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는 중앙의 영도구실을 적극적으로 해 왕밍의 잘못된 주장을 제어할 결심을 굳혔다. 마오는 국민당이 영도적 위치에서 통일전선을 구실로 공산당을 야금야금 고립시키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마오를 우두머리로 하는 중앙서기처는 3월 25일  ‘중공중앙이 국민당 임시전국대표대회에 보내는 축하전문’에서 왕밍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시 민주와 민생에 대한 요구를 제기했다. 공산당 대표로 회의에 참석한 왕밍은 불만을 품고 이 전문 공표를 보류했다.

왕밍은 또 국민당 자극을 겁내 마오의 치사 중 ‘헌정을 실시해 민의의 첫걸음을 떼어야 한다’ 등의 용어를 빼버렸다. 마오는 5월에 다시 공개적으로 공산당의 영도를 확고히 하면서 전 민족의 항전을 역설했다. 마오는 또 ‘논 지구전(論持久戰 )’ 을 발표하면서 8로군, 신사군 및 유격전쟁의 중요한 구실을 강조했다. 이것이 왕밍의 걱정과 불만의 도화선이 됐다.

우한에서 통일전선 업무를 맡고 있던 왕밍은 마오가 ‘논 지구론’을 신화르바오(新華日報 신화일보)‘에 발표하려 할 때 동의를 거부하고 소책자에 인쇄토록 했다. 왕밍은 비밀리에 우한에 있던 소련인을 찾아가 마오의 행태를 스탈린과 코민테른 대표 디미토로프에게 전해주어 소련 영도자와 코민테른 대표가 갖고 있는 마오의 이미지를 훼손하고 코민테른이 조직에 관여해 줄 것을 요청하는 등의 부탁을 했다. 마오와 왕밍의 ’죽기 살기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처럼 마오와 왕밍의 충돌이 부단히 격화되고 공개화하는 상황에서 3월의 정치국회의는 런비스를 모스크바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코민테른에 중국공산당의 상황과 항일전쟁의 형세를 보고하기 위한 조처였다. 런비스는 4월 14일 코민테른에 중공중앙이 작성한 ‘중국 항일전쟁의 형세와 중국공산당의 공작과 임무’ 제목의 서면보고를 제출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주석단은 6월 11일 회의를 열어 항전 이래 중공의 정치노선이 정확했다고 추인했다.

얼마 뒤 런비스가 코민테른 중공 대표단 단장으로 모스크바에 있던 왕자샹의 임무를 대신하고 왕자샹은 귀국키로 했다. 코민테른 대표 디미토로프는  왕자샹을 만나 중국공산당 전체 당원에게 마오쩌둥을 중공중앙의 영도자로 반드시 지지하도록 전해 줄 것을 지시했다. 디미토로프는 마오가 실제 투쟁하면서 단련되고 성장한 영도자라면 왕밍은 현장공작 경험이 부족해 영수로서는 자격이 부족하다고 부연 설명했다. (주석 170)

귀국한 왕자샹은 1938년 9월 열린 중공중앙 정치국확대회의에서 디미토로프의 담화를 전달했다. 내용은 이랬다.

“오늘의 환경에서 중공 주요 책임자들이 한 덩어리가 되는 게 상당히 어렵다. 이로 인해 문제 발생이 더욱 쉽다. 영도기관은 마오쩌둥을 영수로 한 영도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영도기관은 긴밀하게 단결하는 작풍을 일궈야 한다.”

왕자샹은 구두보고에서 디미토로프의 특별당부를 이렇게 전달했다.

“중공이 단결해야 만이 믿음을 세울 수 있다. 중국에서 항일통일전선은 중국인민 항전의 관건이다. 중공의 단결은 또 통일전선의 관건이다. 통일전선의 승리는 당의 일치와 영도자의 단결에 의존한다.”

승부는 끝났다. 희비가 갈렸다. 서슬 퍼렇던 왕밍의 ‘상방보검(尙方寶劍)’은 빛을 잃었다. 코민테른이라는 뒷배를 잃은 왕밍은 끈 떨어진 쪽박신세로 전락했다. 반면 코민테른의 지지를 받은 마오는 공산당 내 영도자 지위를 더욱 굳히게 됐다. 마오는 왕밍의 우경 투항주의를 척결할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했다. 쇠는 달구어졌을 때 두들겨야 했다. 중공중앙은 6차 6중전회를 옌안에서 열기로 했다. 왕밍은 중공중앙의 결정에 불복해 회의장소를 자신이 머물고 있는 우한(武漢 무한)으로 옮겨 회의를 열도록 요구했다. 마오와 중공중앙은 왕밍의 요구를 거절했다.

