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대부분의 언론이 1면 머릿기사 등으로 크게 보도한 ‘평양시민 1백만명 강제이주’ 기사는 “북한관련 기사는 확인하지 않고 써도 좋다”는 우리 언론의 ‘고질적 병폐’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특히 권영해안기부장이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초청해 브리핑을 하면서 이같은 ‘첩보’를 흘린것과 관련, 지자제 선거를 겨냥한 안기부의 언론플레이에 넘어간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권영해안기부장은 지난 1일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초청, 보도하지 않을 것(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최근의 북한정세 전반에 관해 설명했다. 이 자리에서 권부장은 문제의 ‘평양시민 강제이주’에 관해 꽤 긴시간동안 설명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권부장은 북한당국의 이같은 조치의 배경으로 △평양 인구집중 억제 △체제 불만세력 격리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기사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히자 권부장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조건으로 이에 동의했다. 안기부는 또 보충자료까지 만들어 보냈다.
문제는 권부장의 이같은 브리핑이 그야말로 ‘첩보’ 수준이며 정보기관의 ‘분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권부장이 제시한 근거는 “최근 북한을 방문한 상사원과 관광객, 해외동포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는 것 뿐이다. 1백만명이라는 숫자나 북한당국의 이같은 조치의 배경도 “이러이러할 것이다”는 추측과 분석에 머물고 있다.

이 추측과 분석을 ‘사실’인 것처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이번 강제이주가 “나진 선봉 경제특구 개발에 따라 현재 이 지역 인구를 20만명에서 2010년까지 1백만으로 확대 조성한다는 계획에 따른 것이라고 북한당국은 주민들에게 설명하고 있다”는 보도만 해도 이전의 언론보도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다.

지금까지 우리 언론은 나진 선봉지구의 경우 노동당 당원 가족등 북한 체제를 신봉하는 사람들만이 갈 수 있는 곳이며 그렇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교체작업이 진행중인 것으로 보도해왔다. 그런데 권부장의 말 한마디로 나진 선봉지구가 성분불량자 집합지역으로 바뀐 것이다.

평양시 인구가 최근 3백50만 가까이 급증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공보처가 90년에 낸 <도표로 본 북한의 오늘>에 따르면 평양인구는 3백28만명(통일원 정보분석실 자료를 인용한 것으로 돼있음)으로 돼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90년이나 최근이나 별다른 인구변동이 없다. 이런 부분에 대한 검증없이 “최근 평양인구가 급증했다”는 안기부의 발표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또 평양에서 살기 위해서는 ‘엄격한 성분심사’를 거친다는게 그동안의 언론보도였는데 불과 몇년만에 1백만명 가까운 ‘성분불량자’가 생길 수 있는지도 확인이 필요했다. 1백만명의 강제이주로 생길 수 있는 또 다른 체제불안 요소, 그에 소요되는 엄청난 비용 등을 감안할때 북한 당국이 이런 ‘무모한’ 정책을 과연 추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한번쯤 생각했어야 했다.

한 북한담당 기자는 “오랜 기간 북한취재를 한 경험으로 볼때 이번 기사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정보기관의 일방적 견해에 불과하다”며 “어떻게 이런 기사가 1면 머릿기사로 올라갈 수 있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말했다.

기자들이 요청하자 두말없이 ‘오프 더 레코드’를 풀고 친절하게 보충자료까지 만들어 보낸 권안기부장의 태도도 뭔가 석연찮은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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