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은 인권센터 건립 후원을 위해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가 페이스북에 올린 ‘천리길 일기’를 연재합니다. 인권센터는 최저 생계비도 받지 못하고 활동하는 인권단체들을 위해 최소한의 활동 공간을 지원하자는 취지에서 건립되는 국내 최초의 종합인권상담소로서, 박 이사는 오는 12월 준공을 목표로 10억 원의 후원금을 모금하고 있습니다. ‘천리길 일기’는 그가 9일부터 23일까지 전국을 돌면서 현장의 인권 실태를 기록한 것입니다.

6. 10월 14일 원폭지해자협회 합천지부, 대구 교도소, 에이즈예방협회, 반빈곤포럼

아침을 거창 귀농학교에서 먹고 차까지 얻어 마시고, 한대수 씨와 헤어졌다. 구불구불 산을 넘어 돌아 다시 합천으로 차를 달렸다. 합천 사회복지관 3층에 자리를 잡은 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의 사무실에 들어선 것은 오전 11시. 할머니 두 분이 건강검진을 받아야 하는지 심진태 지부장을 잡고 이것저것 묻고, 심 지부장은 부지런히 방법을 설명하는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그동안에 벽면에 걸린 원폭 피해 사진들을 둘러봤다. 매년 8월 광복절 특집 때 보이곤 하던 히로시마, 나가사키 핵폭발의 끔찍한 장면들이 스무 장 남짓 걸려 있다. 색 바랜 흑백사진들이 전해주는 핵폭발의 상황, 그리고 죽거나 살았어도 새까맣게 탄 몸뚱이의 사람들. 심진태 지부장은 그때 히로시마에서 겨우 3살배기 아이였다. 해방 뒤 부모님의 고향인 합천으로 돌아왔고, 9살 때 전쟁을 맞았다. 어릴 적에 ‘원폭’이란 말은 수없이 많이 듣고 살았다는데, 시장에 나가면 유난히 피부가 번쩍번쩍 빛이 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단다. 피폭자들이었다.

경남과 부산 지역에 피폭자가 많이 있는 이유는 이곳이 직접 일본에 닿는 뱃길이었기 때문이었고, 이곳에서 일본에 강제징용에 끌려간 이들이 히로시마에 많이 배치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찍 아버님을 여의시고, 공부도 뒷전에 오직 살기만을 위해 농사를 지어야 했던 심씨는 50세가 넘어서 원폭 피해자 일을 하게 됐다고 한다. 20년 넘게 이 일을 하다 보니 어느 누구보다도 전문가가 되었나 보다 싶을 정도로 내공을 느끼게 하는 분이었다.

   
▲ 합천 원폭피해자사회복지회관 위령각 모습. 박래군은 "일본 정부도, 미국 정부도, 한국 정부도 외면했던 이들의 고통. 피폭자 실태조사 하지 않는 한국정부, 그리고 무관심하기만 한 우리 사회. 이 위령각조차도 일본인이 만들었단다"라고 밝혔다. ⓒ박래군
 
박규복이란 이는 피폭 때 오르라든 오른팔을 펴지도 못하고 왼손으로 농사일을 해야 했다고 한다. 그는 평생 장딴지에서 고름을 짜내야 했고, 원인이 모르게 생겨나는 물렁뼈를 빼내야 했다고 한다. 화상을 입은 이들은 토란이나 감자를 찧어서 상처에 바르고는 했지만, 그 상처 치료가 안 되어 구더기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도 목격했다고 했다. 피폭을 당한 이들에 대해 일본 정부도, 한국 정부도 무관심했던 시절, 그들은 알아서 원인 모를 병에 시달리다가 죽어갔다. 재수가 없어서, 운이 없어서, 팔자가 사나워서 그런 일을 당했다고 자책하며 죽어갔던 이들의 삶에 대해 우리 사회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원폭피해 자료실조차 없다니

