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무개(34)씨는 동성애에 찬성한다. 이씨는 올해 총선과 대선에서도 동성애 찬반 여부를 따져 정치인들에게 표를 던질 예정이다. 하지만 자신의 신분을 밝히면서까지 동성애 찬성 의견을 밝히는 것은 부담스럽다. 아직까지도 동성애 자체를 혐오하는 사회적 시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씨는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동성애와 관련된 이슈가 터질 때면 자신의 페이스북이나 트윗 등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활용해 자신의 의사를 밝히기도 한다. 이씨는 동성애와 관련된 주요 정치인들의 발언을 살펴보고 게시물을 올릴 예정이다. 동성애와 관련된 인터넷 뉴스에 댓글을 다는 것도 주요 활동 계획이다. 이씨는 하지만 선거운동 기간 인터넷 뉴스에 댓글을 다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공직선거법상 인터넷 뉴스에 댓글을 달려면 본인 확인을 거쳐 자신의 실명을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인터넷 선거운동은 상시 허용해놓고 선거운동 기간 언론사 사이트에서 실명을 밝혀야 하는 모순된 상황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헌법재판소가 인터넷 선거운동을 상시 허용하다는 취지로 제93조 1항에 대해 한정위헌 결정을 내렸지만 공직선거법 제82조6항에 선거운동 기간 인터넷언론사 게시판에 실명을 확인하도록 하는 조치를 강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선거운동 허용해놓고 이름을 밝히라고?

인터넷 언론사들은 공직선거법 제82조6항(인터넷언론사 게시판·대화방 등의 실명확인)에 따라 선거운동 기간 게시판과 대화방을 운영하면서 실명인증을 확인받도록 하는 기술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선관위가 실명인증 자료를 제출하라고 하면 인터넷 언론은 따라야 한다. 실명인증의 받은 자의 게시글에는 '실명인증' 표시가 나타나게 되고, 인증 표시가 없이 정당 혹은 후보자에 대한 지지 또는 반대 글이 게시되면 인터넷 언론은 해당 게시물을 삭제해야 한다.

이를 어기면 최고 10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해야 하고, 실명인증을 받지 않는 댓글을 방치할 경우에도 3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이행하지 않은 일수에 따라 과태료와 벌금도 가중된다.

올해 치러지는 총선과 대선에서도 선거법 개정이 되지 않은 이상 언론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해당 조항을 따를 수 밖에 없다.

선거법 제82조 6항은 정보통신망법에 규정된 본인확인 실명제 조항과 함께 오래기간 동안 인터넷 언론사와 이용자들의 비판을 받아왔다. 해당 조항은 선거가 있는 시기가 오면 인터넷 언론사들이 과태료 부과를 감수하면서까지 불복종 운동을 벌이면서 논란이 돼 왔다. 인터넷 언론사들은 해당 조항의 위법을 가리기 위해 헌법소원심판도 청구했다. 자신의 의사를 밝히면서 강제로 실명까지 노출시키는 것은 과잉금지원칙에 위반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대표적인 독소 조항이라는 것이다.

헌재는 하지만 지난 2010년 "인터넷의 특성상 허위사실이 빠르게 유포돼 정보의 왜곡이 쉽고 짧은 선거운동기간 중 이를 치유하기 어렵다는 점 등에 비춰 표현의 자유 등을 침해한다고 할 수 없다"며 기각 결정을 내렸다

법적 정당성도 없고 실효성도 없고

하지만 상황이 변했다. 헌재는 제93조 1항에 대해 스스로 인터넷 선거운동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한정위헌 결정을 내렸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선거운동 기간 이전 인터넷을 통한 선거운동을 금지한 254조 2항이 헌재의 한정위헌 결정에 배치된다며 국회에 개정을 권고하고 나섰다. 사전선거운동 금지 조항이 개정되면 선거운동 기간 실명제 제한을 두는 제82조 6항도 실효성을 갖기 힘들다.

특히 방송통신위원회가 10만 명 이상 유입되는 인터넷 사이트를 대상으로 한 본인 확인 실명제 폐지를 재검토하겠다고 밝히면서 인터넷 실명제 자체가 유명무실화됐다는 평을 받고 있다. 포털 사이트도 개인정보 유출 사건을 우려해 올해부터 주민등록번호 등 실명제 유지에 필요한 개인정보를 보관하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선거운동 기간 유독 인터넷 언론사만이 실명제를 따라야할 법적 정당성이 없다는 얘기다.

사실 해당 조항은 이미 사문화 단계를 밟고 있다. 인터넷 언론사들 대부분은 가입시 실명 정보가 필요없는 SNS 댓글을 연동한 게시판을 운영하고 있다. 선관위가 해당 조항을 적용하고 싶어도 선거법 적용 논란만 가중시킬 뿐 효력을 갖기 어려운 이유다.

해당 조항은 법적 실효성이 없을 뿐 아니라 불필요한 비용 문제를 낳을 수도 있다.

