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가 방응모에 의해 인수된 이후 기업적 운영을 본격화하자 서서히 아메리카 저널리즘에 가까운 근대적 요염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실제로 방응모는 조선일보를 인수한 후 조직개편 등 기업적 운영을 위한 다양한 조치를 취했고 신문의 기업화, 상업화를 주도하는 역할을 해왔다.

1920년 대지주와 예속 자본가들 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가 창간한 조선일보는 경영난에 따른 잦은 판권 이동을 겪은 후 1933년 금광 발견으로 큰 돈을 벌게 된 방응모가 인수하게 된다.(시리즈 3회 참조)

방응모가 벼락부자가 된 후 신문사를 인수하게 된 배경에 대해 연구자들은 그의 전력과 연관지어 해석한다. 그는 1922년 6월부터 동아일보 정주(평안북도 소재)지국장을 지내다가 신문대금 미납으로 인해 가산이 강제차압 당하는 수모까지 겪였다.

당시 방응모는 서울 본사에 와서 사정을 했으나 효과가 없자 이에 분개, 어디 10년 후에 보자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나와 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동아일보 정주지국장을 그만둔 방응모는 오랜기간 덕대-소규모 광산 채금 사업가로 대규모 광산의 하청을 맡아하기도 했다- 생활을 하다 국내 5대 광산에 들게된 커다란 금광을 발견, 한동안 노동자가 1천명이 넘는 규모의 교동광산을 운영했으며 1932년에 이를 일본인 소유의 중외광업주식회사에 1백35만원을 받고 팔았다.

거액의 광산 매각대금을 손에 쥔 방응모는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던중 같은 평안도 출신인 조만식 등이 조선일보 인수를 권유하자 주저없이 신문사업에 뛰어 들었다. 그가 다른 사업도 아닌 사업전망이 불투명했던 신문사업에 뛰어든데는 동아일보에 대해 가졌던 감정과 관계가 있었다고 보인다. 정주지국장 시절 당했던 수모가 오랫동안 그의 뇌리에 남아 있었고 결국은 그의 말대로 10년후에 동아일보의 경쟁지를 인수하기에 이른 것이다.

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인수와 동시에 거액을 투자했다. 그해 1월 조선일보 영업국장 취임과 동시에 자본금 20만원의 주식회사를 설립하는 한편 같은 해 7월에는 사장에 취임하면서 10만원을 추가 출자, 총 30만원의 자본금으로 주식회사 법인등기를 마쳤다.

그는 같은해 9월에 다시 20만원을 증자, 총자본금 50만원을 불입완료하는 등 파격적인 투자를 했다. 여기에 별도로 10만원을 들여 새사옥을 짓기도 했다. 이로써 조선일보는 다른 신문과 달리 자본금 50만원을 확보, 가장 튼튼한 재정기반을 확보했다. 특히 다수의 주주들이 출자했던 동아일보와는 달리 조선일보는 방응모가 자본금 전액을 단독출자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경영의 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같은 방응모의 경영전권 장악에 대해 항간에는 장래는 몰라도 오늘의 조선일보는 순연한 방씨 독재시대인 느낌을 준다. 방씨가 생존해 있는 이상 자신의 자유의사로는 조선일보에서 손을 떼지 않는 한에 있어 씨의 성격으로 보아 이 독재는 영속될 것이다라는 비난까지 있었다. 이는 방응모가 자본금을 전액출자했다는 이유로 신문을 일종의 사유물로 인식하고 자신이 모든 권한을 행사하려 했다는 비판이었다.

어쨌건 대규모 광산기업 운영 경험이 있었던 방응모는 다른 민간지 운영자들과는 달리 신문을 하나의 기업으로 변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전환점을 만들었다. 당시 타 민간지들은 지주들이 소규모로 출자,운영되고 있어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방응모에 의해 인수된 이후 기업적 운영을 본격화하자 서서히 아메리카 저널리즘에 가까운 근대적 요염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방응모는 조선일보를 인수한 후 조직개편 등 기업적 운영을 위한 다양한 조치를 취했고 신문의 기업화, 상업화를 주도하는 역할을 해왔다. 특히 방응모는 동아일보에 있던 이광수를 포함, 타사의 언론인들을 빼오는 등 적극적인 경영전략을 구사했다.

방응모의 이러한 경영전략은 결국 일제하의 신문이 더 이상 민족적 기대보다도 기업적 이윤추구와 경쟁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됐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당시는 토착자본 상층에 의해 운영되던 동아일보가 점차로 예속적 성격을 드러내던 상황이었던데다 조선일보마저 기업적 운영을 본격화하고 나오자 민간지들이 민족적 현실을 외면한 채 기업적 경쟁에만 몰두하는 현실이 전개된 것이다.

특히 민간지들이 점차로 친일적인 논조를 보이던 1930년대, 방응모에 의해 인수된 조선일보가 기업적 경쟁을 주도하게 되자 신문들의 논조가 더욱 급격히 변질됐다.

조선일보의 친일적 논조가 심화되는 것에 발맞춰 각 민간지들의 지면에는 대중적인 문예물이 급증하는 등 상업주의적인 논조가 기승을 부리는 계기를 만들었고, 나아가 식민지적 황색 저널리즘의 등장을 가져왔다. 민족지를 내세운 민간지들이 드러내 놓고 친일지로 변하기 시작한 전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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