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올해 들어 가장 날씨가 추웠다는 날, 빨간 스커트에 롱부츠를 신은 그를 만났다. 예사롭지 않은 옷차림을 하고 나타난 그를 본 첫인상은 ‘크다’는 것. 실례가 될 수 있는 “키가 몇이냐”는 돌발 질문에 망설임 없이 “168cm”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기자님, 전화 목소리와 달리 젊네요”라고 응수한다. 긴장감이 살짝 묻어나는 장새별 아나운서(29)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대기업 비서직 버리고 선택한 방송의 꿈

장 아나운서는 스포츠 전문 채널 KBSN에서 스포츠 전문 캐스터로 맹활약 중이다. 지난 2010년 입사해 2년차인 장 아나운서는 올해 배구와 농구 중계 경기의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코트를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이날 오전 마포구 상암동 KBSN 사무실에서 만난 장 아나운서는 울산 현대 모비스와 원주 동부 프로미의 농구 경기에 앞서 자료 조사에 한창이다. 장 아나운서가 들고 온 수첩에는 차곡차곡 눌러쓴 두 팀의 정보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울산 현대 모비스 6위 / 11승 14패 / 6위
원주 동부 프로미 1위 / 21승 5패 / 1위
프로미-3점슛 성공률↑, 특유의 짠물, 질식수비→동부 산성
모비스-양동근 선수 올스타 팬 투표 선두…“외국인 선수 레더 의존도 높아 벤치멤버 활용 늘려야”  

경기에 앞서 양팀의 감독을 인터뷰하고, 경기가 끝나면 생방송으로 승리 감독과 수훈 선수와의 인터뷰를 진행하기 위해서 이 정도의 정보 파악은 기본이다. 시청자에게 승패의 승부처를 분석해 경기 전후의 정보를 전달하고 경기 현장에서 포인트를 짚어주는 것이 장 아나운서의 역할이다.

“동부 프로미는 로드 벤스-김주성-윤호영으로 이어지는 ‘트리플 타워’를 가지고 포워드 중심의 농구를 구사하는데 1~2라운드를 지나면서 동선 패턴이 읽혔어요. 최근 KGC에 패해 11연승이 중단됐죠. 현대모비스는 테레스 레더가 새롭게 합류한 것이 변수입니다”

현재는 프로농구 리그의 전적은 물론 게임의 변수까지 다 꿰는 준전문가가 다 됐지만 사실 장 아나운서는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일반 회사원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를 졸업하기 전, 4학년 2학기에 제조업 분야의 한 대기업 사장의 비서로 취직한 것. 실업률이 하늘로 솟구치는 상황에서 어렵게 얻은 직장이었다. 아나운서를 하겠다고 했을 때 집안의 거센 반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래도 방송의 꿈을 버릴 수 없었다. 무작정 회사를 그만두고 방송사 입시 학원을 끊었다.
 

방송의 길은 한 케이블 방송에서 뉴스 앵커로 시작했다. 프리랜서로 보건복지부의 뉴스 진행을 맡기도 했다. 방송 활동 중 또 다른 대기업으로부터 비서직을 제안받기도 했지만 한눈 팔지 않았다. 그리고 높은 경쟁률을 뚫고 이 자리까지 왔다. 후회는 없다고 했다. 오랫동안 방송의 길을 걷고 싶다는 것이 장 아나운서의 소박한 꿈이다.

장 아나운서는 “경기 전에 여자들이 현장에 나오면 재수 없다고 하는 문화가 있었는데 여성들의 스포츠 관심도가 높아지고 그에 따라 여자 아나운서의 역할이 확대됐다”며 향후 스포츠 중계 해설자로서의 꿈도 살며시 내비쳤다.

미용실서 본 강용석 의원은 ‘샵 친구?’

장 아나운서가 짧은 인터뷰를 뒤로 하고 바삐 걸음을 재촉한다. 경기가 있는 울산까지 가기 전 오전 중에 방송 준비를 마쳐야 한다. 오전 11시 30분 택시를 타고 홍익대 앞의 회사와 계약한 미용실로 향한다. 메이크업과 머리 손질은 방송과 시청자들에 대한 예의다.