심씨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것은 2차 원폭실험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패망이 확실시되던 일본에게 굳이 원폭을 투하할 필요가 없었다. 시간대를 달리하여 햇빛에 반응하는 원폭의 위력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인데 그 말을 현재로는 입증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그는 역사 교과서에 미국의 원폭 투하로 일본이 패망했다고 하는 기술에 대해 그게 말이 되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일본 정부만이 아니라 미국 정부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지만 지금껏 피폭자의 실태 조사조차 하지 않고, 피폭자 지원법을 제정하지도 한국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피폭자들이 죽어 가는데, 기록조차 남기지 않으면 나중에 일본과 미국 정부에 책임을 어떻게 물을 거냐!”

그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위자료 청구 소송을 진행하여 합천지부의 피폭자 596명이 승소를 하도록 했다고 했다. 애초에 일본 정부는 통달 402호라는 정부 지침서를 통해서 일본인 피폭자에 대해서만 원호를 해왔는데 일본 정부와 소송을 통해서 바꾸어냈다. 한국 피폭자에 대한 차별이라는 문제의식이 결실을 거두는 데는 무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런 그는 피폭자 2세의 문제에 대해서도 남다른 관심을 나타냈다. 고 김형률을 만난 게 2003년이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픽 쓰러질 것만 같은 몸으로 원폭 2세 문제를 알리러 다닐 때 원폭 1세들로부터도 외면을 당했던 그를 심씨는 지원했다. 유아 사망률, 태아 유산율이 다른 이들의 몇 십 배나 많다는 한 조사 결과를 보고서야 심 씨도 첫 아이가 먹기는 무척 잘 먹는데 날이 갈수록 비쩍 마르기만 하다가 결국 돌 무렵에 죽었던 게 그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단다.

그렇기 때문에 2세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고민하던 차에 김형률을 만났고, 그 뒤 원폭피해자 2세들의 환우회가 구성됐지만, 고 김형률 씨는 그만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나도 김형률을 보았다. 2003년 명동성당에서 단식농성을 할 때 찾아온 마치 영화 이티의 주인공처럼 생긴 그는 이미 폐의 70%가 죽어서 숨쉬기도 힘들어하는 처지였다. 그런 몸으로 과로를 했던 것이 죽음을 재촉하는 일이 됐을 것이다. 그의 부친 김봉대 씨가 아들의 뒤를 이어 원폭 2세의 일을 돕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요원하다.

   
ⓒ박래군
 
‘원폭피해자사회복지회관’은 일본 정부의 돈을 받아서 지었다고 하지만, 그곳에는 지금은 110명의 원폭피해자들이 생활하는 시설이지 그곳에조차 원폭피해 자료실도 없다. 일본인이 지었다는 위령각에서 향불을 피우고 눈을 감았다. 그 현장에 끌려가 고된 노동에 내몰렸던 이들, 그러다가 피폭을 당하고도 어디고 항변조차 못해본 이들, 그들의 이름 석자들이 빼곡이 들어선 그 위령각 앞으로 원폭피해자지원법을 외면하는 국회의원들을 비롯한 위정자들을 세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이 국민의 인권, 고통을 외면해온 그 역사가 고스란히 초라한 위령각 앞에서, 그리고 원폭 피해자의 자료실마저 없는 현실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원폭 2세 환우회가 운영하는 합천 평화의 집은 금요일에는 열지 않는다고 해서 가보지 못했지만, 거기 1000명이 등록돼 있다고 하는데, 2세들은 자신들의 희귀한 병이 원폭의 유전에 의한 것임을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상황을 맞고 있을 것이다. 그들만이 아니라 다시 그 2세로 대물림하여 나타날 원폭피해에 대해 우리 사회가 너무 무관심한 것이다.

다행히 심진태 씨의 말마따나 원폭 1세대 500명에 대한 국가인권위 조사와 시민단체들의 피폭자들에 대한 구술 증언이 조금은 이루어졌지만, 전면적인 실태조사조차 진행되지 못하는 이런 현실이 계속돼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참으로 답답하기만 하다.

