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적 황색 저널리즘 현상은 일제하 신문들의 존재의의를 되묻게 만들었다. 즉, 민족적 현실을 외면한 채 ‘매족적 행위’라는 비난까지 받으며 이윤추구에만 집착했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1930년대의 모습은 두 신문이 단순히 하나의 기업이었다는 이상의 존재의의를 찾기 어렵게 만든다.

1934년 동아일보는 일본의 제약, 제과, 화장품 회사의 간부 20여명을 초청, 기생관광을 시켜준 일이 있었다. 바로 한해전에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후 신문시장 장악을 위해 적극적인 공세를 펴오자 위기를 느낀 동아일보가 기생관광이라는 망국적 방법까지 동원하면서 수성(守城)에 나선 것이다. 이후 조선일보가 동아일보의 대응에 맞서 같이 기생관광을 들고 나왔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광고유치를 둘러싼 추태에 대해 문인 김동인은, 민간지들이 이윤추구를 위해서는 ‘매족적(賣族的) 행위’까지 일삼고 있다고 비판했고, 다른 비평자는 두 신문이 “조선민중이 걸어가는 길과는 다른 방향으로만 달음질”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처럼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문들은 민족적 기대를 완전히 저버린 채 기업 이윤추구에만 집착, 치열한 경쟁을 전개했다. 이에 따라 이제 ‘말세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비난까지 나왔다. 이같은 극심한 경쟁은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 운영하게 되면서 민간지 시장의 양대 매체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판매부수 경쟁과 동경과 대판의 광고 제패전” 형태를 띠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두 신문의 경쟁은 먼저 조선일보를 인수한 방응모가 ‘인재쟁탈전’을 시작함으로써 불붙게 됐다. 방응모는 조선일보 인수 직후 동아일보에 재직중이던 이광수, 서춘, 함상훈 등 다수의 언론인들을 빼갔는데, 이로인해 한 동안 정상적인 신문제작이 어려울 정도의 상황에 놓이자 동아일보의 송진우는 매우 분개했다고 한다.

두 신문의 각축은 판매망 장악을 위한 치열한 싸움으로 이어졌는데 조선일보는 판매망 구축과정에서 동아일보의 기존 판매망을 파고 들어와 이들 신문간의 갈등은 첨예화되었다. 이후 두 신문은 무리한 증면경쟁과 함께 판매부수확장을 위해 행운권까지 발행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이같은 과도한 경쟁의 양상은 앞서 언급한대로 일본광고유치를 위한 두 신문의 적극적인 노력에서도 잘 드러난다.

높은 문맹률과 경제적 빈곤으로 신문판매부수를 늘리기가 매우 어려웠고 국내광고도 거의 없던 상황에서, 기업적 이윤추구에 집착하던 두 신문은 일본광고유치에 주력하게 됐다. 이에 대해 한 비평자는, “한 손에 조선민족을 들고 한 손에 동경, 대판의 상품을 들고 나가는 것이 동아일보, 아니 조선의 제 신문이다…신문지의 판매를 위하여는 조선민족을 팔아야겠고 광고의 수입을 위하여는 동경, 대판 등지의 상품을 팔아야 하는 것이 조선 신문계의 딜레마다”라고 비판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경쟁에서 비롯된 이러한 추태는 단순히 광고유치 경쟁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1935년 6월에는 결국 상호비방의 공개적인 격돌단계로까지 나아갔다. 조선일보가 김성수가 교장으로 있던 보성전문학교 추가입학생 문제에 대해 지면을 통해 ‘가증할 일’이라며 혹독히 비난하자 동아일보도 역시 지면을 통해 방응모가 추진하던 조림사업이 그 지역 주민들의 권리를 짓밟는 ‘이권운동’에 불과하다며 비난을 퍼부으면서 격렬한 지상 비방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에 김동환은 일본광고유치와 판매부수증대를 위한 경쟁이 결국 “조선일보는 보전(普專:고려대학교의 전신)과 중앙학교의 사회적 문제를, 동아는 방사장의 개인적 문제를 재료삼아 싸우는 지경까지 갔다”고 비판했다. .

두 신문은 또 조선의 경우 평안도, 동아의 경우 호남 등 특정 지역 인물들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고용하여, 지방색을 조장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 별차이가 없을 정도의 친일논조를 보이던 민간지들은 정도를 넘어선 기업경쟁을 거치면서 점차 신문의 선정성을 더해갔다. 1930년대 중반을 넘어서서는 선정적인 보도와 흥미위주의 대중적 문예물들이 지면의 상당 부분을 채울 정도가 됐다.

한 비평자는 “통속작가들이 비속한 취미와 흥미중심의 스토리를 제공, 신문경영자의 판매정책에 부응하고 독자들은 이것들을 통해 불의의 행복을 마음껏 즐기게 된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식민지적 황색 저널리즘 현상은 일제하 신문들의 존재의의를 되묻게 만드는 것이다.
즉, 민족적 현실을 외면한 채 ‘매족적 행위’라는 비난까지 받으며 이윤추구에만 집착했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1930년대의 모습은 두 신문이 단순히 하나의 기업이었다는 이상의 존재의의를 찾기 어렵게 만든다.

특히 일본광고유치를 위해 반민족적, 나아가 비윤리적인 행태까지 보인 것은 언론기업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윤리의식마저 저버린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나아가 지방색을 심화시키고 인신공격 등 상호비방을 일삼던 일제하 두 신문의 경쟁은 마치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신문들의 ‘무한 경쟁’의 뿌리를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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