거울 앞에 앉자마자 메이크업 아티스트 소영씨의 손이 장 아나운서의 얼굴 위를 분주하게 오고간다. 소영씨는 “방송용 메이크업은 눈매가 시원하게 나와야 해요. 특히 어두운 경기장의 조명이 쥐약이어서 메이크업을 또렷이 해야지 그나마 준비한 것처럼 보이죠”라고 설명했다. 소영씨는 “새별씨는 그런데 워낙 피부가 좋으니까”라고 한껏 치켜세운 뒤 “비방용 멘트는 나중에 합시다”라고 농을 건넨다.
 

머리 손질도 소홀히 할 수 없다. 헤어드라이기로 앞머리에 불륨을 주는 데 공을 들인다. 장 아나운서는 “아나운서의 머리는 앞머리 ‘뽕’이 핵심이죠”라며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먼 거리를 이동할 때 흐트러지기 쉬운 ‘올린 머리’를 하지 않은 것도 중계 방송을 하면서 얻은 경험이다.

장 아나운서는 거울에 비친 ‘변신’한 자신의 모습을 힐끔거리면서도 휴대폰에 눈을 떼지 않고 스포츠 관련 애플리케이션에 접속해 관련 기사를 실시간으로 챙겨본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는 말이 이런 상황을 두고 한 말일까? 공교롭게도 앞머리 ‘뽕’을 한껏 부풀린 장 아나운서와 불과 10미터가 채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무소속 강용석 의원이 머리에 여러 개의 롤파마 집게를 달고 있는 게 아니던가?

지난해 7월 대학생 토론회에 참석한 자리에서 아나운서를 지망하는 여대생을 앞에 두고, 여성과 아나운서 직업을 비하한 장본인과 나란히 머리 손질을 받고 있는 장 아나운서의 반응이 궁금했다.  

“언론보도가 사실이라면 호감을 갖는 것은 무리인 게 사실입니다. 미용실에서 자주보긴 했는데 그럼 저와 강 의원은 샵 친구가 되는 건가요?”

울산행 기차에 몸 싣고 열공모드 돌입

기막힌 우연을 뒤로 하고 장 아나운서는 서울역으로 몸을 옮긴다. 울산 경기 시작 시각은 저녁 7시. 최소 2시간 전에는 경기장에 도착해 인터뷰 준비를 마쳐야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해도 부족하다’는 것이 장 아나운서의 생각이다. 울산행 KTX 열차 안에서도 장 아나운서의 ‘열공 모드’는 계속된다.

11월 개막된 프로농구 중계는 KBSN에서 6년 만에 재개한 만큼 장 아나운서의 어깨도 무겁다. 케이블의 스포츠 중계 방송 시청률은 보통 1%가 넘었을 때 지상파의 10% 수준이라고 얘기한다. 타사 스포츠 증계 방송과 비교한 시청률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스포츠 캐스터라고 하면 연예인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고 스포츠 선수와 열애설이 나는 등 화려한 면이 눈에 먼저 띄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날 하루 동안 옆에서 지켜본 장 아나운서의 일과는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경기 내용을 관통하는 예리한 질문을 치밀하게 준비하는 일은 오롯이 스포츠 캐스터의 몫이다. 조여오는 생방송의 압박을 이겨내야 하고, 자칫 중계팀과 호흡이 맞지 않아 짜여진 방송 시간이 흐트러지면 구박을 받는 일도 예삿일이다. 지방 경기가 연속으로 있는 날이면 육체적 피로도 견뎌야 한다. 장 아나운서는 부산-원주-전주를 오고가는 2박 3일 일정의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스포츠 캐스터의 고용 조건이 좋은 것도 아니다. 지상파 3사 아나운서를 제외하고 다른 채널의 아나운서들은 보통 프리랜서 개념의 계약직으로 회사에 적을 두고 있다. 장 아나운서는 고용 조건을 묻는 민감한 질문에 자신의 전문성을 인정받기까지 고통은 감내해야 한다는 말로 대신한다. 어지간해서 방송 일을 좋아하지 않으면 힘든 일이다. 

