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국민도, 분열된 민주진보 진영이 우리 사회를 올바른 길로, 99% 국민을 위한 새로운 정치, 그리고 99%의 국민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대통합은 시대정신이며, 국민의 명령입니다. 대한민국의 분열과 그 극복을 말하면서, 우리가 먼저 갈라져 있을 수 없습니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와 최고위원들이 지난 3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민주·진보 세력 대통합’에 대한 큰 그림을 밝혔다. 민주당 지도부가 범야권 정계개편의 구체적인 실행계획과 일정까지 밝혔다는 점이 주목할 대목이다.

민주당 지도부는 “민주진보 진영의 모든 정당과 정치세력의 대통합을 논의하기 위한 민주진보 진영의 제 정당, 정파 대표자 회의를 열 것을 제안한다”면서 “오는 11월말까지 민주진보통합정당추진기구의 구성을 완료하고, 12월말까지는 통합을 완료해서 민주진보통합정당을 결성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민주당 지도부는 “민주진보 진영의 각 정당, 민주진보의 가치를 따르는 각 정파 및 정치세력노동세력과 시민사회 세력 및 모든 민주진보 진영의 인사 분들께 새로운 민주진보 통합신당에의 참여를 제안한다. 저희 민주당 먼저 문을 활짝 열겠다. 헌신의 자세로, 사즉생의 각오로 통합에 임할 것을 약속한다. 저희 스스로보다 우리 모두를 위해 헌신할 것을 약속드린다”고 밝혔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 박원순 서울시장, 문재인 '혁신과통합' 상임대표.(사진 왼쪽부터)
@CBS노컷뉴스
 
민주당 지도부는 민주당에 일부 인사들이 합류하는 형식이 아니라 민주·진보 진영의 각 단위와 세력이 ‘하나의 정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세부적인 내용과 방향을 다를 수 있지만 문성근씨가 ‘100만 민란’을 통해 주장했던 것과 맥을 같이하는 내용이다.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상임대표로 있는 ‘혁신과 통합’도 민주당의 이번 발표에 환영 입장을 밝혔다. 혁신과 통합은 지난 3일 “민주당이 오늘(3일) ‘민주진보통합정당’ 건설에 앞장서겠다며 밝힌 제안에 대해 적극 환영한다. 혁신과통합은 민주당과 함께 국민이 바라는 통합정당을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협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혁신과 통합은 “이제 진보진영 정당들도 더 큰 하나가 되는 통합의 요구에 화답할 차례다. 작은 차이를 넘어 시민들의 시대적 요구인 대통합에 함께 하길 촉구한다”고 밝혔다.

손학규 대표가 이끄는 민주당과 문재인 이사장이 상임대표로 있는 혁신과 통합이 민주·진보세력 대통합의 물꼬를 튼 셈이다. 범야권은 어떤 형태로든 정계개편을 하게 될 것이란 전망이 중론이었다. 시간도 많지 않다.

이제 5개월 후면 총선이 있다. 총선 공천 등의 일정을 고려할 때 올해 안에 가시적인 결과물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다. 민주·진보 대통합의 위력은 10·26 재보선에서도 증명됐다. 범야권 단일후보인 박원순 후보는 민주당은 물론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진보정당과 진보성향의 정치권 밖 인사, 시민사회까지 모두 힘을 모아 지원했고, 결국 당선됐다. 한나라당이 서울시장 선거에서 야당 후보에게 패한 것은 1998년 제2회 지방선거 이후 13년 만이다.

10·26 재보선은 범야권에 큰 숙제도 안겼다. 서울시장 선거에 가려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범야권이 실질적인 연대를 하지 않은 곳은 한나라당의 벽을 넘지 못했다. 강원도 인제군수 선거가 대표적이다.

민주당 최상기 후보는 6486표를 얻었지만, 6558표를 얻은 한나라당 후보에게 72표 차이로 패했다. 단 100표도 차이나지 않는 초박빙 승부였다. 민주노동당 박승흡 후보는 1671표, 득표율 11.0%를 얻었다. 민주당-민주노동당 단일화가 이뤄졌다면 인제군수의 승자는 한나라당 후보가 아닌 야권 단일후보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

인제군수 선거의 교훈은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모두에게 과제를 안겨줬다. 민주당은 기득권을 고집하면서 야권연대의 과실을 독점하는 모습을 보이면 선거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보여줬다. 민주노동당은 야권이 분열하는 상황에서 스스로 당선은 어렵지만 민주당 후보를 떨어뜨릴 능력은 충분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보여줬다.