6중전회가 9월 29일부터 11월 6일까지 옌안에서 열렸다. 회의 장소는 옌안성 내의 옛 교회당으로 저우언라이와 시안사변의 주역 장쉐량(張學良 장학량)이 1차 비밀회담을 한 곳으로 세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중공중앙위원, 후보위원 및 중앙 각 부문과 각 지구 영도간부 47명이 운집했다. 왕밍도 어쩔 수 없이 회의에 참석했다. 마오는 회의에서 ‘새로운 단계를 논한다(論新階段 논신계단)’라는 정치보고와 ‘통일전선에서의 독립자주문제’, ‘전쟁과 전략문제’에 대한 총결보고를 했다.

“항전 15개월간의 경험이 증명하듯 항일전쟁은 장기전이지 단기전이 아니다. 따라서 전략방침은 지구전이며 속결전이 아니다. 최후승리는 중국인민의 것이며 비관론자들의 말은 추호의 근거도 없는 것이다. 중공중앙이 결정한 전면 항전노선은 중국의 실제에 부합한다. 이미 중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항일전쟁은 바야흐로 새로운 발전단계에 접어들었다. 즉, 전략적으로 서로 버티는 단계다.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의 임무는 바로 어려움을 극복해 일본제국주의를 이기고 신중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런 임무를 실현하기 위해 전당 동지들은 일치단결하여 성실하게 항일전쟁의 중대한 역사적 사명을 책임지고 이끌어나가야 한다.”     
 

   
1949년 스탈린의 70세 생일파티에 참석한 마오쩌둥.
 

마오는 맹렬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마오는 통일전선 문제에서의 폐쇄주의와 투항주의의 편향에 대해 날을 세웠다. 칼끝은 왕밍을 향했다. 마오는 왕밍이 주장했던 ‘모든 것은 통일전선을 통해서’, ‘모든 것은 통일전선에 복종해야 한다’ 식의 논리를 준열하게 비판했다. 마오는 항일시기의 통일전선의 통일성과 독립성, 민족투쟁과 계급투쟁의 정확한 관계를 예리하게 분석해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주석 171)

“장기 (국공)합작을 이끌어 장기전쟁(長期戰爭)을 지지하고, 계급투쟁은 반드시 항일민족투쟁에 복종하는 것이 통일전선의 근본원칙이다. 이런 원칙아래 당파와 계급적 독립성, 통일전선의 독립자주를 유지해야 한다. 합작과 통일이 당파와 계급적 필요권리를 희생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당파와 계급의 일정 한도의 권리를 유지할 때 합작이 유리하고 이른바 합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합작은 뒤섞여 하나로 변질되면서 필연적으로 통일전선을 희생하게 된다. 국민당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당으로 민중운동을 통제하고, 공산당의 발전을 제한하면서 각 당파의 평등 권리를 박탈하고 있다. 국민당은 공동의 정치 강령이나 통일전선상의 조직형식을 원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것은 통일전선을 통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모든 것은 장제스, 옌시산으로 이뤄진 한쪽에 복종하는 것으로 자기를 속박해 자기의 손발에 차꼬를 채우는 것이다. 지금의 형세 하에서 우리는 마땅히 서로 다른 상황에 근거해 각각 그에 따른 대책을 세워야 한다.”

마오의 현하지변은 계속됐다. 마오는 자신의 혁명 전략인 농촌을 근거지로 한 도시포위 공격론을 이죽거렸던 왕밍을 겨냥해 중국의 상황은 자본주의 국가와는 다르다. 중국은 반식민지의 대국이다. 그리고 오늘날 이런 새로운 정당, 군대와 인민이 있어 농촌에서 장기적인 광대한 전쟁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마오는 “항일전쟁을 총체적으로 볼 때 정규전이 중요하고 유격전은 보조적이다. 항일전쟁의 최종 결판은 정규전에서 판가름 난다. 그러나 광대한 지역에서 끈질긴 유격 전쟁을 하지 않으면 일본을 이길 수 없다. 이 때문에 유격 전쟁이 비록 전쟁의 전체적으로는 보조적 위치지만 실제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있다”고 설명했다.

