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4일은 진보정치의 앞날을 결정하는 중요한 날이었다. 진보신당이 임시 대의원대회를 열어 민주노동당과의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에 동의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날이었다. 그 결과에 따라 진보정치는 전혀 새로운 방향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는 중요한 날이었다.

'민주노동당과의 신설합당을 통한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 최종 합의문'은 대의원 과반의 동의를 구했지만, 승인 요건인 3분의 2의 동의를 구하지 못한 채 부결됐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통합, 다양한 진보세력의 결합을 통한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이 사실상 ‘좌초’하고 만 것이다. 진보정당은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경향신문 9월 5일자 1면.
 
한국사회 진보정치의 저변을 넓히고자 ‘새로운 정치’의 깃발을 내걸었지만, 벽에 부딪히면서 길을 잃고 말았다. 이번 결정으로 진보신당은 상당한 후폭풍이 불가피한 상황이고, 민주노동당 역시 ‘궤도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당장 진보신당 조승수 대표가 대표직 사퇴를 선언했다. 조승수 대표는 5일 국회 정론관 기자회견에서 “진보신당 당대회의 결과를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진보신당이 통합진보정당이라는 노동자 민중의 열망을 받아 안지 못한 건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밝혔다.

조승수 대표는 “그 책임은 누구보다도 대표인 제가 지는 것이 옳다. 저는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공약하고 추진했던 당사자로서 결국 진보대통합을 이루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진보신당 대표직을 사퇴한다”고 말했다.

조승수 대표는 내년 총선 전까지 통합 진보정당이 건설되지 않으면 2012년 총선에 불출마하겠다는 뜻도 재확인했다. 진보신당의 후폭풍은 당이 사실상 쪼개지는 위기로 치달을 가능성도 있다.

   
조승수(사진 왼쪽) 진보신당 대표와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
@CBS노컷뉴스
 
진보신당 통합파와 독자파는 이번 대의원대회로 그 깊은 ‘간극’을 확인했고, 각자 ‘자기 정치’의 길을 선택할 가능성이 있다. 진보신당의 위기는 진보신당만의 위기로 보기 어렵다. 민주노동당은 물론 진보신당까지 참여하는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의 꿈이 사실상 좌초된 상황은 진보진영 전체의 위기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진보정치의 앞날을 결정하는 중요한 사건이 터졌지만, 여론의 메아리가 없다. 진보정당에게 진짜 위기신호는 ‘여론 무관심’인지도 모른다. 9월 5일자 주요 신문 1면 기사를 보면 한겨레와 경향신문 정도만이 관심을 보였다.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 문제는 물론 야권 대통합까지 ‘암초’를 만난 상황이지만, 언론과 여론의 시선은 온통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 쏠리고 있다.

안철수 교수가 서울시장에 출마할 것인지 말 것인지, 출마한다면 파괴력은 얼마나 되는지, 야권 통합에 찬성할 것인지 말 것인지, 안 교수가 그리는 ‘새로운 정치’는 어떤 그림인지 등에 여론과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진보정당도 통합 정당 건설을 준비하면서 ‘새로운 정치’에 대한 비전을 알리고자 노력했지만, 여론의 메아리가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류 언론들의 ‘무관심’도 한 원인이겠지만, 결국 진보정치의 메시지가 국민들에게 ‘울림’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진보정치’ 지향점이 국민들에게는 중요한 관심사가 되지 않고 있는 현실은 주목할 대목이다. 안철수 교수가 지향하는 ‘새로운 정치’의 타당성과 무관하게 진보정치를 하는 이들은 ‘안철수 현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안철수 서울대 교수
 
수많은 진보인사들이 모여서 그려낸 ‘새로운 정치’의 그림보다 안철수 교수와 그 주변 인물들의 몇 마디가 국민들에게 더 큰 관심사로 떠오르는 현실, 그 원인은 무엇인지, 그곳에서 진보정치는 어떤 교훈을 찾아야 하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얘기다.

진보정치의 중요한 결정이 ‘안철수 현상’에 가려져 언론과 여론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지만, 진보진영에서 언론 탓만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진보정치의 현실을 냉철히 분석하고 원인을 진보의 내부에서 찾는 노력이 선행돼야 해법도 마련할 수 있다는 얘기다.

‘진보정치’ 전문가인 이광호 레디앙 대표는 “가장 핵심은 실력이라고 봐야 한다. 진보 쪽에서 생활진보를 얘기했지만, 국민들에게 믿음직한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대중적인 소통능력도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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