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는 애당초 개인 소유물이 아니었다. 일제의 탄압에 취약할 수 밖에 없는 기업 등을 운영하던 김성수가 동아일보의 경영권을 장악하게 됨에 따라 신문의 논조는 필연적으로 개량주의적인 논조를 보이게 된다. 또한 신문들의 기업적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점차 친일적 논조로까지 빠져들게 된다.

1924년 4월 요리집인 식도원. 친일단체 각파유지연맹 간부 박춘금은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와 송진우를 식도원에 유인, 권총으로 위협하면서 3천원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박춘금이 이들을 협박한 이유는 돈에 목적이 있었다기 보다는 4월2일자 사설 ‘관민야합…’ 내용에 대한 강한 불만의 표시였다. 이에 김과 송은 협박에 굴복, 3천원의 돈과 함께 협조를 약속했으니 이 사건이 바로 친일파에 의해 저질러진 식도원 테러사건이었다.

후에 박춘금이 “돈은 필요 없으니 그만두라”고 해 이 사건은 일단락 됐지만 한낱 깡패에게 언론사 경영진이 굴복한데다 친일파의 테러행위에 대해 동아일보측이 고소조차 하지않고 쉬쉬하자 다른 신문의 보도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된 국민들의 원성이 일었고 회사 내부에서도 사원들의 반발과 개혁요구가 빗발쳤다.

그러나 개혁요구가 좌절되자 다수의 기자들이 동아일보를 떠나는 사건까지 발생, 결국 동아일보는 사건의 수습을 위해 송진우를 물러나게 하고 이승훈을 사장에 앉히는 무마책을 쓰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김성수의 입지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달리 이 사건을 통해 김성수는 동아일보 운영의 주도권을 보다 확실히 장악하게 된다. 파문이 가라앉는 것과 동시에 이승훈을 고문으로 밀어내고 자신이 직접 사장에 취임, 송진우를 다시 불러들임으로써 완전히 경영권을 장악하기에 이른 것이다. ‘김성수의 동아일보’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뤄졌나를 보여주는 사례다. 그러나 동아일보가 처음부터 김성수의 단독출자로 운영돼 온 것은 아니다. 단지 김성수는 주식 공모를 위한 적극적 역할을 했고 창간 이후 점차 경영의 전권을 장악해 나갔던 것이다.

김성수계 자본은 대토지 지주경영과 고리대 사업을 통해 축적된 지주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 형성됐다. 이미 중앙학교와 경성방직을 운영하고 있던 김성수로서는 신문사업의 수익성에 대한 회의와 자금 부족으로 처음에는 신문발간사업에 참여하는 것을 다소 주저했다. 그러나 김성수는 신문발행이 기업의 운영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현실적인 판단에서 결국 주식회사 체제로 동아일보를 설립, 운영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동아일보는 1920년 2월 총자본금 1백만원의 주식회사 설립허가 신청서를 총독부에 제출, 주식모집을 시작했다. 그러나 1회 불입목표에 크게 모자라는 10만원여만 불입돼자 김성수가 보증을 서 모자라는 자금을 차입,가까스로 신문창간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초기의 경영 악화로 창간 2개월만에 불입금 10만원을 거의 까먹었다. 동아일보는 이렇듯 창간초기에 심각한 재정난을 겪다가 1921년 9월에 주식회사 창립총회가 열리고 1회 주금(株金) 17만 5천원이 4백12명의 주주들에 의해 불입돼, 일시적으로 재정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재정적 기반이 여전히 확고하지는 못했다.

그러다 동아일보는 1924년 사옥 신축을 결정하고, 2회 주금 17만 5천원의 불입을 추진했으나 다시 지지부진, 재정적 어려움을 겪다가 신축사옥이 완공된 1929년경에야 비로소 2회 주금 불입이 완료돼, 부채를 청산하고 안정적 운영을 할 수 있게 됐다.

2회 주금 미불입자가 있었던 상황에서 어떻게 17만 5천원이 불입됐고, 2회 주금 미불입자들의 주식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동아일보 사사>에도 2회불입금 납입완료 시기, 불입 주주의 명단 등이 나타나 있지 않다. 단지 미불입금이 7만원이나 돼 어려움이 있었는데 김성수가 양부에게 송금받은 2만 5천원으로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옥을 완공할 수 있었다고 기술돼 있을 뿐이다.

단지 착공 다음해인 1927년에 최후 최고(催告)를 내야 할 정도의 상황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뤄 최고 이후에도 2차 주금을 불입하지 않은 주주들의 주식은 실권주로 처리, 김성수계가 인수했을 가능성이 있다. 김성수의 경영권 장악에 의혹이 제기되는 부분이다. 이후 동아일보의 불입 자본금은 총 35만원이 됐고, 3, 4차의 주금 불입없이 1940년 폐간 때까지 이 자본금만으로 운영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동아일보는 다수의 주주들이 출자한 주식회사 체제였고 대부분의 주주들은 신문경영에는 관심없이 단지 민족운동에 대한 지원이라는 차원에서 자금을 내놓았다고 볼 수 있다. 김성수가 주식공모를 위해 커다란 역할을 했고 재정이 어려울 때 그의 보증으로 부채를 끌어왔다고는 해도 애당초 동아일보가 그의 개인적 소유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경성방직과 같은 기업을 운영, 일제의 탄압에 취약할 수 밖에 없었던 김성수가 신문운영을 주도하게 되면서 동아일보는 필연적으로 민족개량주의적인 논조를 보이게 된다. 실제로 1923년 총독부의 경성방직에 대한 지원금은 동아일보 순이익의 5배에 이르는 거금이었던 점으로 미뤄 동아일보의 논조가 개량주의로 흐를 소지는 충분했다. 박춘금 테러사건때의 침묵도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런 동아일보는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고 신문들의 기업적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점차 친일적인 논조까지 보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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