마오는 중국의 실제적인 문제를 모르는 왕밍 등을 정면 조준해 마르크스주의를 교조적으로 신봉해서는 안 된다고 쐐기를 박았다. 마르크스주의는 반드시 민족형식을 통해서만이 실현될 수 있다. 중국의 특징을 벗어난 마르크스주의는 단지 추상적인 공허한 마르그스주의에 불과하다. 때문에 전당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잘 학습해야 한다.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일반원칙과 국제 경험을 중국의 구체적 환경에 잘 적용해야 한다. 마오는 교조주의를 반대하며 외국을 따라하는 형식적이고 낡은 것을 폐지해 중국 인민들에게 환영받는 중국의 기풍과 기상인 신선하고 생동적인 것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마오는 마지막 철퇴를 내리쳤다. 당중앙을 우습게 여기는 왕밍을 겨냥해 당의 규율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했다. 마오는 개인은 조직에 복종하고 소수는 다수에 복종하며 하급은 상급에 복종하고 전당은 중앙의 조직원칙에 복종해야 한다고 빗장을 질러버렸다. 이에 따라 전체회의는 관련 당규와 당법을 통과시켰다. 전체회의는 또 왕밍이 책임자로 있던 우한의 창장국(長江局 장강국)을 폐지하고 왕밍을 옌안으로 복귀하도록 조처했다. 하늘을 찌르던 왕밍의 권세는 화무십일홍이었다.
 

   
왕밍(왼쪽), 마오쩌둥
 

이날 회의에서 40여 명이 잇따라 발언하면서 마오가 제기한 각종 주장을 너도나도 지지했다. 왕밍은 자기변호를 하면서도 공개적으로 마오의 ‘영수 지위’를 인정했다. 왕밍은 ‘중앙과 마오 동지의 주위, 즉 북극성을 뭇 별들이 둘러싸듯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통일 단결’하는 내용의 발언을 했다. 일패도지다. 인심 또한 조변석개다. 회의가 후반에 접어들자 많은 사람들은 왕밍을 거명하거나 빗대면서 왕밍의 과오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왕밍은 회의장을 일찍 빠져나와 이런 비판을 직접 듣지는 못했다. 왕밍은 이제 더 이상 마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왕밍은 왜 소련이나 코민테른으로부터 용도폐기가 됐을까. 우선 왕밍의 중국혁명의 실제 상황에 대한 이해와 인식의 부족을 들 수 있다. 스탈린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총서기 디미토로프는 왕밍이 실제적인 혁명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1937년 11월 11일 스탈린이 모스크바 크렘린 궁전에서 귀국하는 왕밍과 캉성(康生 강생), 왕자샹을 접견한 일이 있었다. 스탈린이 왕자샹에게 홍군 병력이 얼마나 되는 지를 물었다. 왕자샹은 싼베이에 약 3만 명의 병력이 있다고 대답했다.

이때 왕밍이 끼어들어 30만 명이라고 했다. 스탈린은 서로 다른 숫자를 들었으나 장정에 직접 참가한 영도자의 한 사람인 왕자샹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회견자리에 동석했던 디미토로프는 그날의 일기장에 왕자샹이 말한 숫자를 믿는다고 쓰면서 ‘8로군은 30개 사단이 필요하지 3개 사단이 아니다’라고 기록했다. 현재 남아있는 코민테른 문서에 따르면 왕밍이 공작활동에 표현한 일련의 내용들이 모호해 분명치 않아 의심스럽다고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코민테른 문건에는 리리산의 입을 빌어 “왕밍이 코민테른 제7차 대표대회와 다른 장소에서 사실과 숫자를 부풀려 말하고-” 라고 기록했다. 왕밍이 허풍이 심해 믿음이 부족하다는 얘기다.

1938년 4월, 중공중앙이 류야러우(柳亞樓 유아루)를 코민테른에 중공공산당 역사와 현상 등을 보고하기 위해 파견할 때 마오는 자신이 쓴 ‘논 반대일본제국주의의 책략’, ‘중국혁명전쟁의 전략문제’, ‘실천론’, ‘모순론’ 등 몇 권의 책과 준이(遵義 준의)회의 결의를 류야러우에게 주어 디미토로프와 스탈린에게 증정하도록 했다. 이것은 마오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그 이후의 코민테른의 또 다른 문건에 따르면 중국공산당의 당군정 부문에서 뛰어난 인물 26명을 분석한 자료에 ‘마오쩌둥은 확실히 중공당 내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영도자’라고 한 반면에 왕밍에 대해서는 ‘당내 노 간부들 사이에서 아무런 위망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마오는 그동안 굴레가 되었던 코민테른으로부터 해방과 함께 지지를 받음으로써 명실상부한 중공중앙의 1인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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