어”, “민정에서 조응천이가 검증한다고 해도 대장께 최종 확인은 내가 받는다”, “VIP가 저를 얼마나 끼고 있으려는지 조금도 짬을 주지 않는다.” 

▲ 세계일보 13일자 9면.
이는 당시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이 작성한 초안 성격의 ‘시중여론’(문건 이름)을 분석한 결과다. 문고리 3인방 안봉근의 충성 경쟁과 전횡, 인사와 공천 개입, 청와대 내 권력서열 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김기춘도 대장에게 보고서 낼 수 없어”

지난 2014년 11월 “박 대통령의 국회의원 시절 비서실장이자 최태민 목사의 사위인 정윤회씨가 ‘문고리 권력 3인방’을 포함한 청와대 안팎 인사 10명을 통해 각종 인사개입과 국정농단을 하고 있다”는 세계일보 보도는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다. 비선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린 보도였다. 살아있는 권력을 상대로 한 특종이었다.

청와대의 보복은 가혹했다. 박 대통령이 “문건유출은 국기문란”이라고 가이드라인을 던지자 검찰은 이를 덥석 물었다. 국정농단이 아닌 문건유출에 초점을 맞춘 검찰은 박관천 전 청와대 행정관, 서울경찰청 정보분실 소속 한일 경위와 최경락 경위 등을 문건 유출자로 지목했다. 우병우 민정비서관 등 청와대는 이들을 회유하고자 했다.

이들을 제물로 삼은 검찰 수사는 무고한 생명을 끊었다. 2014년 12월 검찰 수사를 받던 최 경위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유서를 통해 한일 경위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 “민정비서관실에서 너에게 그런 제의가 들어오면 당연히 흔들리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제 내가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은 너와 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회사 차원의 문제이나 이제라도 우리 회사의 명예를 지키고 싶어 이런 결정을 한다.”

▲ 2014년 12월 검찰이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 문건(정윤회 문건)을 보도한 세계일보를 압수수색할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당시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세계일보 사옥 앞에는 이를 취재하기 위한 타 매체 기자 40여 명이 진을 치고 대기했다. ⓒ김도연 기자
세계일보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최근 언론을 통해 공개된 고(故)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업무일지(비망록)에 드러난 “세계일보 공격 방안”은 노골적이다.

문건이 공개된 2014년 11월28일 이재만 청와대 총무비서관과 정호성 제1부속 비서관, 안봉근 제2부속 비서관 등 문고리 3인방이 세계일보 사장, 편집국장, 기사를 작성한 평기자 등 6명에 대해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를 진행했다. 

이날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는 “세계일보 공격 방안”이 논의됐고 “비서관 행정관 별 언론 접촉”, “최선, 백방 쿨다운 노력”, “언론사 상층부 상대 해명요” 등이 지침으로 내려졌다. 

12월1일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압수수색 장소로 세계일보를 지목했다.(長. 압수수색 장소-세계일보사) 실제 압수수색은 이뤄지지 않았다. 대신 외부에 쉽게 드러나지 않는 세무조사로 대응 방향을 틀었다. 세무당국은 세계일보 모체인 통일교 재단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김 전 실장은 “불만, 토로, 누설은 쓰레기 같은 짓”(12월3일자)이라고 기강을 다잡았고 당시 문건 보도에 대해 “언론의 무책임 보도, 황색지적 행태”, “시정요구하며 계도토록해야”(12월9일자)한다고 강조했다. 

▲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사진=이치열 기자)
12월10일 김 전 실장은 “세계일보 보도 파문 고비를 지나고 있음”이라며 안도했다. 최 경위가 목숨을 끊은 12월13일 김 전 실장은 “문건유출사건 막바지 금주초 – 조기종결토록 지도”(12월13일자)라고 지시하고 “부정부패와는 무관. 안보 관련 비밀 유출 사례도 아님. 기강해이이긴 하나 개인 일탈적 성격. 온 나라가 들끓을 사안이 아님. 황색지의 작태에 지나치게 반응하는 것”이라고 했다. 세계일보를 ‘황색지’로 규정하고 ‘개인적 일탈’로 사안을 축소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비선의 국정농단을 은폐하기 위한 조치들이었다.

문고리 방패였던 김기춘과 우병우

세계일보 문건팀 주축인 조현일 기자의 경우 보도 6개월 전부터 청와대가 주시한 정황이 비망록에 기록돼 있어 사찰 의혹도 제기됐다. 

조한규 전 세계일보 사장은 지난달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조현일 기자의 경우 특히 힘들어했다”며 “미행을 당했다고 한다.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정신과 치료를 받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거다. 거의 식사를 못할 정도였다”고 술회했다.

▲ 고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
검찰에서 세계일보 기자들은 반복해서 검찰 소환을 받아야 했고 “취재원을 불라”고 강요당했다. 문건팀의 또 다른 기자인 박현준 기자는 지난해 관훈저널 기고에서 “어느 날 자정 무렵엔 조사를 받던 세계일보 기자 앞에 수갑을 찬 박관천 전 행정관을 앞세워 문건 전달자를 밝히도록 종용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당시 사회부장이었던 한용걸 논설위원은 지난달 17일 “나는 고발한다”라는 세계일보 칼럼을 통해 “(박근혜 정권은) 세계일보 압수수색을 시도하고 세계일보 관련 재단 세무조사에 착수해 재갈을 물리려 했다”며 “검찰은 세계일보 기자들을 수차례 소환조사했지만 유출 경로를 캐내는 데 번번이 실패했다. 사회부장이던 필자도 2014년 12월31일 밤 7시에 검찰청사에 불려갔다”고 밝혔다.

검찰 수사 책임자들은 영전을 거듭했다. 총책임자인 김수남 서울중앙지검장은 현재 검찰총장이며 황교안 법무부장관은 국무총리에서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1인자 행세를 하고 있다. 우병우 민정비서관은 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자리를 꿰찼다.

▲ 세계일보 조현일 기자의 13일자 칼럼.

2년 전 세계일보의 ‘경고’를 외면한 박근혜 대통령은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았다. 탄핵으로 청와대에서 끌려나올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고 검찰의 구속 수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언론을 탄압하고 헌법을 유린한 대가다.

조현일 기자는 13일자 칼럼을 통해 “검찰 수사로 드러난 ‘박순실 정권’, 박 대통령과 김기춘 전 비서실장, 우병우 전 민정수석 등을 처벌하고 최씨 일가가 부정하게 모은 재산을 환수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면서도 “하지만 법적 책임을 가리는 것 외에도 우리의 어떤 토양이 이런 국가적 재난을 키웠는지 두루 살펴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최고 권력자 박 대통령과 핵심 권력자들은 물론, 여타 언론들이 진실을 외면해 지금의 재난을 키운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권력은 영원하지 않고 시간은 진실의 편이라고 믿는다. 진실의 순간은 도둑같이 올 것이다. 세계일보 취재팀을 격려한 많은 이들도 그렇게 믿고 있다. 그 순간이 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박현준, 지난해 관훈저널 기고) 2년이 흘러, 진실은 정말 도둑처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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