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우리의 신이 무어라고 말씀하셨는지, 어서 좀 봅시다.” 근대 언론이 싹틀 무렵, 어떤 목사
가 갓배달된 신문을 먼저 보고자 채근하면서 남겼다는 말이다.

물론 그의 말은 현실의 전개를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기독교적 세계관의 반영임직도 하다. 그러나 신문의 현실 전달을 그만큼 신뢰하고 있었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기이하다면 기이하게도, 그 목사의 말이 여러 모로 되새겨지는 오늘이다. 가령 한국통신 사태의 추이만을 지켜보더라도 그러하다. 정작 이땅의 언론은, 그것이 신의 뜻이건 아니건, 우리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전달해 주었던가. 더구나 신의 말씀을 전파하는 신전마저 유린되는 충격의 의미를 제대로 새겨내고, 올곧은 목소리를 울려주었던가.

솔직히 고백하고자 한다. 나는 이제껏 접해온 언론의 전달, 그 거죽만으로는 한국통신 사태의 진상을 확연히 붙잡지 못한다. 이웃들에게 물어보아도 응답은 비슷하다. 한마디로 그 자초지종의 전달이 활자와 전파의 뒷전에 가려진 탓이다. 노동조합의 이른바 ‘준법투쟁’이 왜 불법인지, 또는 그들이 펼치는 준법투쟁의 어느 대목이 국민에게 불편을 주었는지도 헤아릴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검찰이 외쳐대는 불법 타령만이 언론의 나팔 소리로 울려올 뿐이다.

한통 노조를 몰아세우는 기세로 따져야 할 일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은 대통령과 정부 관료들의 헌법 부정과 불법이 아니었던가. 물론 정보 통신망의 안위는 국민생활의 안위와 직결된다. 그만큼 중대한 사안이다. 정보통신망을 포함하는 모든 국가 기능의 영위와 기강을 결정짓는 총괄적인 강령은 역시 헌법이다. 그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의 기본권, 그리고 ‘악법’이라고까지 지탄되는 현행 노동법마저 허락하는 권리를, 행사하기도 전에 봉쇄하는 ‘공권력’이 과연 합헌이며 합법인가.

그때문에 ‘국헌의 준수’를 선서하고 취임한 대통령의 위헌 행위를 근거로, 탄핵소추 운동이 점화되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한국 언론이 곧잘 주장하는대로 통신노조의 쟁의는 국민의 정보망을 볼모로 삼는 불법부당한 행위이고, 교통노조의 경우는 국민의 발을 볼모로 삼기 때문에, 그리고 대기업 노조의 경우는 국가경제를 뒤흔들기 때문에, 쟁의권을 행사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의 헌법은 공소하다. 국가 현실에 적합하지 않는 걸림돌의 강령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 한국언론의 소신이 그렇다면, 궁색한 논리를 짜내고자 허비하는 정력을 오히려 허명일뿐인 법제의 개정으로 돌리는 편이 당당할 터이다.

그러나 다시 기이하다면 기이하게도, 헌법의 명문과 법률 조문에 애써 눈을 가리던 이땅의 언론은, 성당과 사찰의 ‘공권력’ 침입에 이르면, 실정법 만능주의의 칼날을 휘둘러댄다. 실정법 앞엔 ‘성역’이 없다는 ‘시민여론’을 부추겨댄다. 김수환추기경이 설파한 민주화과정에서 정립된 한국적 특수성 이전에 선진의 나라들은 국가법과 종교법의 상호 존중과 절충 그리고 조화와 협력을 추구해오고 있다는 근원적인 법리의 고뇌를 하지 않는다. 부지런한 나팔소리완 대조적으로 언론다운 언론을 위한 정진에 게으르다.

한마디로 안타깝고 두마디로 부끄럽다. 세마디로는 참담하다. 오늘의 언론이 이대로 이어진다면, 내일의 언론은 어떤 수렁에 빠져 있을 것인가. 나는 이땅의 언론인, 언론노동자들의 가슴이 모두 식어버렸다고는 믿지 않는다.

오히려 압도적인 다수의 가슴은 오늘도 달아오르고 있음을 믿고자 한다. 다만 권력과 자본의 억제가 겨울의 강줄기처럼 표면의 얼음으로 드러나고 있을 뿐임을 또한 믿고자 한다. 그 얼음의 밑바닥에선 분명히 청류가 도도하게 흐르고 있을 터이다. 이제 우리 모두 우리의 뜨거운 가슴에 손을 얹고, 오늘의 언론을 응시하고 고뇌할 수밖에 없는 때이다. 그리고 표면의 얼음장을 깨고 밑바닥의 청류를 도도히 바다에 흐르게 하는 ‘돌파’의 길을 찾아나설 수밖에 없는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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