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이후 국민안전처로 흡수됐던 해경이 부활한다. 5일 국정기획자문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국민안전처로부터 소방기능과 해양경비안전 기능을 분리하여 소방청과 해양경찰청을 설치하고 이들 기관은 각각 새로 개편되는 행정안전부와 해양수산부 소속으로 두도록 하였다”고 밝혔다. 박근혜 전 대통령 지시로 급조됐던 국민안전처는 해체된다. 해경 독립은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에 따른 것이다. 이는 대통령 공약에서 두가지 차원으로 제기됐다. 첫번째는 소방방재청 독립과 함께 해경 부활이 안전분야의 대선공약...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노동계에도 청신호가 켜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대선 당시 ILO 핵심협약(29호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 87호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 협약, 98호 단결권 및 단체교섭 협약, 105호 강제노동 폐지에 관한 협약) 비준을 공약했고, 비정규직 사용사유제한과 공공부문 상시일자리 정규직 전환 등 전향적인 노동정책을 내세운 바 있다. 최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은 새 정부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내면서도,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이 과거 정부들의 노동계 길들이기의 반복이 되어선 안된다는 우려 또한 밝혔다....
소녀상이 가령 비석이나 사죄 구호를 담은 조형물이었다면 어땠을까? 전시에 어린 소녀들을 성 노예로 만들고 무참히 살해하기까지 한 일본의 책임을 묻고 있는 소녀상. ‘평화의 소녀상’은 2015년말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국민들이 함께 분노하고 아파하며 마음을 모으는 역사적 실체가 돼 왔다. 사실 소녀상은 태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조각가인 김서경, 김운성 부부가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소녀상을 구상했던 것은 아니었다. 2011년 1월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 인사동으로 향하던 김운성 작가는 일본대사관 앞에서 발을 멈추고 위안부 피...
일본이 전시 성노예, 즉 위안부 제도를 만든 것은 1931년 만주사변 이후였다. 일본이 이같은 유례없이 참혹한 범죄를 기획한 이유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남아있는 극소수의 문헌들에 비춰볼 때, 병사들의 사기 진작과 전력을 저하시키는 성병을 예방하고자 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일본은 이후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을 거치며 위안부 제도를 더욱 확대하고 체계화시켜 갔다. 일본은 근대화 이후로도 공창제 하에서의 인신매매를 묵인·방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창제와 인신매매의 기본 매커니즘에 근거해 위...
“그때 나는 다리를 질질 끌고 가서 그녀의 주검을 보았다. 죽어 있는 모습은 정말 참혹했다. 입 주위로는 누르스름한 액체가 흘러 나왔고 그 액체를 둘러싸고 열대 지방에서나 볼 수 있는 작은 쇠파리가 새까맣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랫도리에는 주먹만한 고무꽈리 같은 것이 밀려 나와 있었다. 그것은 격한 마찰에 의해 애기 집이 뒤집혀 나온 것이었다. 그 시체를 치우면서 왜놈 포주가 말하더구나. 대 일본 제국을 위해 명예롭게 최후를 마쳤다고.”(소설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 일부) 일본군 위안부의 참상이 사람들에게 먼저 알려진 것...
박영심 할머니는 1921년 겨울 평안남도 남포시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그는 집에서 늘 외로웠다고 했다. 양복점에서 일을 하던 열일곱 살의 박영심은 친구와 함께 할머니 집에 갔다가 일본 순사에게 잡혀 끌려갔다. 일본 순사는 검은 제복에 별 두 개를 달고 있었고 긴 칼을 차고 있었다. 평양역으로 끌려간 박영심과 친구는 다른 15명의 조선인 소녀들과 함께 중국 남경으로 압송됐다. 1939년의 봄이었다. 남경엔 일본군 병영들이 많았는데, 병영으로부터 5백미터 떨어진 곳에 3층짜리 벽돌건물이 있었다. 빈 깡통들...
국내에서 처음으로 일본의 만행을 알린 위안부 생존자는 고 김학순 할머니다. 김 씨는 광복 46주년을 하루 앞둔 1991년 8월14일 위안부 문제의 실상을 생존자로서 증언했다. 그 이전에도 한일 양국에서 위안부 문제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는 목소리로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었다. 윤정옥 교수가 한겨레에 ‘정신대 취재기’를 연재하고 한국의 여성운동이 정대협을 결성한 후 김학순 할머니를 비롯한 피해자들이 나서면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세계적인 움직임이 시작됐다. 취로사업에 나갔다 우연히 알게된 ...
