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 반대) 촛불집회를, 민주당이 편승하거나 들러리가 아니라, 주도하고 앞장서야 한다.”
민주당 정동영 최고위원은 25일 오후 열린 긴급 의원총회 모두발언에서 이렇게 말했다. 앞서 이날 아침 에는 민주당 내에 꾸려진 ‘날치기FTA무효화투쟁위원회(투쟁위, 위원장 정동영 최고위원)’가 첫 번째 회의를 갖고 “한미FTA 무효화 투쟁에서 민주당의 주도적 역할을 강화할 것을 결의”했다.
민주당은 이를 위해 여러 방안을 내놓았다. 시도당 위원장 연석회의를 긴급 소집해 수도권 지역에서 당원들의 촛불집회 참여를 독려하기로 결정했다. 서울·경기·인천 지역 110개 지역위원회를 네 그룹으로 나눠서 4일에 한 번씩 돌아가며 지역위원회 별로 집회에 참여하도록 조직하겠다는 계획이다. 또 매일 저녁 촛불집회에 참석하기로 결의한 의원들을 투쟁위의 부위원장으로 위촉하고, 민주당 의원들이 대열 맨 앞에 서서 경찰의 물대포와 맞서 시민들을 보호하겠다는 방침도 정했다.
민주당은 또 범국본과 1대1 규모로 투쟁기금을 납부하겠다고 밝혔다. ‘범국본이 4천만 원 내면 민주당도 4천만 원을 내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민주당이 범국본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을 부담해왔으며, 나머지 정당과 참여단체들이 각자의 몫을 분담했었다. 한미 FTA 저지 투쟁 과정에서 범국본이 이미 상당한 규모의 부채를 안고 있었던 터라, 민주당의 기금 증액은 상당한 힘이 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이 이처럼 촛불집회에 조직적으로 참가하겠다고 밝히고 나선 건 일단 환영할 만한 일이다. “진정한 국회는 의사당이 아니라 광장에 있다. 광장에서 민주당이 죽을 각오로 맞설 때 민주당의 활로가 살아난다”는 정동영 최고위원의 말도 옳다.
▲ ⓒ이치열 기자. | ||
그러나 민주당이 ‘죽을 각오로 맞서는 것’과 ‘주도적 역할을 강화하는 것’은 다른 문제일 수 있다.
가장 먼저, 한미 FTA 비준동의안 날치기 처리를 막지 못한 '주도적 책임'에서 민주당은 자유로울 수 없다. 본회의 다음날 아침(23일) 열린 규탄대회에서 민주당 의원들은 “국민들께 사죄드린다”면서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전 날 새벽까지 이어진 의원총회에서 민주당 의원들은 김진표 원내대표의 사의를 “효율적 투쟁을 위해” 반려했다. 김진표 원내대표는 범국본과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반(反) 한미 FTA 진영에서 오래 전부터 교체되어야 할 인물로 지적되어 온 인물이다. 그런데 그대로 가겠다는 것이다. 손학규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 중 책임을 지겠다고 나선 사람도 없다. 민주당의 반성과 사과가 큰 울림을 주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은 단독으로 투쟁위를 꾸렸다. “민주당이 촛불의 손님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투쟁하겠다”고도 했다. “행사의 주체와 사회자들을 민주당이 확보해 나간다는 입장을 확인”하기도 했다. 정동영 최고위원은 25일 아침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범국본이 주도하고 민주당이 참여하는 부차적인 주체가 아니라 (민주당이) 전면에 서서 주도적으로 이 투쟁을 내년 4월까지 이어간다는 점에서” 민주당의 참여를 독려했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이 “첫째 주도권은 돈이 말해주기 때문에 투쟁 기금의 절반을 민주당이 (내겠다)”는 것이었다. 자칫 민주당이 촛불집회를 ‘접수’하려 한다는 오해를 살 만한 대목이다.