스포츠 캐스터로서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지만 비난도 감수해야할 몫이다. 장 아나운서의 경우 페이스북에서 친구맺기를 한 팬이 3500명에 이른다. 방송모니터를 해주는 친절한 팬도 있지만 인터넷의 악성 댓글로 상처를 주는 누리꾼도 많다. 

노동 여건, 악플 등 “감내하지만 지칠 때도”

“한번은 여자배구 현대건설의 한 외국인 선수가 퇴출당해서 확인차 감독에게 질문한 적이 있는데 ‘질문하는 꼴 좀 봐라’는 댓글을 보고, 해명할 창구도 없고 내색할 수도 없어서 참 힘들었죠. 스포츠 캐스터라는 직업이 발로 뛰는 직업인데 마음까지 지쳐 버릴 때도 있습니다”

오후 4시 30분 울산역에 도착하고 플랫폼에서 우연히 이효종 총괄 프로듀서를 만나면서 우울한 기분은 금세 바뀐다. 함께 울산 경기장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장 아나운서에 대한 칭찬이 쏟아졌기 때문.

이효종 프로듀서는 “실수를 해서 뭐라 해도 절대 기죽지 않는다. 장점인지 단점인지 모르겠지만 뻔뻔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하자 장 아나운서는 “직장생활을 한 경험이 이럴 때 도움이 되긴 하는데, 당시 크게 혼났을 때 화장실에서 몰래 울었어요”라고 애교를 떤다. 갑작스럽게 이 프로듀서의 전화벨이 울린다. 씨름 방송 생중계가 뒤로 밀려 농구 중계 편성 시간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것. 장 아나운서는 잽싸게 “사전 인터뷰 질문을 한 두 개로 줄이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이 프로듀서는 “장 아나운서 많이 늘었네”라고 말한다. 

‘열공’ 성과 나오는  사전 인터뷰

오후 5시 울산광역시 동천체육관에 도착하자 장 아나운서의 눈매가 매서워진다. 경기 시작 직전 양팀의 감독을 인터뷰하기까지는 1시간 남짓 남았다. 양팀 감독의 성향까지 파악하고 완벽히 인터뷰를 준비했지만 현장에서는 무엇보다 중계팀과의 호흡이 중요하다. 이미 30여 명의 중계팀은 11대의 실시간 방송 카메라에 전송할 선을 연결하고 중계차에서 시험 방송까지 마쳤다.

이효종 프로듀서는 장 아나운서에게 “지난 경기 내용은 다 넘어가고, 오늘 경기 위주로 마무리하도록”이라며 마지막 주문을 한다. 장 아나운서도 분주해진다. 사전 인터뷰에 들어가기 전 장 아나운서는 권성욱 중계 아나운서와 박건연 해설위원과 의견 조율에 들어간다. 권 아나운서는 ‘딱 떨어지는 중계’로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완벽주의 성격의 소유자이고 박건연 해설위원은 이웃집 삼촌과 같은 편안한 해설이 으뜸이라는 것이 장 아나운서의 평가다.
 

권 아나운서는 “시즌 중반에 접어들었으니 평가를 한번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박 해설위원은 “김주성이 아프다고 하니 그 얘기를 집어넣어라”라고 주문하고, 장 아나운서는 급히 수첩에 받아 적는다.

정확히 6시 15분. 현대 모비스의 유재학 감독과 동부 프로미의 강동희 감독과의 사전 인터뷰가 장 아나운서의 능숙한 솜씨로 거침없이 진행된다. 
 

장새별 아나운서 “레더가 더블팀에 가로막힐 때에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웠나요?”

유재학 감독 “바로 그 부분이죠. 레더가 일대일에 강하지만 더블팀이 들어가면 패스 타이밍이 늦춰지는 등 힘든 게 사실입니다”

예측 불가능한  승리  인터뷰 준비 ‘긴장’

사전에 찍어둔 인터뷰 영상은 중계차에서 ‘라이브 슬로우 모션(LSM)’이라는 기기에 녹화돼 편집에 들어가고, 저녁 7시 경기 시작 후 곧바로 전송된다. 11개의 카메라가 전송하는 화면 중 어떤 화면을 내보낼지 1~11번까지 스위치를 번갈아 누르는 이효종 프로듀서의 손가락이 춤을 춘다. 한쪽에서는 카메라 중계팀이 보내는 화면의 명암을 조절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골을 넣을 때 그물이 출렁이는 소리까지 잡기 위해 음향팀이 신경을 곤두세운다. 
 

