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언론노련과 일본 신문노련은 지난달 23일 서울에서 <해방 50년-한일 언론인 공동 심포지엄>을 개최, 한일간의 역사인식을 공유하고 양국관계의 재정립을 위한 언론의 역할을 모색했다. 이 심포지엄에 발제자로 참석했던 정구종 동아일보 출판국장(전 동경지사장)과 하라 토시오 전 교도통신 편집국장의 대담을 통해 한일관계의 바람직한 미래를 위한 언론의 역할을 들어보았다.


정구종=최근 한일관계는 대단히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양국간에는 갈등과 미해결의 과제가 남아있습니다. 이는 주로 역사인식과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하라 토시오=일본사회 전체가 한일 과거사에 대해 무지합니다. 언론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아시아에 대한 ‘가해자’ 의식은 지금도 여전히 미약합니다. ‘침략’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일본 국회의 부전결의는 국민운동적인 저항에 부딪혀 있습니다. 이런 뿌리깊은 국민감정을 뛰어넘어 가해자로서의 인식을 여론화하는 것은 일본 언론에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더우기 일본 언론의 역사인식 역시 한국 국민을 포함한 아시아인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게 현실입니다.

=한일관계에 대한 양국 언론의 보도는 국민감정을 자극하는 비판적인 보도가 중심을 이뤄왔습니다. 그 배경에는 앞에서 말한 역사인식의 차이가 가로놓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일 양국 언론은 두나라의 정치적 현안을 보도하면서 민족감정을 앞세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좋은 면보다는 어두운 면, 부정적인 면을 클로즈업 시킴으로써 상처를 주는 내용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한국은 과거 한일간의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되는 반일감정과, 한국의 경제성장에 따른 내셔널리즘이 배경이 됐고, 일본은 아시아에 대한 뿌리깊은 우월감이 이같은 보도의 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하라=80년 한일 편집세미나에서 일본 언론인중 한사람은 “양국민이 다 상대국에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언론인의 책임”이라고 자기비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상황은 그후로도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한일관계에 관한 한 일본 언론은 정부입장의 충실한 대변자였습니다. 국내문제에 대해서는 정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대외정책은 정부나 기업과 밀접하게 연계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국가주의 색채가 짙은 보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죠.

=동감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73년 8월의 김대중씨 납치사건에 관한 보도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건에 대해 일본언론은 납치범행이 한국 특수기관원들의 소행일 것으로 추정했고, 따라서 ‘일본의 주권침해’라고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한국언론은 이 사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이 ‘대한원조 중단론’을 들고 나오자 한국언론은 일본의 정치가와 언론의 한국비난에 맹렬히 반격했습니다.

이 사건에서 양국 언론이 반성할 점은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취재 노력보다는 서로의 정치적 태도를 비난하는 ‘정부대행’ 역할에 더 정력을 쏟았다는 점입니다. 일본언론은 정부 입장과 자국본위에 치우쳤고 한국언론은 박정권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과 반대로부터 국민의 눈을 돌리게 하는 당국의 반일 여론조작에 이용됐던 것이죠.

하라=진정한 국가이익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어떤 편집국장도 이 문제에 대해 명쾌한 논리를 갖고 있지는 못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정부입장이 곧 국익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론은 어떤 문제에 대해 국민의 판단의 기초가 되는 여러 재료를 공정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또 국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여과없이 전달해야 합니다. 정부의 입장은 이 다양한 견해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국익을 위해 국민에게 자유를 주지 않았던 사회주의는 결국 파산했습니다. 저는 국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무시하고 대표자 몇몇이 결정하는 구조가 사회주의 붕괴의 근본적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30년전 한일회담도 국민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몇몇 정치가들이 정략적 차원에서 결정했습니다. 정부와 정부간에는 타결됐지만 국민과 국민사이는 ‘억지로 된 타결’이기 때문에 갈등이 조금도 해소되지 않은 것입니다.

=20세기는 국가중심의 시대이자 이데올로기에 발이 묶였던 때로 전쟁과 쿠테타와 시민권의 탄압으로 얼룩진 불행한 시대였습니다. 이시기 한일 언론은 국가권력에 의해, 또는 편협한 민족주의에 의해 언론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동원’됐던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냉전체제의 와해와 함께 세계는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한일간에도 ‘시민의 시대’를 예고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시민의 시대는 편협한 국가이익보다 인류보편의 가치, 즉 시민의 논리가 우선하는 사회입니다.

한일 양국 언론도 국가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위치에서 인류보편의 공통적 가치 추구를 위해 보도활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민연대’라는 한일간의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데 언론이 앞장서야 합니다.

하라=언론인도 국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보도에도 국적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언론이 그 나라의 이익을 위해 보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진정한 국익이 무엇인가가 문제죠. 과거 시대에는 자기나라가 득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가 손해를 봐도 좋다는 ‘제로섬’의 국익론이 지배했고 한일관계의 경우 특히 심했습니다. 이런 편협한 국익론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제 지구는 한마을로 변하고 있습니다. 정보가 국경없이 왔다갔다 하고 있습니다. 국민국가 단위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일 언론인들이 국가단위의 시각에 얽매이는 것은 시대착오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최근 동향에 우려를 감출 수 없습니다. 확실히 세계는 국경없는 시대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새로운 울타리를 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 정부 각료의 잇따른 식민지 정당화 발언, 부전결의 실패등이 그것입니다. 이를 새로운 국가주의의 태동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하라=현재 일본 언론은 그 능력과 의욕을 시험받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은 두가지 시각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2차대전은 아시아를 독립시킨 전쟁이기 때문에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침략전쟁을 인정하고 사과하자고 생각하는 정치가나 국민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속에서 언론은 고민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미래가 아시아에 적지않은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일본 언론은 국가주의의 부활을 감시하고 경계하는 역할을 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일 신시대’의 주역은 정부가 아닌 시민이 될 것입니다. 한일 양국의 언론은 이 시민연대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창구가 돼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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