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어이없는 오보가 발생하기도 한다. 기자들은 이럴때 ‘귀신에 홀린 것 같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93년 10월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 당시의 ‘백선장 생존’ 오보도 원인을 찾아가 보면 실로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게된다. 물론 이 오보는 언론의 상업주의 경쟁과 기자의 예단에서 비롯됐다는 비난도 피할 수 없다.

훼리호 백운두선장이 살아 있다는 보도가 처음 나간 시점은 사고발생 하루뒤인 10월11일. 당시 전북일보는 1단으로 백선장 생존설이 나돌고 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나 이때까지 별다른 파장은 없었다. 그러다 생존설 보도경쟁이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한 때는 한겨레신문이 12일자에 “선장 백운두씨 살아있다”고 보도하면서부터. 이후 백선장 주검이 인양된 15일까지 언론의 보도는 온통 ‘살아있는’ 백선장 관련기사로 채워졌다. 왜 이런 보도가 나왔는가. 과정을 추적해 본다.

10일 사고직후 한겨레신문 전주주재 기자가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이미 이때는 주민들 사이에 백선장이 살아 있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확산되고 있었다. 속속 타언론사 기자들이 도착하고 취재경쟁이 불붙었다. 소문을 확인하려는 경쟁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소문의 진원지인 식도로 건너가기에는 파도가 너무 높았고 배편마저 없었다. 당시 모든 배들이 구조작업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한겨레 기자는 용케 배를 구해 식도로 건너갔고 거기서 유진호선장 최문수씨와 선원들로부터 결정적(?)인 말을 들었다. 사고직후 백선장이 배를 타고 파장금항으로 들어오는 것을 똑똑히 봤다는 것이다. 최씨 등은 백선장이 침통한 표정으로 배고물에 서 있었으며 한손에는 평소 쓰고 다니던 빨간모자를 들고 있었다는 구체적인 묘사도 덧붙였다. 그리고 하루에 한번꼴로 백선장을 봐왔기 때문에 절대 잘못볼 리 없다고 누차 강조했다.

여기서 문제의 백선장 생존보도가 나왔다. 평소 백선장을 잘아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증언은 백선장이 살아있다는 소문과 맞물려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돼 버린 것이다. 그러나 실은 최씨가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었다.

최씨가 본 사람은 백선장이 아니라 놀랄만치 백선장과 닮은 위도지서장이었다. 위도지서장은 백선장과 얼굴생김새, 키, 몸집이 거의 비슷했고 공교롭게도 당일 백선장이 늘 입고다니던 감색점퍼를 입었고 모자마저도 백선장이 쓰고다니던 모자와 모양, 색깔이 같았다고 한다. 최씨는 지금도 “그때 본사람이 틀림없이 백선장이었는데…”를 되뇌이고 있다.

그래서 언론계에서는 이 오보를 이유있는 오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어떤 변명으로도 유가족과 국민들에게 안겨준 좌절과 실망을 회복시킬 수는 없다. 조금더 면밀하게 증언을 검토하고 사고상황을 짚어봤더라면 예단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오보는 언론의 고질적 병폐인 상업주의적 선정경쟁이 얼마나 많은 폐해를 가져오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병폐는 전혀 치유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오보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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