지난 23일 열린 ‘야5당-범국본 대표자 연석회의’에서는 ‘(가칭) 한미FTA 날치기 국회비준 무효화와 MB 한나라당 심판 비상연석회의’라는 상설 기구를 야5당과 범국본이 공동으로 구성하자는 제안이 즉석에서 나온 바 있다. 당시 연석회의 구성이 합의됐던 것은 아니지만, 각 정당 및 단체별로 논의한 뒤에 빠른 시일 내에 구성 여부를 결정하자는 선에서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25일 범국본 관계자는 “공동으로 연석회의를 구성하는 것 까지는 좀 어렵겠다는 얘기가 (민주당에서) 있었다”고 전했다. 민주당은 촛불집회의 ‘주도권’을 잡고 가기 원했다는 뜻이다.
민주노동당 우위영 대변인은 “투쟁하는데 무슨 기득권이 있는 건 아니다”라며 일단 민주당의 결합을 반겼다. “어떻게 해서라도 한미 FTA를 폐기하고, (이를 위해 야권이)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해야 하지 않겠냐”고도 했다. 그러나 우 대변인은 “87석이나 있으면서 비준안 통과를 막지 못하고 (한나라당에게) 당했다는 것에 대한 사과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소수정당이나 다른 단체들은 (민주당이) 실질적으로는 별다른 역할도 하지 않으면서 생색을 내려고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는 현장의 목소리를 전하기도 했다.
▲ 10월 12일 국회 본청 앞에서 야당과 시민사회가 공동으로 결의대회를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민주노동당 | ||
이같은 우려는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 민주당은 올해 초 4·27 재보선을 앞두고 야권과 맺은 ‘전면적 검증 없는 한-EU FTA에 반대한다’는 정책연합 기조를 깨고 4·27 재보선 당일 한나라당과 비준을 전격 합의하는 ‘사고’를 쳤다.
9월1일에는 민주당 외교통상통일위원회 간사 김동철 의원이 한나라당과 한미 FTA 비준동의안의 외통위 상정에 합의함으로써 “국민들을 정면으로 배신하기 일보 직전까지 가 있다”(범국본)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10월에는 민주노동당 등과 함께 꾸린 ‘야당공동정책협의회’에서 합의한 사항들을 여야정협의체 논의 과정에서 누락하거나 관철시키지 못해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합의했다”(민주노동당 김선동 의원)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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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0일 밤에는 김진표 원내대표가 한나라당 황우여 원내대표와 ‘선 비준 후 3개월 뒤 ISD 재협의’를 내용으로 하는 ‘여야정 합의문’에 서명해 당내외 거센 비판에 직면한 일도 있었다. 게다가 결과적으로 한미 FTA 비준안 통과를 막지도 못한 ‘죄’까지 추가됐으니, ‘한미 FTA 저지 투쟁을 주도하겠다’는 민주당의 일성은 다소 뜬금없고 뒤늦은 감이 없지 않은 게 사실이다. ‘민주당이 한미 FTA 반대를 내년 총선과 대선을 위한 야권연대에 활용하려 한다’는 보수신문의 비난에 가까운 비판이 나름의 논리를 구성할 수 있었던 것도 민주당의 일관성 없는 대응이 빌미가 됐다는 지적이 많다.
당장 오늘(25일) 저녁부터 민주당 의원들은 촛불집회에 적극 참여하기로 했다. 이종걸, 최규성, 정범구, 안민석, 김재윤, 전병헌 의원 등은 매일 저녁 집회에 결합하는 투쟁위 부위원장단에 자원하기도 했다. 우위영 민주노동당 대변인은 “민주당 의원들이 발언만 하고 자리를 뜨지 말고 물대포도 맞아가며 대중들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한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민주당이 그동안의 ‘원죄’를 씻으려면, 정동영 최고위원의 말처럼 ‘죽을 각오’로 광장에 나서야 할 지 모른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집회의 ‘주도권’이 아니라, 먼저 ‘낮은 자세’가 민주당에게 필요한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