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은 인권센터 건립 후원을 위해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가 페이스북에 올린 ‘천리길 일기’를 연재합니다. 인권센터는 최저 생계비도 받지 못하고 활동하는 인권단체들을 위해 최소한의 활동 공간을 지원하자는 취지에서 건립되는 국내 최초의 종합인권상담소로서, 박 이사는 오는 12월 준공을 목표로 10억 원의 후원금을 모금하고 있습니다. ‘천리길 일기’는 그가 9일부터 23일까지 전국을 돌면서 현장의 인권 실태를 기록한 것입니다.

3. 10월11일 광주 망월동, 인화학교

제주를 떠나며

이틀 밤을 묵었던 제주 강정마을을 떠났다. 아침 6시에 기상한 것은 좋았는데, 이선일이 사고를 쳤다. 승합차 키를 어디에 두었는지를 몰라서 한참 헤매게 한 것이다. 그의 짐과 침낭과 옷을 다 뒤져도 안 나온다. 제주항까지 7시 반까지 도착해야 차를 승선할 수 있다고 했는데, 20여 분 소동을 피운 끝에 내가 키를 찾았다. 그 녀석의 잠바 오른쪽 주머니에서다.

아침 미사를 나가는 천주교 신부님들과 주민들을 뒤로 하고 스타렉스 승합차는 달렸다. 키를 찾느라 까먹은 시간을 벌충하느라 과속, 과속. 카레이서도 해봤다는 이선일이 맡았다. 그런데 문제는 네비에 제주항이 안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주항만노동조합을 겨우 찾아서 그리로 가는데 제주항과는 거리가 먼 애월읍의 한 해변가로 안내한다. ‘네비가 미쳤다’, ‘부숴버리고 싶다’ 등등 온갖 욕설을 네비에다 화풀이로 했지만, 여차하면 배도 못 타고, 제주에 잡혀 있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니 제주항은 앞으로 한 시간은 더 가야 한다고 뻥 친다.

큰 일 났다. 이미 예정된 7시 반은 훌쩍 지났는데, 여기저기 물어서 제주항을 어찌어찌 알아내서 달려 제주항에 도착하니 8시 10분, 차 먼저 선적하고, 회사에서 내준 봉고차를 타고 겨우 승선 절차를 후딱 밟아 마지막으로 승선, 후유….나중에 안 일이지만, 네비의 설정이 전국으로 되어 있지 않고, 제주 강정마을로 되어 있어서 그랬단다. 으이그 멍청한 우리들이라니. 괜히 네비 욕만 했다.

아침도 건너 뛰었는데, 배에는 먹을 게 없다. 고픈 배를 휴게실에서 맥주 한 병으로 달랬다. 그래도 즐거웠던 건 우리 집 둘째 또래의 여고생들이 배 위에서 깔깔대며 웃고, 사진 찍고, 난간에도 올라가는 위험천만한 행동을 하는 모습. 뭐 그리 좋을까? 그들의 기운 덕에 힘들었던 일도 잊고 선실 바닥에 누워 잠을 잘 수 있었는지 모른다.

이렇게 허둥지둥 천리길 이틀째를 시작하는데, 바다 한 가운데서 소식을 들었다. 구속됐던 강정마을 주민 김미량, 평통사의 김종일 씨가 보석으로 나왔단다. 그리고 나중에 보니 제주도민대책위 고유기, 홍기룡 씨도 보석 석방되었다고 한다. 하루만 더 있었어도 그들을 보고 나오는 것인데, 제주를 떠나면서도 그들 면회도 못 하고 와서 찜찜했는데, 마침 잘 됐다. 강정마을 투쟁으로 구속된 분은 이제 강동균 마을회장을 비롯한 세 분으로 줄었다. 그분들도 빨리 나오면 좋겠다.