10만명 이상 유입되는 인터넷 언론 사이트의 경우 이미 정보통신망법상 본인 확인제 의무에 따라 실명 인증 절차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10만명 이상 유입이 어려운 인터넷 언론사들은 과태료를 물지 않기 위해서 선거운동 기간 게시판 운영을 위한 별도의 실명 확인 시스템 구축 비용을 들여야 한다. 보통 인터넷 언론사 실명 시스템은 행정자치부 시스템과 연동하는 방식인데 정부의 인력과 비용도 들 수밖에 없다. 선관위에 따르면 지난 10일 기준으로 해당 조항에 따라 선거기간 동안 게시판 실명제를 조치해야 하는 인터넷 언론사는 2279개에 달한다.

영세한 인터넷 언론사들은 선거운동 기간만 되면 게시판을 닫아버리는 형태로 규제 조항을 피해왔다. 중앙선관위에 따르면 제82조2항의 적용을 받아 과태료를 부과한 언론사는 2006년 민중의소리(750만원)와 2007년 참세상(1000만원), 단 2곳 뿐이다. 두 언론사도 해당 조항을 따르는 것은 부당하다며 반발해 일부러 과태료를 낸 경우다.

이준희 한국인터넷기자협회 수석부회장은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선관위에서도 선거 당일 실명이 필요없는 SNS를 통해 투표를 권고하는 것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인데 유독 선거운동 기간에 인터넷 언론사들에게 실명제를 강요하는 것은 헌재 결정 취지에도 맞지 않고, 돈 낭비, 인력 낭비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 수석부회장은 "선관위가 국회 정치개혁특위에 공식적으로 해당 조항의 문제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면서 "정개특위 위원들 역시 해당 조항이 헌재 판결과 상충되기 때문에 하루빨리 선거법 개정안을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인터넷기자협회는 성명을 통해 "인터넷언론사를 대상으로 한 선거 시기 게시판 실명제는 더 이상 시대 상황에도 맞지 않으며, 국내 인터넷언론사에 대한 차별 논란을 피할 수 없다"면서 "방통위가 상시적 인터넷실명제를 폐지하겠다고 밝힌 이상, 또한 SNS 사이트들은 실명제 자체가 없기에, 오로지 국내 인터넷언론사에게만 강제로 적용되는 선거 시기 게시판 실명제는 세상도 없는 해괴망측한 법이 되고 만다"고 꼬집었다.

중앙선관위도 내부적으로는 폐지 의견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제83조 2항에 대한 개정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지난 18일 여야 정당과 인터넷기자협회, 인터넷 신문협회, 온라인 신문협회, 인터넷 기업협회, 인터넷정책자율기구 등이 모인 사이버 유관기관 단체 업무협의회에서도 중선관위는 해당 조항의 문제점에 대해 깊이 공감한 것으로 전해졌다.

선관위 법제과 관계자는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방통위에서 본인확인제 폐지를 검토하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선거법 제82조 2항도 있을 필요가 없게 된다"고 말했다. 방통위가 10만명 이상 유입되는 사이트에 대해 1년 내내 실명을 확인하는 정보통신망법상 본인확인제를 폐지하겠다는 마당에 선관위가 선거운동기간만 한정해 10만명 이상 유입이 어려운 인터넷 언론사들을 대상으로 실명제 조치를 강제하는 제82조 2항도 구속력을 가지기 힘들다는 것이다.

관계자는 또한 "헌재가 인터넷 선거운동을 상시 허용하는 것으로 봤기 때문에 선관위가 이 조항과 관련해 폐지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는 의견"이라고 말했다.

다만 관계자는 "아직까지 선관위의 공식 의견은 아니다"면서 "선거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해당 조항에 따른 과태료 부과는 그대로 가는 것이다. 집행기관이 법이 있는데 적용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헌재에서도 한 인터넷 언론사가 청구해 인터넷 본인 확인제를 규정한 정보통신망법 44조 5항에 대한 위헌 소송이 제기돼 있다. 44조 5항이 위헌 결정을 받으면 제83조 2항도 설 자리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헌재 관계자는 "통상적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헌재 위헌 소송은 2년 안에 선고를 끝내려고 한다. 정보통신망법 위헌 소송은 지난 2010년 4월에 제기됐는데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올해 초에는 해당 조항에 대한 판결이 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결국 선거법 개정은 국회 몫이다. 제83조 2항을 삭제하는 선거법 개정안은 김부겸 민주통합당 의원의 발의로 국회 정치개혁특위에 올라와 있다. 하지만 정개특위는 선거구 획정안에 대한 여야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선거법 개정 논의가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정개특위는 오는 31일 전체회의를 열어 선거법 개정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황영민 유권자자유네트워크 정책담당자는 "길거리를 걸을 때 일상적으로 경찰이 불심검문을 수행하지 않는다"며 "인터넷 공간은 정치적 의사표현을 하면 내부적으로 자체 정화를 거쳐 중론을 형성되는 공간이기 때문에 실명제를 강제하는 것은 상시적 불심검문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표현을 위축시키는 효과만 있을 뿐이다. 관련 조항을 폐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