인제군수 선거는 내년 4월 총선의 예고편일 수 있다. 야권이 공천 다툼 속에 갈라져서 선거에 임할 경우 고전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현재 수도권 여론은 한나라당의 참패 가능성을 높여주지만 야권이 분열만 한다면 승자는 거꾸로 한나라당이 될 가능성도 있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와 문재인 혁신과통합 상임대표가 민주·진보 대통합의 공감대를 형성했지만, 넘어야 할 산도 만만치 않다. 통합의 유력한 대상인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그리고 국민참여당의 경우 ‘민주·진보 대통합’에 부정적이다.

범야권 연대를 선호하는 상황이다. 이는 통합에 나설 경우 진보정치의 선명성이 흐려질 수 있다는 부담도 있고, 통합하지 않고 야권 연대만 하더라도 내년 총선에서 진보정당의 승리 가능성이 크다는 현실적 판단도 반영한 결과이다.

민주당 지도부와 문재인 이해찬 등 정당 밖 인사들은 통합정당에 공을 들여왔지만, 진보정당 쪽에서는 이를 경계해왔다. 진보정당의 이름으로 ‘하나의 정당’에 동참할 가능성은 낮지만, 진보정치인들의 통합정당 합류 가능성은 열려 있다.

진보신당 부대표를 지낸 박용진 ‘혁신과 통합’ 상임운영위원이 대표적이다. 그는 서울시장 선거와 관련해 “민주당 없이는 안되지만, 민주당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국민들이 보내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야권세력이 하나로 뭉쳐 대안세력을 만들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나의 정당으로 합치는 문제는 여러 가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부정적인 입장이다. 우위영 민주노동당 대변인은 “민주당 중심의 무리하고 일방적인 통합제안에 응하기 힘들다. 지금은 힘 있는 진보정당이 절실히 필요한 때”라고 주장했다.

김종철 진보신당 대변인도 “각 당의 노선차이를 무시한 무리한 통합으로 불필요한 갈등을 발생시키기보다는 각 당이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면서 야권연대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지금 시기에 적절하다고 할 것”이라고 밝혔다.

손학규 대표와 문재인 대표가 진보정당의 동의를 구해서 민주·진보 통합 정당 건설에 성공할 것인지는 지켜볼 대목이다.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손학규 대표는 당 내부의 반발 흐름도 고민이다.

손학규 대표가 최고위원들과 함께 내놓은 제안은 민주당의 기존 기득권을 사실상 버려야 한다는 이야기와 같다. 내년 총선을 준비하는 민주당 후보자들은 야권통합의 대의에 공감하면서도 자신의 공천에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을 걱정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대로만 가면 내년 총선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당선될 가능성이 큰데, 새로운 통합 정당이 생길 경우 자신의 공천 여부가 원점에서 검토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내부의 불안과 반발을 잠재우면서 대통합의 길을 열어가는 것은 손학규 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지도부의 ‘정치력’에 달렸다.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는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의 행보이다.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야권이 분열하면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처럼 야권의 힘이 하나로 모아져 한나라당과 경쟁을 하게 될 경우 수도권은 ‘참패’를 당할 것이란 위기감이 팽배한 상황이다.

야권이 분열만 한다면 한나라당은 반전의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흥미로운 대목은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야권 통합에 대한 내부 반발과 분열의 목소리를 부각시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당은 대통합 과정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기득권을 포기하라는 요구에 대해 당사자들이 순순히 받아들일 것인지도 의문이다. 오히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조용히 대통합이 이뤄지는 것이 이상할 수 있다.

일부 언론은 그 과정에서 갈등의 골을 자극하는 보도태도를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 범야권 대통합 과정 못지않게 관심있게 지켜봐야할 지점은 그것을 전하는 언론의 시각이다. 거기에 2012 선거 국면에 대한 언론의 속내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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