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나 좀 인터뷰 해주시오.”

재작년 이맘 때 쯤 종로의 한 식당에서 박영석이 던진 말이었다. 몇몇이 모인 저녁 자리에서 그는 술이 불콰해져 있었고, 결국 그 말을 하기 위해서 나를 불러냈던 모양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박영석을 독대하기에 조금은 불편한 점이 없지 않았다. 그때까지 써온 기사들 때문이다. 그가 2006년 에베레스트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횡단하고는 ‘단일팀 최초’라고 발표했을 때 나는 그것이 이미 1993년 허영호가 단독으로 했던 일이라고 썼고, 또 당시 로이터 네팔통신원 엘리자베스 홀리가 박영석을 두고 ‘뉴질랜드 여권을 가지고 있는 한국사람’이라고 발표한 것을 실어 그의 국적에 대한 논란이 일게 했던 터였다.

물론 박영석의 국적은 한국이었다. 그는 당시 자신의 여권을 보여주며 가족은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지만 자신은 시민권을 포기했다며 “나 또한 아이들이 보고 싶은 기러기 아빠일 뿐”이라고 말했었다. 에베레스트 단일팀 최초 횡단에 대해서도 “허영호의 기록은 인정하지만 당시 해당국의 허가 없이 등반한 것과 많은 비용과 수고를 들여 이번에 성공한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며 “매스컴이 ‘최초’를 좋아하니 어쩔 수 없이 생긴 일”이라고 털어놨었다.

   
고 박영석 대장.
@연합뉴스
 
그 일이 있은 지 2년쯤 지난 재작년, 그가 나에게 다시 인터뷰 요청을 한 것은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신루트를 개척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2009년 신동민 강기석과 거길 올랐던 그는, 2008년 아끼던 후배 두 사람을 잃고 와신상담 끝에 오른 세계 최고봉의 코리언 루트라는 데에 매우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당시에도 매스컴에는 ‘한국 최초 8000m급 신루트 등정’이라는 표현이 나와 산악계에서 논란이 됐었다.

난 당시 ‘2002년 도로공사팀의 시샤팡마 신루트에 이은 한국 두 번째’라고 기사를 썼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매스컴들의 이런 엇갈리는 표현에 대해 매우 답답해하며, 그로부터 며칠 뒤 북한산에서 나를 만났다. 박영석은 다시 인터뷰에서 “내 실수다. 모르고 그렇게(최초라고) 말했다”라고 밝혔다. 박영석도 억울하고, 나 또한 억울하게도 우린 이상한 악연으로만 만나게 된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산악인들에 대한 평가는 포폄이 극명하다. 매체를 통해 대중에 전달되는 산악인의 모습은 으레 따라붙는 ‘대장’이라는 호칭에 담긴 것처럼 모험과 도전, 리더십 뿐 아니라 ‘최초’의 대명사로 받아들여져 온 반면, 일각에서는 그런 것들보다도 더 무성한 뒷이야기들이 쏟아지곤 한다. 그건 박영석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평소 사람들 앞에 나서길 극도로 싫어하던 그임에도 이런 언론의 곡필과 베껴 쓰기에 상처를 입고도 피하려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쳤던 건, 또한 그만이 지닌 다른 모습이었다.
 

   
이영준 월간 마운틴 기자
 
“진부한 14좌와 족쇄 같던 산악그랜드슬램을 끝냈으니 이제 내 등반을 할 것”이라는 박영석을 만나고 산을 내려오며 난, 그가 진심으로 산을 좋아하며 그의 이런 모습이 곧 ‘박영석의 알몸’이라고 생각했다. 

‘박영석 대장’은 나에게 1차 안나푸르나 남벽 원정을 같이 가자고 제안했었다. 당신이 같이 가서 멋진 등반을 하고 제대로 써보라는 것이었다. 박 대장과 신동민, 강기석 우리 넷은 그해 설날 연휴 북한산에 올라 밤새 산 이야기를 떠들어대곤 다음날 눈 쌓인 인수봉을 올랐다.

그리고 우린 산에서 내려와 함께 목욕탕에 갔다. 어쩌면 난 최초로 대장 박영석과 때를 민 기자였을 수도 있지만 아무도 알몸의 대장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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