편집자주: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그 피해자들의 고통이 계속되고 일본 정부가 그 진실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지금도 진행중인 ‘범죄’입니다. 피해자들과 국민 대다수는 희생자에게 또다시 희생을 강요하는 2015년말 한일 정부의 위안부 합의에 분노했습니다. 이에 위안부 합의를 무효화하고 진정한 해결책을 찾는 일이 새 정부의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은 총 10회에 거쳐 위안부 문제의 성격을 조명하고 ‘위안부 합의’의 문제점을 짚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창립멤버인 김혜원 선생은 1988년 ...
2014년 4월16일 세월호가 진도군 병풍도 인근에서 급변침할 당시 단원고 2학년 박○○ 양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4층 선미의 SP-1룸에서 쉬고 있었다. 배가 갑작스레 기울면서 선실 내의 학생들이 화장품, 신발, 캐리어 같은 짐들과 함께 모조리 창문쪽으로 부딪히며 떨어졌다. 곧 선내 안내방송이 나왔다. “이동을 하면 위험하니 안전봉을 잡고 대기하라” “현재 자리에서 이동하지 말라” “절대 움직이지 말라” “구명동의를 착용하고 현재 위치에서 절대 이동하지 말라” “해경 구조정 및 어선 10분후 도착예정이다. 선실이 더 안전하다”...
세월호 도입과 운항, 그리고 침몰 이후 과정에서의 국정원의 부적절한 개입은 세월호 참사에 있어서 대표적인 진상규명 과제다. 그러나 항만청이나 항만공사, 해경 등 다른 정부기관들과 달리 국정원은 수사대상에서 제외되었을 뿐 아니라, 수사 당국에 의해 슬그머니 지워졌다. 취재 결과 청해진해운과 국정원의 사고 당일 통화내역은 수사당국에 의해 위조된 것으로 드러났다. 광주지검 목포지청에서 작성된 ‘수사보고서(청해진해운 임직원 사고당일 통화내역)’를 보면 청해진해운 김○○ 기획관리부장이 9시 33분과 9시 38분에 보낸 문...
은 세월호 침몰 당일 제주해군기지로 가는 수백톤의 철근이 세월호에 실렸던 사실을 보도한 바 있다. 제주해군기지용 철근은 세월호 인양과 함께 대표적인 진상규명 과제로 손꼽히고 있다. 동시에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은 이 철근 문제가 괴담이고 음모론이라는 논조를 세워가고 있다. 조선일보는 지난달 27일 세월호 인양에 맞춰 “모습 드러낸 세월호… 3년 나돌던 ‘잠수함 충돌說’ 잠재웠다”라는 기사를 통해 네티즌 일명 ‘자로’의 잠수함설과 함께 철근 문제를 대표적인 ‘괴담’과 ‘의혹’으로 꼽았다. 그러면서 해수부 입장을 ...
해경이 세월호 선내의 승객들을 구조할 기회는 적지 않았다. 그러나 511호 헬기가 처음 현장에 도착한 9시27분부터 항공구조사들은 한 차례도 선내에 진입하지 않았고, 123정은 9시34분 이후 선내 방송 장비 내지는 대공방송을 이용한 퇴선 유도를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또한 123정의 고무단정이 3층 로비 정면에 수차례 접안했을 때 해경들은 퇴선하라고 소리치지도 않았다. 고무단정에 승선했던 세 명의 해경은 3층 로비의 승객들을 못봤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해경 고무단정이 9시 44분경 세번째 세월호에 접안했을 당시에 주목했다....
은 2014년 4월16일 구조헬기들을 지휘했던 해경초계기(B703호)와 헬기간 교신록을 박주민 의원실을 통해 국방부로부터 입수했습니다. 이로부터 세월호 침몰 당일, 헬기들이 선내진입 없이 소극적 구조활동만 했던 것이 공중 OSC(현장지휘관)의 역할을 맡은 초계기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해경초계기는 세월호 승객들을 구조할 수 있던 골든타임인 9시58분부터 10시3분까지 수차례 “임무에 집착하지 말라” “무리해서 임무하려고 하지 말고 어느 정도 인원을 실었으면 빠지라”는 이해할 수 없는 지휘통제를 시행했습...