중계차량에서 자신의 사전 인터뷰를 모니터한 장 아나운서는 경기장으로 돌아와 경기 후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인터뷰 준비에 들어간다. 사전 인터뷰가 100% 준비된 것이라면 경기를 마친 후 인터뷰는 순발력을 요한다. 어느 팀이 이길지 모르는 상황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승리 감독과 수훈 선수와의 인터뷰를 준비해야 한다.

 

체육관이 “울울~~울산 모비스, 승승~~승리하리라”는 홈팀의 응원가로 흥분에 휩싸일수록 장 아나운서의 손은 바빠진다. 경기가 전개되는 양상에 따라 질문지는 수차례 바뀐다. 장 아나운서는 “관중은 즐겁겠지만 경기가 치열하게 전개될수록 저는 미치는 거죠”라며 너스레를 떨면서도 눈은 코트를 떠나지 않는다. 한번은 전주 KCC 이지스 전태풍 선수가 수훈 선수로 결정됐는데 경기 종료 10초를 남겨놓고 퇴장당한 적도 있다. 당시의 일을 떠올리면 전태풍 선수가 얼마나 얄미웠는지 모른다.

경기 전개 따라 수 차례 바뀌는 질문지

경기 전 장 아나운서는 “어느 스포츠든 조직력이 강한 팀은 이기기 어렵다. 흔들리지 않는 조직력과 높이를 앞세워 골밑을 장악하는 동부 프로미가 이날 승리하지 않을까 싶다”고 점쳤는데 이날 경기 종료 6분25초를 남기고 동부 프로미의 주축 선수인 벤슨이 5반칙으로 퇴장을 당하자 장 아나운서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역력해진다.
 

경기 막판 울산 53 대 원주 63으로 점수차가 벌어지자 그제서야 장 아나운서는 최종 인터뷰 내용을 검토한다. 경기 종료 2분 전 장 아나운서는 코트로 내려가 동부 프로미의 강동희 감독과 이날 수훈 선수인 윤호영 선수와 인터뷰를 진행한다. 장 아나운서는 “11월 말에 딸 돌잔치를 했다고 들었습니다”라고 질문하자 윤호영 선수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짧게는 5분, 길게는 10분 정도의 인터뷰에서 장 아나운서의 노력이 빛나는 순간이다.
 

 

짧지만 달콤했던 데이트를 마치면서 장 아나운서는 소박한 바람을 전했다. 

 “스포츠 캐스터라는 직업에 대해 너무 화려한 면만 보면 안 됩니다. 제가 느끼기로는 이 자리는 공부하는 자리예요. 수많은 스포츠 팬을 대신하는 자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스포츠 방송에서도 교양 혼합 프로그램이 생겨서 여성 캐스터가 설 자리가 커지고 영역이 넓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 장새별 아나운서는

2010년 KBSN에 입사해 스포츠 캐스터로서 프로 배구와 프로 농구, 여자 배구와 축구 중계 방송을 하고 있다. 복싱 프로그램인 ‘KO 퍼레이드’의 진행을 맡기도 했다. 언론에서 대기업 비서 출신의 스포츠 캐스터로 관심을 받았다. 비서에서 아나운서로 직업을 바꿀 때 반대가 심했던 가족은 현재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어머니는 다른 아나운서의 방송까지 꼼꼼히 챙겨보고 따끔히 조언할 정도여서 ‘모니터 여왕’이란 별명이 붙었고, 직장 농구 동호회에서 선수로 뛸 정도로 농구광인 오빠는 수시 때때로 연락해 전문가 시각을 반영한 질문도 건네준다.

장 아나운서는 자신의 강점으로 인터뷰 친화력과 질문 유도력을 들며 “딱딱하지 않은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참고로 장 아나운서는 “하드웨어가 좋고 베짱있는 플레이”를 하는 안양 KGC 인삼공사의 오세근 선수와 “영리한 플레이로 골밑을 자유 자재로 파고드는” 서울 SK 나이츠의 김선형 선수를 좋아한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