망월동에 다시 서다

   
▲ 광주 5.18 구묘역에서. 박래군은 "죽은자는 말이 없다. 하지만 죽은 이에 대해 산 자는 예의를 지켜야 한다. 그들의 염원, 그들의 한을 잊지 말아야 한다. 5월 어느날 시신을 비닐로 둘둘 말아 쓰레기 처리하듯이 부려버린 그들. 묏등을 쓰다듬으며 한없이 울던 유가족들이 아니어도"라고 밝혔다. ⓒ박래군
 
완도항에 내려서 고픈 배를 쌈밥으로 해결하고, 다시 광주로 달렸다. 이번에는 내가 운전대를 잡고 속도를 냈다. 오늘부터 합류하기로 한 김정아 사무처장이 광주역에 오후 1시19분에 도착한다고 연락이 왔을 뿐만 아니라 다음 일정들을 소화하려니 어쩔 수 없다. 한번은 도둑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졸음이 와서 운전을 현모에게 맡기고 차는 출발했는데, 할머니 한 분이 쫓아오시면서 뭐라 하신다. 차에 내려 보니 글쎄 길 옆 아스팔트 위에 널었던 나락이 없어졌다고, 우리 차 트렁크를 보자고 한다. 참 기가 막힐 일이다. 나락 도둑놈들에게 천벌을….

망월동은 언제 찾아와도 여전했다. 망월동을 찾을 때마다 신묘역은 지나치고, 구묘역부터 간다. 거기가 5.18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5.18 국립묘지가 주는 분위기가 고압적이고 귄위적이어서 싫기 때문이다.

묏등들이 촘촘하게 누워 있는 그곳, 출생일은 다 달라도 사망일은 1980년 5월 22일, 23일이거나 27일 경우가 대부분인 구묘역의 묘들, 그리고 중간중간에 이한열, 박선영 등의 민주열사들의 묘, 김남주 시인과 해남이 동향인 정광훈 의장의 묘까지 둘러보고, 넘어서 노동열사들의 묘도 찾아보고.

젊은 나이에 꽃처럼 산화해갔던 그들의 묏등을 어루만지며 유가족들은 얼마나 많은 세월 울어야 했던가. 선영이 어머니는 요즘도 와서는 하염없이 딸을 어루만지듯 묏등을 쓰다듬을까? 한열이 어머니는 소주 한 잔 걸치시고 몇 시간이고 잘 생긴 아들과 얘기를 할까? 착하기만 한 덕수 어머니는 덕수 묘에는 오실 수나 있는 걸까? 이런저런 상념들이 훑고 지나간다. 1997년 국립묘지가 만들어질 때 이장을 위해서 파묘를 했더니 비닐에 둘둘 말아서 파묻은 흔적들 때문에 울어야 했던 5.18 유가족들은 어디에 있을까? 사람을 죽였으면, 제대로 장사나 치뤄 주지….죽일 넘들, 죽일 넘들 하며 설움에 북받쳐 울던 그이들이 생각났다.

신묘역으로 나와 리영희 선생님의 묘, 윤상원과 박기순 선배의 묘까지 보고 돌아오는 길. 제주를 떠날 때도 그랬는데, 뭔가 묵직한 것을 안고 가는 것 같기도 하고, 묵직한 것을 두고 오는 것 같기도 하고. 인권의 현장은 늘 이런 역사의 무게 위에 있다. 더 이상 고통 속에 사람이 죽지 않아도 되고, 죽을 결심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보아야 하는데, 쌍용자동차에서 해고자가 또 죽었단다. 17번째의 죽음. 그리고 <피디수첩>이 내보낸 아이엠에프 뒤 민영화된 KT에서의 노동자들의 23번째 죽음들까지. 우리 사회는 죽음으로 멀쩡한 사람들을 내몬다. 조용한 죽음의 체제다. 떠나는 길이 무겁기만 하다.

인화학교 문제? 이제 시작일 뿐

   
▲ 광주종합버스터미널 앞. 박래군(사진 왼쪽)은 "<도가니>의 열풍이 가라앉았을까? 광주시민들은 인화학교 문제가 다 해결된 거 아니냐고 묻고는 한다. 이제 시작일 뿐이고, 참으로 지리한 시간을 붙들고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박래군
 
광주버스터미널 앞에 농성장에 오후 5시에 도착했다. 거기서 권오일, 김용한, 김병태 등 에바다 복지회 이사들을 해후했다. 광주에 들르면서 인화학교 문제로 무엇을 할까를 고민하다가 이사들에게 제안을 했던 게 있다. 이런저런 도가니 대책들이 나왔지만, 정작 고통당한 아이들의 대책은 없었기 때문이다. 지옥 같은 현장에서 고통당한 아이들의 그 상처는 어떻게 치유할까?

