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언론의 대부분은 평상시에는 마치 우리 사회에 노동자란 존재도 없다는 듯이 무관심하다가 노동문제가 사건화되면 그때 비로소 벌떼같이 일어난다. 그것도 마치 사용자 또는 치안당국의 대변지나 되는 것처럼 정부의 탄압조치에 손발 맞춰 경제논리나 치안논리로 무장하고 노동운동을 몰아 세워 왔다.

우리 언론에서 국가 노동정책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하거나 비판을 하는 경우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노사분쟁 단계에서는 근로자의 권리보장에 대해선 거의 무관심하고 규제의 불가피성만을 강조한다. 또 치안정책 차원에서 정부와 언론이 온통 한통속이 돼 난리들이다. 특히 대기업이나 공공분야의 노동분쟁에 대해서는 금방 나라가 절단나기라도 할 듯이 소란을 떤다.

이런 상황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절제와 인내의 경험을 축적, 좀더 성숙된 노동운동으로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으며, 길게는 국가안보 차원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갑자기 대통령이 “국가전복 저의”라고 까지 규정한 한국통신노사분쟁이나 아직도 조합활동으로 인한 해고와 분신이 일어날 정도의 현대자동차사건의 경우 많은 사람들은 매일 신문을 읽는데도 그런 ‘무시무시한 사건’과 불행한 사건의 쟁점이 무엇인지, 왜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고 한다.

“가담자 중징계방침” “공권력투입 불사”만 알 수 있을 뿐 분쟁해소를 위해 노·사·정은 무엇을 했으며 국가권력은 노사분쟁에 자의적으로 개입하고 쉽게 형벌권발동을 일삼아도 되는가 등에 대해 제대
로 알려주는 매스컴은 (특정신문 하나를 제외하고는) 만날 수가 없다.

한국통신과 같은 공익사업노조에서 파업이 일어날 경우 반드시 경찰력에 의존해 진압할 대상인지, 또 경찰력 개입이 법치행정에 맞는 것인지 정확히 논의하고 비판한 보도를 만날 수 없다면 그것은 군사파쇼정권하에서의 언론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심지어 노사자치적 해결을 도모하려는 의지를 나타낸 비교적 유연한 관점의 노동부장관을 마치 불온세력에 영합하거나 인기를 위해 장난이라도 하는 것으로 취급한 언론도 있지 않았는가.

우리 언론은 노동문제에 관한한 여전히 권력과 자본의 입장을 비호하고 있다. 경제적 민주주의는 정치적 민주주의와 더불어 건국이래 국가의 기본방향으로 정해져 있지만 이를 현실화하는 기본적 인권인 사회권의 보장과 실현은 암담하게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그 동안 우리나라는 국제사회로부터 노동탄압국으로 규정되고 말았다. 1993년 3월이래 ILO ‘결사의 자유위원회’와 유엔 ‘사회권위원회’로부터 수차에 걸쳐 노동악법 개정과 노동운동탄압 중지 권고를 받았으나 ‘세계화’를 지향하는 이 시점에서도 정부와 언론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 시민들은 이 중요한 사안의 존재나 의미내용을 일반 매스컴을 통해서는 알 수가 없는 정도다.

자본주의 경제사회의 필연적 산물인 노사문제의 합리적 조정기술이 쟁의권 보장이 아닌가. 아무리 골치아픈 노사문제도 이 사회가 만들어 낸 것이다. 노사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과정인 조합활동은 당장은 다소 귀찮을지 모르지만 사회의 건강한 체질을 만들어 주는 필요하고도 소중한 것이다.
언론은 이 점을 언제나 분명한 전제로 삼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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