2014년 4월 16일 9시 27분부터 약 한시간의 골든타임, 당시 헬기들이 선내진입 없이 소극적 구조활동만 했던 것이 공중 OSC(현장지휘관)의 역할을 맡은 초계기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은 이들 해경초계기와 헬기간 교신록을 최근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했다. 이 교신록에 의해 당시 헬기들의 활동을 지휘했던 게 B703호기였고, 헬기들이 선내 진입을 하지 않고 오직 자력탈출한 승객을 4명~5명 단위로 실어나르는 일을 했던 것은 이 B703호기의 지휘에 따른 것임이 새로이 드러났다. 이 교신...
2014년 4월16일 세월호에서 도주한 선장과 선원, 그리고 선사인 청해진해운 관계자들에 대한 재판은 2015년 말까지 모두 끝났다. 그러나 304명의 생명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데 핵심 역할을 한 간부 선원들에 대해서도 살인죄가 적용되지 않았다. 이들 간부 선원들이 선장의 ‘부작위에 의한 살인행위’에 공모, 가담하였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대법원은 △간부 선원들이 선내 대기 중인 승객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사태의 경과를 지배하는 지위에 있었다 보기 어렵다 △선장이 명시적으로 퇴선조치에 대한 거부의사를 밝힌 것도 아니어...
해경 123정이 단원고 학생 50명이 배정된 객실 유리를 깨자는 선원의 제안을 받고도 이를 묵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해경은 "세월호 기울기가 너무 심해 접안하기에 위험하다"며 123정을 뒤로 물렸지만 이후에도 세월호는 최소 10분 이상 탈출가능한 상태가 유지됐다. 은 해경이 세월호 4층 다인실에 대한 구조 제안을 묵살했을 당시의 영상과 사진자료들, 그리고 법정 증거기록들을 관련 연구자들의 도움을 받아 최근 입수했다. 이들 증거자료들은 해경이 수난구호법에 따라 승객들을 적극적으로 구조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승객들의...
[인터뷰]송기호 민변 국제통상위원장 “화해치유재단, 미르재단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조사해야” “일본 정부를 위한 재단을 여성가족부에서 인가를 해줬다. K재단, 미르재단과 마찬가지로 새 정부는 화해치유재단에 대해 조사해야 한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국제통상위원장인 송기호 변호사는 곧 들어설 새 정부가 그 첫번째 과제로 12.28 위안부 합의의 실체를 밝히고 화해치유재단을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5년 12월28일 한일 외무장관의 ‘위안부 합의’ 발표 이후 계속되고 있는 일본의 고압적인 언사와 위안부 강제연행 부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순덕 할머니가 4일 오전 7시30분께 별세했다. 이순덕 할머니는 향년100세로 국내 위안부 피해자 가운데 최고령으로, 마포구에 위치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쉼터인 평화의우리집에 거주해왔다. 이 할머니의 별세로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8명 중 생존자는 38명으로 줄었다. 이 할머니는 1918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1934년 17세의 나이로 일본군에 끌려가 1945년 해방 이후에 귀국했다. 1991년 일본 야마구치현에서 다른 위안부 피해자 9명과 법정 투쟁을 시작한 이 할머니는 1998년 광...
세월호 침몰 당시 고정 평형수를 담기는 4번 탱크가 비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사진이 나왔다. 는 2014년4월16일 오전 해경 초계기가 촬영한 열적외선 동영상을 분석해 배의 복원력을 유지하는 4번 탱크의 평형수(147.5톤)가 비어 있었다고 보도했다. 세월호 침몰 당일 사고 해역을 촬영한 초계기(CN-235)가 촬영한 열적외선 동영상은, 세월호 선체의 온도 차이에 따른 색상과 명도를 보여준다. 오전 9시 36분 01초 전후의 영상을 보면, 고정 평형수 탱크인 2번과 5번이 바닷물 명도와 비슷하게 검게 표시된데 ...
대통령 대리인단이 세월호 침몰 당일 정부종합청사 정문에서 ‘차량 돌진 사고’가 있었다며 제출한 증거 영상에 등장하는 차량이 방송국 차량으로 드러났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가 위치한 정부종합청사에서 차량 사고가 있었다는 것은,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의 중대본 방문 지연과 관련해 박 대통령의 대리인단이 내놓은 주장이었다. 대리인단은 4일 “세월호 사고 당일 박 대통령의 중대본 방문 직전, 차량이 중대본 정문으로 돌진해 사고가 발생한 사실이 있다” “이 사고 처리로 인해 피청구인의 중대본 방문이 지연돼 이를 입증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