그래서 의논한 것이 아이들을 에바다로 전학시켜서 1,2년 생활하도록 하자는 것. 청각장애인들만의 독특한 의사소통구조와 문화가 있기 때문에 비장애인들이 그들의 고통을 안고 풀어주는 데는 한계가 있다. 에바다 아이들과 어울리고, 그들의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연스레 세상에 대한, 인간에 대한 신뢰와 마음의 안정을 찾게 하자고 의논됐다. 그래서 그들은 내 일정에 맞추어서 평택에서 광주로 달려왔다.

버스터미널 앞에서 시민들에게 서명을 받고 있다. 시민들은 정부와 광주시, 교육청 등이 서둘러 내놓는 대책들로 인해서 시민들은 벌써 인화학교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니냐고 묻는단다. 법인 인가 취소, 학교 폐쇄를 위한 초보적인 조치들만 밟고 있을 뿐인데 말이다.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은 너무 많다. 인화학교, 인화원, 작업장 등에 있던 장애아들을 전원시키는 일도 만만찮다. 또 다른 시설에 가두는 방식은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공무원들은 서둘러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서둔다. 거기 아이들의 의사는 크게 상관되지 않는다.

광주지역의 대학생들과 간담회를 농성장 천막 안에서 가졌다. 에바다의 7년 투쟁, 그리고 다시 10년의 정상화 과정. 비정상적인 시설을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리고, 다시 거기서 한 걸을 더 나아가 시설이 아닌 지역에서 장애인들이 어떤 차별도 없이 살 수 있도록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관심과 노력이 들어가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 주고받았다. 특히 에바다 때 대학생들이 에바다대학생 연대회의를 만들어서 결합하였던 것처럼 광주지역의 대학생들이 인화학교 문제를 풀기 위해서 함께 노력할 것을 제안했다. 진지하게 받아주는 그들의 모습이 고마울 따름.

다행히 인화학교 부모님들은 에바다로 학생들을 전학시키는 일에 많이 마음이 가는 모양이다. 한번 시간 내서 에바다 학교를 가보고 싶단다. 시간이 걸려도 그래야 한다. 아이들과 부모들이 에바다를 보고 정말 그리고 가도 되는지를 고민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에바다 이사, 광주대책위 사람들과 헤어져 오후 8시반 경 대인시장에 있는 광주인권운동센터, 광주인권영화제 사무실로 갔다. 그날이 마침 집들이 날이란다. 거기서 광주의 인권활동가들과 국가인권위 지역사무소 사람들, 광주시 인권담당관실 사람들을 만나 막걸리 한 잔 하면서 많은 얘기들을 했다. 할 일은 많은데 사람은 너무 적다고 하소연이다. 거기에다가 광주만의 5.18은 때로는 인권운동의 걸림돌이 되기도 하니.
 
이래저래 세상에 할 일은 많다. 이런 일에 관심을 갖고 운명을 거는 사람이 너무도 적지만, 그래서 인권센터를 만들자고 하는 것이다. 인권이란 게 우리에게 소중하다면, 소중함을 느끼고 아는 사람들을 엮어 내기라도 할 수 있는 공간이 하나 없다는 게 말이나 되나. 광주의 인권활동가들은 이제 지역의 상시적인 인권단체 네트워크를 만들려고 고민 중이다. 그들도 나중에 인권센터를 만들고 싶어 한다. 곳곳에서 이런 노력들이 결실을 맺으면 좋겠다.

내일(12일)은 일찍 소록도로 들어간다. 그리고 전주로 올라가서 노동자들과 지역의 활동가들을 만난다. 또 어떤 이들과 만나 무슨 얘기를 나눌까. 다시 천리길, 길을 간다.

인권센터후원 홈페이지 http://hrfund.or.kr/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①] 10월 9일 제주도 강정마을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011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②] 10월 10일 제주 4.3평화공원, 강정마을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013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③] 10월 11일 광주 망월동, 인화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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