웃음을 잃지 않는 이들

대구로 들어와 대구교도소로 천주석 씨를 면회했다. 천 씨는 상도4동 철거민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용산참사 때 연대를 나갔다가 참사를 만났다. 1심에서 4년형을 받고 법정 구속된 천씨는 지난해 서울구치소에서 수감 중에 만나기도 했던 이다. 그는 얼굴이 매우 건강해보였고, 활달했다. 힘 드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하지만, 그는 용산참사 때 다친 복숭아 뼈가 아픈 것을 참고 살고 있는 중이다. 이걸 치료하려다가 잘못돼 교도소 측을 상대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내놓은 상태지만 자꾸 지연되는 상황이다.

“이제 세상을 알기 위해서 책도 좀 보고, 공부도 하고 있어요. 세상이 이런 줄 전혀 몰랐는데, 나가서 싸우려면 공부가 꼭 필요하겠더라고.” 무슨 책을 보내고 했던 노동, 사회 쪽 책을 주로 본다고 하는데, 10여 분의 시간은 참 짧다. 접견물도 변변찮아서 영치금을 조금 넣어주고 우리는 그를 거기 교도소에 두고 떠났다. 이런 짧은 면회가 무슨 소용일까 생각도 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얼굴이라도 보고 가야지, 안 그러면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

대구 교도소와는 정반대의 곳인 대구시 동구 신서동에 위치한 에이즈예방협회 대구경북지회. 우리 사회에서 에이즈를 얘기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에이즈는 마치 감기와 같아서 약을 먹으면 낳는 병임에도 한센병이 전염된다고 믿는 것처럼 HIV 감염인들은 곳곳에서 사회적 차별을 받는다. 심지어 쉼터에서 죽은 이를 옮겨야 하는 119구조대조차도 시신에 손을 대지 않으려 했고, 가족들도 시신포기각서를 쓰고는 장례를 치르지 않아서 이곳 지회 사람들이 지내줘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그나마 알량하게 지원되던 것도 뭉텅이로 잘라내서 겨우겨우 운영하는 그들은, 그런데도 밝았다. 김지영 사무국장, 차명희 상담팀장 등 4명의 활동가들은 세상의 강고한 차별의 벽 앞에 절망하는 감염인들을 위해 불철주야 뛰는 인권투사들이었다. 잠시 들른 우리 일행에게 무언가를 자꾸 챙겨주고 싶어 하는 그들의 마음이 너무 안쓰러웠다.

저녁에 반빈곤포럼이 열리는 광개토 병원에 들렀다가 대구 지역의 활동가들과 만났다.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사무소에 들어가 있는 김명식, 한국인권행동의 이주영, 인권운동연대의 서창호 등과 어울러 가진 술자리와 그리고 후배 집에서 이어졌던 뒤풀이까지, 오늘 하루도 많이도 돌아다녔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세상이 무관심해도 자신의 일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며 일하는 활동가들이 있어 우리 사회의 인권이 이만큼이라도 나아지고 있는 것이리라. 그들은 우리 사회의 희망을 일구는 주인공들이다. 특히나 에이즈예방협회의 활동가들은 활동비도 두 달이나 밀렸으면서도 웃을 잃지 않고,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 그런 이들을 만나는 것은 행복이다. 나의 천릿길이 우울하지만 않은 것은 순전히 이들 덕분이다. 사회의 음지에서 뛰는 인권활동가들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인권센터후원 홈페이지 http://hrfund.or.kr/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①] 10월 9일 제주도 강정마을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011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②] 10월 10일 제주 4.3평화공원, 강정마을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013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③] 10월 11일 광주 망월동, 인화학교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024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④] 10월 12일, 소록도 전북고속 천막농성장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025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지-경남 산청 합동 묘역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029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